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
현세귀환록
068. 연수(3)
“그래서 저는 철칙이 있어요. 다들 아시겠지만 저는 연출료를 따로 받지 않습니다. 배우들처럼 러닝개런티만 받죠. 그리고 주·조연 배우들도 다른 영화들에 비하면 고액 출연료를 주지 않습니다. 물론 그들도 보상은 있어야 하니 러닝 개런티는 나가지요. 뭐, 저도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죠. 지금 먹고살 만하니 그렇게 한 거고, 제 인지도가 있으니 배우들이 모이고 그런 선순환이 생긴 거죠.”
목이 말랐던지 강성욱은 잠시 물 한 모금을 마시더니 말을 이었다.
“그렇게 아낀 돈으로 뭘 했냐 하면, 스태프 월급을 올렸습니다. 최저임금도 못 받거나 간신히 최저임금 정도 되는 스태프에게 정기적으로 중소기업 정도의 월급을 지급했어요. 그러니 어땠을 것 같습니까? 앞에 여자분, 어땠을 것 같아요?”
강성욱의 지적을 받은 여사원은 부끄러워하면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조, 좋아 했을 것 같은데요…….”
“하하하, 그렇죠. 스태프들은 당연히 좋아했죠. 문제는 투자자지요. 투자자들은 제가 헛돈을 쓴다고 많은 질타를 했습니다. 만약 그렇게 개봉한 영화의 성적이 좋지 않았다면 저는 그다음부터 투자 자금을 모으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강성욱은 잠시 말을 끊고 강연을 지켜보는 신입 사원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하지만! 그렇게 월급을 받은 스태프들의 능률이 그리고 성과가 제 생각보다 훨씬 더 높게 나타났어요. 영화를 찍으면서 생계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먹고살 만하니까! 영화를 찍는데 급급한 것이 아니라 스태프들 각자가 스스로 아이디어를 내고, 그런 아이디어를 받아주니 디테일 하나하나마다 더 좋은 아이디어가 나왔다는 것이죠. 그렇게 나온 영화가 ‘피의 왕좌’였습니다.”
피의 왕좌는 2010년에 만들어진 영화로 2014년 명량이 1,600만 관객을 찍기 전까지 1,500만 관객으로 부동의 국내 관객 수 1위를 차지하고 있던 영화였다.
“그때부터 저는 저 스스로 생각하는 리더의 역할을 바꾸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리더는 목표를 위해서 조직을 이끌고 그 목표를 위해서라면 조직의 구성원들이 다소 희생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그 일 이후로는 리더가 조직 구성원을 희생시키면서 끌고 가지 않아도, 명확한 비전만 제시해 주면 조직 구성원 개개인이 알아서 움직여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물론 당연히 그들이 그렇게 알아서 움직일 수 있는 최소한의 환경은 마련해 주어야겠지요. 여기서는 그게 최소한의 임금과 복지겠지요.”
약간 힘을 주며 말했던 강성욱은 다시 물을 한 모금 마시며 속도를 죽이며 말을 이었다.
“여러분도 지금은 신입 사원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대리, 과장, 차장, 부장이 되겠지요. 누군가는 이사의 자리에도 오를 것입니다. 그때 지금 제가 했던 말을 한 번쯤은 떠올려 보세요. 내가 너무 강압적으로 조직원들을 대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 조직의 목표 달성을 위해서 조직구성원을 희생시키고 있지 않은지 말입니다. 물론 제 말이 정답은 아닙니다. 다른 상황에서 있는 사람은 다른 생각을 하겠지요. 하지만 제가 나름 영화판에서는 이름 있는 사람 아닙니까? 하하하. 어느 분야나 그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의 말은 한 번쯤은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거 제가 너무 제 얼굴에 금칠하는 것 같아서 부끄럽네요. 아무튼 여기서 강연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짝짝짝짝~
강성욱의 인사와 함께 열화와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강성욱이 손을 흔들며 내려간 뒤에는 피아니스트 최설아가 이어서 연단에 섰다.
