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세귀환록-69화 (69/203)

# 69

현세귀환록

069. 연수(4)

어느덧 그룹 연수가 마무리되는 시점이 되었다. 신입 사원들이 연수원에 들어온 지 한 달이 되었다는 말이었다.

마지막 수업까지 모두 마치고 방에 들어온 박소영이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아~ 이제 지겨운 비즈니스 예절이나 고객 서비스 교육 같은 건 안 받아도 되겠네~”

박소영의 말에 옆에 있던 강서영이 그 말을 받았다.

“언니는 지겨웠어요? 난 재밌던데.”

“엑? 그게 재밌었어? 지루하기 짝이 없던데.”

“그런가? 그럼 협동심을 위한 도미노 쌓기나 창의력 계발 훈련 같은 건 어땠어요?”

“그건 그래도 나름대로 재미있긴 하더라.”

“그쵸? 전 정말 재미있더라고요. 그런 교육이라면 또 받고 싶네요. 헤헤.”

“뭐? 또 받긴 뭘 또 받아. 생각만 해도 지겹다. 난 빨리 나가서 일하고 싶어, 일.”

일을 하고 싶다는 박소영의 말에 강서영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교육을 또 받고 싶기도 하지만 이제 언니들하고 떨어진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좀 그래서요. 여기서 계속 교육받으면 좀 더 같이 있을 수 있잖아요. 이제 계열사 연수로 가서 서로 떨어진다면 언제 볼지도 모를 텐데 말이에요.”

이런 집단생활은 처음이었기에 강서영은 무척이나 재미있어하며 연수원에 잘 적응했고, 신애린을 제외한 방의 멤버들과 매우 친해졌다.

어디서나 사랑받는 강서영의 성품이 여기에서도 잘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놓고 모두와 친해지려 하지 않는 신애린은 그녀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강서영의 말에 박소영 역시 약간 기분이 가라앉았는지 다소 힘이 빠진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맞아, 나도 한 달간 같이 동고동락했던 사람들 하고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하긴 해.”

그런 박소영의 말에 옆에 있던 김진아가 약간 놀리듯이 말했다.

“그래도 언니는 계속 같이할 사람 생겼잖아요.”

김진아의 말에 박소영은 부인하지 못하고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뭐, 그렇긴 하지…….”

한 달간 남녀가 같은 곳에서 생활하고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눈이 맞는 남녀, 즉 커플들이 생겼다. 여기 연수원도 예외는 아니었기에 많은 신입 사원 커플이 탄생하였다.

물론 이 커플이 계열사 연수를 가고 실제 부서에 배치받고 나서까지 그런 연인 관계를 계속 유지한다는 보장은 없었다.

보장은커녕 아마 대부분의 커플이 부서에 배치받고 나면 각종 이유로 인하여 헤어지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었다.

그러나 불나방 같은 청춘들은 그 순간 좋으면 좋은 것이었고 뒷일까지는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오히려 자신들은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 커플이 더 많을 것이다.

그것이 젊음의 오만이었고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젊음의 특권이었다. 대부분 헤어진다고 해서 전부가 헤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몇몇은 그 대부분에 속하지 않고 끝끝내 사랑을 이루어 내는 커플도 있을 것이다.

강서영의 방에서도 남자 친구를 만든 승리자가 탄생하였다. 김진아가 말하듯이 박소영이 그 승리자였다.

반별 체육대회에서 이인삼각 경기를 하다가 같이 한 남자 신입 사원과 눈이 맞았던 것이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남자 친구는 자신이 갈 계열사인 KM마트에 같이 지원했기에, 그룹 연수를 마치고 나면 나머지 한 달간의 계열사 연수도 같이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언니는 좋겠네~ 남자 친구도 있고 그 남자 친구랑 같이 있을 수도 있고~ 축하해~”

다소 리듬을 넣으며 부러움 반 비아냥 반으로 김진아는 박소영을 축하했다.

“얘, 말이 좀 삐딱한 것 같다?”

“삐딱은 무슨 부러워서 그러죠.”

“진짜지?”

“진짜예요~ 속고만 살았어, 언니?”

“그래, 믿어줄게. 호호호. 그건 그렇고 서영이 너 진짜 만나볼 생각 없어?”

