소설리스트

현세귀환록-70화 (70/203)

# 70

현세귀환록

070. 연수(5)

그룹 연수 시절부터 두각을 드러내며 신입 사원 대표까지 맡은 장찬영은, 계열사 연수에서도 특유의 리더십으로 신입 사원 대표를 이어서 하고 있었다.

신입 사원 대표이다 그룹 연수 때부터 동기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계열사 연수에 와서도 전과 같은 맥락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강서영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다.

강서영이 몇몇 수업에 잘 따라가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장찬영이 많은 부분에서 그녀를 가르쳐 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강서영이 계열사 연수에 들어온 이후로 그런 도움을 받은 것이 벌써 다섯 번은 넘었다.

“서영아, 또 이해 안 가는 부분이 있어?”

“제가 회계는 완전 젬병이라서요. 회계 수업만 나오면 항상 막막하네요. 에휴…….”

“이번엔 어디서 막히는데?”

“당기순이익의 세무조정 항목에서 막히네요. 익금산입, 손금산입 같은 용어들도 너무 헷갈려요.”

“아, 그거는……”

신입 사원 연수라 회계의 깊은 부분까지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회계에 문외한인 강서영이 한 번에 알아듣기는 조금 힘들었다.

장찬영은 그런 강서영의 옆에 앉아서 그녀가 어려워하는 부분을 알아듣기 쉽도록 설명해 주었다.

강서영도 기본적으로는 머리가 좋았기 때문에 장찬영의 설명을 들으니 모르던 부분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강서영과 장찬영을 보는 질투의 시선들이 있었다.

사실 장찬영은 그룹 연수 때부터 인기가 있었지만, 다른 인기 있었던 남자 신입 사원과는 다르게 아직도 여자 친구가 생기지 않아 노리고 있는 여자 신입 사원이 많이 있었다.

물론 신애린을 제외한 다른 여자 신입 사원들은 장찬영이 임원의 아들인 것까지는 모르고 있었으나, 외모로 보나 스펙으로 보나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장찬영은 인기가 많았다.

그렇게 장찬영을 노리는 여자 신입사원들이 보기에는 매번 별로 어렵지도 않은 수업 내용을 모르는 척하며 장찬영에게 달라붙는 강서영이 못마땅해 보였다.

특히, 신애린의 시선이 그 질투의 시선 중에서도 가장 강렬하였다.

‘저게 또 저러네. 혹시 쟤도 찬영오빠가 장 실장님 아들인 걸 알고 저러는 거 아닐까? 그래, 알고 그러는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노골적으로 나올 리가 없지. 그룹 연수 때는 그냥 순둥이인 줄로만 알았는데 여간내기가 아니네.’

신애린은 그룹 연수 때부터 장찬영을 꼬시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해보았지만 장찬영은 요지부동이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미모를 믿고 장찬영 앞에서 자주 그의 앞에 얼쩡대며 먼저 다가와 주기를 바랐지만 장찬영은 그녀에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중에는 은근히 호감이 있다는 표시까지 내며 다가갔지만, 장찬영의 철벽은 여전했고 신애린은 굴욕만 당했을 뿐이었다.

결국 계열사 연수에 와서는 직접 고백까지 하였으나 지금은 여자에 관심이 없다는 말로 한방에 차이고 말았는데, 장찬영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신애린이 그를 쉽게 포기할 리가 없었다. 그녀의 소유욕은 되려 점점 더 강해지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강서영과 장찬영이 가까워지는 듯해 보이자, 신애린의 눈에는 불이 붙을 수밖에 없었다.

한창 강서영에게 회계에 대해서 알려주던 장찬영은 옆에서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신애린이었다.

“찬영 오빠, 나도 막히는 부분이 있는데 좀 알려주면 안 될까요?”

“그래, 잠시만 기다려 봐.”

잠시만 기다리라는 장찬영의 말에 유혹의 미소를 지으려던 신애린은 미소가 나오기도 전에 얼굴이 굳어지고 말았다.