그녀 역시 동양인이 그다지 대접받지 못하는 클래식 음악계에서 동양인이라는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서 얼마만큼의 노력을 했는지에 대해 강연을 하였다.
하지만 최설아는 강연 경험도 그리 많지 않았고, 나이 역시 그리 많지 않아 처음 강성욱과 같은 호응을 끌어내지 못했다.
강성욱 감독은 초반 청중들의 시선을 끌어모으기 위해서 영화판의 뒷이야기 등 가십거리를 이용하였는데, 최설아는 아직 그런 강연 기술까지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점심 후에는 연기파 배우 김진일이 강연을 이었다. 김진일은 스타가 되기 전에 엑스트라부터 시작하여 단역만 줄줄이 맡아 어려웠던 자신의 과거를 재치 있게 이야기하며 좋은 분위기를 이끌었고, 준비된 자가 기회를 잡는다는 결론으로 강연을 마무리하였다.
오늘의 마지막 강연은 전 야구 감독 이윤근이었다. 건강상의 문제로 지금은 현장에서 떠나 있었지만, 한국시리즈 7연패에 빛나는 그의 업적은 한국 야구사에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대단한 일이었다.
이윤근 감독은 강연에서 팀을 구성하는 법부터, 능력이 떨어지는 조직원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법, 조직 내의 불화를 이기는 법 등 야구 경험에서 우러난 진지한 조언들을 신입 사원들에게 전해주었다.
그는 뉴욕 양키즈의 전설적인 포수 요기 베라의 명언을 끝으로 강연을 마쳤다.
“야구를 모르는 분들도 요기 베라는 많이 알고 있더군요. 가장 유명한 말이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라는 말이지요.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그 말보다는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다면 결국 원치 않은 곳으로 가게 된다는 말을 더 좋아합니다. 리더는 지금 조직의 상황이 어떤지, 또 조직 외부의 상황이 어떤지 항상 살펴서 지금 우리 조직이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원하지 않는 곳으로 가게 될 테니 말입니다. 저의 강연은 이만 마치겠습니다. 혹시 질문 있으신가요?”
이윤근 감독은 큰 기대 없이 질문이 있냐는 이야기를 던졌다. 사실 소규모 강연도 아니고 이런 대규모 강연장에서, 그것도 릴레이로 이어지는 강연의 마지막 강연이라면 질문이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앞에서 네 번째 줄 가운데에 앉아 있는 남자 신입 사원이 손을 들고 질문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네, 질문하세요. 저기 진행하시는 분은 저분께 마이크 좀 전달해 주시고요.”
진행 요원이 서둘러 남자 신입 사원에게 마이크를 전달했고, 마이크를 받은 신입 사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 있을 때는 몰랐지만 의외로 큰 키에 다부진 체격을 한 신입 사원은 그리 길지 않은 머리를 깔끔하게 정리한 스타일에 다른 사원들과 마찬가지로 비즈니스 캐주얼이라 불리는 복장을 입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감독님. 저는 이번에 KM그룹 신입 사원으로 채용된 장찬영이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오늘 강연에서 리더의 자격과 조건, 그리고 책임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비단 감독님뿐만 아니라 오전에 오셨던 강성욱 영화감독님 역시 리더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여기서 잠시 이야기를 끊고 좌중을 둘러보았다. 여러 사람의 집중에도 긴장하지 않고 오히려 분위기를 끌어내는 모습이 장찬영은 이런 시선을 받는 것에 익숙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지금 감독님께서는 능력이 안 되는 조직원이라도 리더의 능력으로 그 조직원의 능력을 향상시켜 조직에 기여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리더가 조직원 하나하나에 매여서 그들을 모두 개선시키려고 노력하다가 결국 조직의 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하는 것에 집중할 수 없게 된다면 더 큰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까? 즉, 조직의 대의를 위해서는 조직원 한두 명 정도는 희생시킬 수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입니다.”
장찬영의 질문에 이윤근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을 했다.