자신의 남자 친구의 같은 방 동기가 강서영이 마음에 든다고 자리를 만들어 달라는 말을 몇 번이나 하였고, 박소영은 자신감 있게 강서영을 소개해 준다고 했었다.

하지만 강서영 아직 남자 만날 생각이 전혀 없었고, 마음 한구석에는 떠올릴 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드는 최강훈이 자리하고 있어서 그 제안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래서 박소영의 그런 말에 불똥이 자신에게 튄 것처럼 깜짝 놀라며 강서영은 손사래를 쳤다.

“아, 언니. 그 이야기는 안 하기로 했잖아요. 아직 남자에 관심이 없다고요.”

“23살에 남자한테 관심이 없으면 언제 있으려고 그래. 이제 곧 24살이잖아. 여자 나이 크리스마스 지나면 그때부터 감가상각이야. 감가상각. 무슨 말인지 알지?”

“크리스마스요? 무슨 말이에요?”

“25살이 최고점이란 말이지. 26살부턴 슬슬 가치가 하락한다고. 그러다가 달력에서 없는 숫자 나오면 끝이지 끝!”

“아, 32살부터는 끝이라는 말인 거예요? 비유가 재미있네요. 히히히.”

“그래, 그러니 그전에 괜찮은 남자 만나서 시집가야지. 그 친구 괜찮아 보이던데 진짜 한번 만나기나 해보지그래?”

“헤헤, 진짜 괜찮아요.”

강서영이 귀여운 웃음을 지으며 계속 거절하자, 갑자기 옆에 있던 김진아가 박소영에게 말했다.

“언니! 해달라는 나는 안 해주고 하기 싫다는 서영이만 잡고 그래요? 전 이미 크리스마스도 지났다고요~ 나 해줘요, 나~~”

“아, 그, 그게…… 말은 해봤는데…….”

눈이 작고 턱이 약간 튀어나온 김진아는 평범보다는 약간 못생긴 편이라 그리 인기 있는 외모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그녀도 자신의 그런 모습을 알고 있기에 전에도 단지 농담 삼아 소개팅을 이야기했었고 별로 기대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앞에서 싫다는 강서영을 계속 소개해 주려는 박소영을 보니 뿔이 나서 이렇게 강하게 말을 하였다.

박소영의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에 내심 한숨을 쉰 김진아는 혼잣말처럼 투덜거렸다.

“에이 참. 나도 성형을 하든가 해야지 원. 못생긴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김진아의 자조적인 말에 박소영은 더 당황하며 그녀를 다독거렸다.

“아니야, 네가 못생겼다고 누가 그래. 단지 스타일이 다른 거지, 스타일이. 너 성격 좋다고 좋아하는 남자들도 많다더라.”

“언니, 애써 달래주지 마요. 나도 내 모습 안다구. 지금은 학자금 대출 갚는다고 성형은 생각도 못 하지만 내년까지 그거 다 갚고 나면 꼭 성형하고 말 거예요.”

“그래, 잘 생각했어. 너 성형해서 예뻐지고 나면 달라붙는 남자들 꼭 뻥 차버려~”

달래주려는 박소영의 말에 어디선가 이가 뿌드득 갈리는 소리가 나더니 김진아가 한 박자 늦게 말을 하였다.

“……언니. 아까 전엔 못생기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 그, 그게…… 어? 남친 전화다. 미안~”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박소영은 전화를 받으러 방을 나서 베란다로 나갔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본 김진아는 다시금 성형에 대한 욕구를 불태웠다.

그녀들의 그런 모습에도 신애린은 묵묵히 자신의 짐을 꾸리며 내일 떠날 준비를 했다. 어차피 계열사 연수를 가면 강서영 말고는 다시 볼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강서영에게는 가끔 필요한 말은 붙였으나 다른 사람들과는 말조차 섞지 않았다.

그녀 역시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다른 멤버들과 급은 다르다 생각했지만 굳이 왕따를 자처할 필요가 없었기에 표면적으로는 어울리려고 하였다.

하지만 성격이 직설적인 박소영이 그녀의 그런 모습을 지적하며 말을 꺼냈고, 다소 목소리를 높인 언쟁을 벌인 이후로 그녀는 방 멤버는 아예 상대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고 그렇게 행동하였다.