장찬영이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과 동시에 앞에 있는 남자 신입사원의 등을 두드리며 하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영재야, 애린이가 모르는 내용이 있대. 좀 알려주라. 난 지금 서영이 가르쳐 준다고 말이야.”

장찬영의 앞에 앉은 안영재는 키가 작고 안경을 쓴 전형적인 모범생 스타일로, 그는 장찬영의 말에 매우 기꺼워했다.

30명의 신입 사원 중에서도 신애린의 미모가 가장 출중하였기에 남자들 사이에서는 신애린이 여자들 사이에서의 장찬영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안영재는 신애린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그래? 알겠어. 애린아, 어디가 모르겠는데?”

“아. 다시 보니 이제 알 것 같아요. 굳이 안 물어봐도 되겠네요. 괜찮아요, 오빠.”

신애린은 굳은 표정만큼이나 딱딱한 말투로 안영재에게 빠르게 말하며 그 자리를 서둘러 피했다.

오늘도 신애린의 원천 봉쇄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 * *

여자에 큰 관심이 없는 장찬영은 오늘도 자신에게 고백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여자 신입 사원 한 명에게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계열사 연수에서만 두 번째 거절이었다. 그룹 연수까지 포함한다면 열 번 가까이 되는 상황이었다.

사실 KM그룹 지주사에 올 정도의 스펙에다가 외모까지 어느 정도 되는 여성은 자존심이 강하여 먼저 고백하는 경우조차 드물 것이었다.

게다가 그 고백이 단칼에 거절당하였으니 한동안 상처받은 자존심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자신을 좋게 보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장찬영은 상관없었다.

‘아버지께서 재기하시면서 여유가 좀 생기긴 했지만, 아직은 여자에 한눈팔 때는 아니지.’

과거 장찬영은 태성그룹이라는 준재벌의 회장 아들로서 방탕까지는 아니지만 꽤 즐기는 인생을 살았었다.

하지만, 그의 그런 삶은 태성그룹이 무너진 이후 모조리 바뀌어 버렸다.

장찬영의 아버지 장태성은 완전히 파산하여 장찬영에게 학비는커녕 생활비조차 보내줄 수 없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장찬영이 미국에서 지내며 학교를 다니기 위해서는 전과 같은 생활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처음에는 단순 아르바이트를 통해서 학자금을 마련하고자 하였으나 아르바이트의 시급으로는 스탠포드의 높은 학비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석 달 정도 밤낮으로 아르바이트를 하였지만 그 월급으로는 생활비를 충당하기에도 빠듯했다.

그래서 장찬영은 학업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갈까도 고민했었다. 하지만 장태성이 그렇게 된 상황에서 이 학교를 졸업해야 그나마 집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작은 기대라도 가질 수 있는 상황이라 판단하고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단순 아르바이트로는 학비를 마련할 답이 없다고 생각한 장찬영은 일종의 사업을 생각하였다.

유학생이라 본인 명의로는 사업을 할 수 없었기에 사업의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그에 따른 수익 배분을 요구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장찬영이 생각한 사업은 중고차 매매업이었다. 평범한 아이템이었으나 타겟층으로 유학생만을 대상으로 하여 사업을 시작하였다.

미국은 차량이 없으면 생활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땅이 넓었기에 차량은 필수인 나라였다. 유학생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유학생들은 짧게는 1~2년 길게는 4~5년 뒤에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미국에 완전히 정착하는 경우가 없진 않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본국으로 돌아갔다.

장찬영은 그들을 대상으로 하여 차량을 매매하는 방법을 생각했다.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아이템이었으나 장찬영에게는 그런 아이템에 도전해 볼 만한 강점 두 가지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자신이 자동차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장찬영은 오래전부터 차에 관심이 많아 고등학교 시절에 이미 자동차의 간단한 정비 정도는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지금은 경영학을 전공으로 배우고 있지만, 웬만한 고장은 스스로 수리할 수 있는 실력이 있었다.

그에겐 중고차를 인수하여 저렴한 가격으로 수리를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두 번째 강점은 인맥이 넓다는 것이었다.