“좋은 질문입니다. 결국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할 수 있느냐에 관한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사람들은 당연히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하여야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본인이나 가족이 대가 아닌 소에 들어간다면 어떨까요? 기계적인 대응을 한다면 본인이건 가족이건 희생을 해야 한다는 대답을 해야겠지만, 사람이라면 그렇지가 않지요. 본인이 그 상황에 든다면 반발하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이윤근의 말에 질문을 했던 장찬영 역시 다른 신입 사원들과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조직마다 목적이 다르고 상황이 다르고 조직 구성원이 다를 것이기에 제가 하는 말은 모든 조직에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는 말은 아닐 겁니다. 다만 드리고 싶은 말씀은 희생에 따른 보상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조직의 목표를 위해서 한두 명을 희생해야 한다면, 그 희생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해주어야 할 겁니다. 그 보상은 희생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은 사람들을 위해서 하는 것이지요. 만일 희생자가 아무런 보상 없이 희생을 당하게 된다면, 남은 사람들은 언제고 자신도 그런 상황이 되면 조직으로부터 아무 대가 없이 버림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면 조직 구성원들이 열과 성을 다하여 조직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일할 생각이 들지 않게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겠지요. 그렇기에 희생자에게도 보상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한참 이야기한 이윤근은 옆의 물병을 들어 목을 축이고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사실 야구인인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상황에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야구판은 보통 필요가 없어진 선수에 대해서 보상이 가장 박한 조직 중의 하나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 뒷면을 보면 그런 선수에게 은퇴 이후 해외연수나 코치를 보장하는 등 희생자에게 대우를 해주려고 노력하는 부분은 있습니다. 아까 제가 말할 것과 같은 이유에서 말입니다. 대답이 되었습니까?”
이윤근은 질문한 장찬영을 보고 되물었고, 다른 주제로 장찬영은 몇 차례 더 질문을 하였다. 몇 차례의 질문과 답변이 이어지니 처음엔 집중하던 신입 사원들도 슬슬 집중이 풀어지기 시작하였다.
가장 뒷줄에 앉아 있는 신애린 역시 마찬가지였다. 신애린은 야구를 잘 몰라 이윤근이 누구인지도 몰랐기에 더 강연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귀에 연수원 직원들의 대화가 들렸다. 강연을 진행하는 연수원 직원들이 그녀의 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었다.
“저 친구가 그 친구지? 신입 사원치고 주눅 들지 않고 말하는 게 여간내기가 아닌 것 같단 말이야.”
“그래, 저 친구가 장 실장님 아들이라더군. 말하는 것 보니 장 실장님을 빼다 박았어. 여튼 대단하긴 대단하더라고. 프로필을 보니 스탠퍼드 출신이던데 당시 집안 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포기할 만도 했을 텐데 스스로 학비를 해결하면서까지 졸업했다더군.”
“하긴, 당시에 태성그룹이 무너지면서 생활비는커녕 학비도 완전히 끊겼을 텐데 졸업하고 한국에 넘어온 것을 보니 대단하긴 하네. 그런데 장 실장님은 찬영 군이 여기 지원한 걸 알고 계셨다던가?”
“신입 사원 채용 이후에 알았다는군. 어차피 장 실장님이야 계열사별 사업 조정과 신규 사업 발굴만 해도 정신이 없으시니 말이야. 채용 이후에 인사팀장님이 보고 했다던 것 같던데.”
“여튼 찬영 군도 아버지가 그룹 전략기획실장이니 탄탄대로긴 하겠어. 허허허.”
한 직원의 다소 큰 웃음소리에 몇몇 신입 사원이 뒤를 돌아보자 연수원 직원들은 서둘러 말을 마치고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바로 앞에 앉아 있던 신애린은 이미 필요한 정보를 다 들었다.
‘임원 아들이 찬영 오빠였어? 계획을 바꿔야겠네.’
장찬영은 지금 신입 사원 대표를 맡고 있어 그를 모르는 신입 사원은 없었다. 신애린 역시 훤칠하고 학벌도 좋은 그에게 호감이 있었으나 집안이 망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부터는 관심을 끊었었다.
하지만 이런 정보를 들었으니 당연히 그녀의 태도는 달라질 필요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