오히려 그 이후에 만난 F5의 멤버들과 절친이 되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다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F5의 멤버들은 그녀와 친구가 될 만한 ‘급’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중에 최고는 신애린 자신이라고 생각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안타깝게도 F5 중에서 KM그룹 지주로 가는 것은 자신 혼자뿐이었다. 나머지는 KM마트나, KM전자 등 다른 계열사로 가서 계열사 연수에서는 만날 수가 없었다.

‘어차피 상관없지. 찬영 오빠만 잡으면 될 거니 말이야. 근데 그 오빠도 진짜 철벽이네. 나 같은 미인이 들이대는데도 반응이 없다니…… 눈치를 못 채는 건가?’

신애린은 강연 이후 장찬영을 꼬시려고 많은 공을 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장찬영을 노리는 사람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임원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몰라도 좋은 학벌에 신입사원 대표로 리더십까지 보이고 있어 이미 많은 여성이 그에게 접근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장찬영은 신애린을 포함한 그 모두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뭐, 어차피 오빠도 그룹 지주에 지원했으니 계열사 연수에서도 기회는 있겠지. 연수 끝나기 전엔 내 남자가 되겠지.’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신애린이었다.

* * *

그룹 연수가 끝나고 계열사 연수가 시작되었다. 계열사 연수는 전체가 모두 동일한 교육을 받는 그룹 연수와는 달리 계열사별로 교육의 내용이 달랐다.

또한 그룹 연수 때 1,000여 명이 넘는 연수원 인원은 계열사 연수로 넘어가자 200여 명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대부분은 회사 인근의 소규모 연수원으로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몇몇 계열사는 여전히 이 연수원에서 교육하였으나, OJT(On the Job Training), 즉 현장에서 실습으로 일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는 계열사는 계열사 본사 인근의 소규모 연수원에서 OJT와 집합 연수를 병행하여 연수를 진행하였다.

KM마트가 대표적으로 OJT가 필요한 회사였다. 아무리 이론에 빠삭하다 하더라도 실제 현장에서 제품의 진열 상태를 보고 고객들을 만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다른 계열사 역시 이론과 실제는 다를 것이지만 KM마트는 특히 실전이 중요한 회사였다.

반면, KM그룹 지주가 대표적으로 연수원에 남아서 계열사 연수를 받는 회사였다.

그룹 연수가 조직 문화를 익숙하게 하고 비즈니스맨의 기본 소양을 익히는 것에 초점을 두고 이루어진다면, 계열사 연수는 본격적으로 각 계열사의 디테일한 업무에 대해서 공부를 하는 시간이었다.

물론 연수원에서 배우는 내용과 실제 현장에서 사용되는 지식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때문에 그런 간극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OJT까지 진행하면서 신입 사원들이 조직에 적응하는 시간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많은 회사가 노력하고 있었다.

강서영이 속해 있는 KM그룹지주는 그룹의 컨트롤 타워인 지주회사이다 보니 소위 말하는 엘리트 신입사원들이 많이 있었다. 즉, 많은 신입 사원이 좋은 학벌에 좋은 스펙을 갖추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계열사 연수의 수업 수준도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일종의 낙하산으로 그룹지주에 들어온 강서영과 김세나는 수업을 따라가기 약간 버거운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둘 다 국내 최고 대학인 한국대학을 나올 정도로 머리는 좋았지만 전공이 불문과이다 보니 4년간 비즈니스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공부를 했기 때문이다.

특히, 아무래도 취업 준비 자체를 하지 않았던 강서영은 기본적인 비즈니스 용어에도 익숙하지 못해 많은 실수를 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오늘도 비즈니스 회계와 재무제표라는 회계 관련 수업을 하는데, 불문과였던 강서영은 용어 자체가 이해가 안 가 헤매고 있었다.

김세나는 취업 준비를 해왔어서 그나마 용어나 기본 개념은 알고 있어 혼란이 덜 했는데 강서영은 완전히 헤매고 있었다.

그런 강서영에게 도움의 손길이 다가왔다. 늘 그래왔듯이 장찬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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