태성그룹이 망하기 전까지는 학교 수업보다는 외부 활동에 더 초점을 맞추고 항상 많은 친구를 만나며 모임을 가져왔었다. 그런 인맥들이 충분히 이 사업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결국 몇 가지 시행착오도 겪었지만 장찬영은 이 사업을 통해서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었고 졸업까지 할 수 있었다.

그 후 미국에서 취직을 하려고 마음먹었던 장찬영은 아버지 장태성에게 뜻밖의 말을 듣게 되었다. 이번에 혜성처럼 등장한 KM그룹의 전략기획실장으로 장태성이 임명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장태성은 아들인 장찬영에게 KM그룹으로 입사하라는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집은 이제 걱정이 없으니 공부가 더 하고 싶다면 대학원을 가도 괜찮다는 이야기를 해주려던 것이었다.

장태성의 입장에서는 아들의 학비 지원도 제대로 못 해준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장찬영은 KM그룹에 대해서 알아보았고, 아버지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 잠재력에 높은 가치를 두고 KM그룹에 지원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장태성의 도움을 받지 않기 위해서 사전에 아버지에게 귀국한다는 이야기조차 하지 않고 했던 행동이었다.

장태성에게 자신의 귀국을 알린 것은 KM그룹에 합격한 이후였기에 신입 사원 채용은 오로지 자신의 능력으로 얻어낸 성과였다.

어차피 스탠퍼드를 나온 재원이라면 어느 대기업을 가더라도 어렵지 않게 취직할 수 있는 스펙이기는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아직 장찬영은 여자들을 만날 마음이 없었다. 어서 실무에 뛰어들어 아버지가 하는 일을 보좌하고,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훗날 KM그룹에서 독립하여 과거 태성그룹보다 더 튼튼하고 거대한 기업체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계열사 연수에 들어온 이후 강서영이라는 여자 신입 사원이 계속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다른 여자 신입 사원처럼 자신을 남자로 대하지 않고 단지 동기나 아는 오빠 정도로 담백하게 대하는데, 밝고 순수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이 그의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청순하고 귀여운 모습에 순수한 마음까지 가져 자신의 이상형에 가까운 여성이었다.

더군다나 장찬영의 외모와 능력을 보면 많은 여성이 호감을 표시했는데, 강서영은 전혀 그런 것이 없어서 그가 싫어하는 속물근성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탓에 성공을 위해서 당분간 여자는 생각도 하지 말고 일에만 매진할 것이라는 그의 다짐조차 약간 흔들리고 있었다.

‘집도 어렵다고 들었는데 이런 순수한 감성을 유지하며 살아왔다니. 대단한 아이네.’

장찬영이 들은 바로는 강서영의 집안 역시 아버지의 사업 실패 이후 어려워졌다고 했는데, 과거 태성그룹이 무너지며 자신의 집안이 풍비박산 났던 일이 생각나 강서영에게 좀 더 깊은 공감과 연민의 감정을 느꼈다.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이른 감정이지만 분명 호감 이상의 감정이었다.

강서영은 연수원에 들어온 후 자기소개를 할 때, 자신의 집안 형편을 강민이 돌아오기 전의 상황으로 말했었다.

있지 않았던 일도 아니었고 강서영의 행동 역시 그런 상황에 맞아 보였기에 그녀의 말에 의문을 품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상황이면 저기 신애린처럼 속물근성이 강해질 가능성이 더 큰데 말이야.’

장찬영은 오늘도 자신에게 접근을 시도했다 돌아간 신애린을 보며 생각했다.

사실 장찬영은 신애린 같이 자존심이 강해 보이는 여자가 직접 고백한 것을 거절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이렇게 꾸준히 접근하는 정확한 이유는 몰랐다.

하지만, 과거 태성그룹이 잘나가는 시절 그런 눈빛을 하고 자신에게 접근하는 여성들을 많이 보아왔기에 이미 그녀의 속물근성은 파악하고 있었다. 속물근성은 장찬영이 무척이나 싫어하는 것이었다.

아직도 장찬영을 노리고 있는 신애린에게는 무척이나 안 된 일이었지만 장찬영이 그녀에게 넘어갈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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