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
현세귀환록
065. 수하(3)
말론도는 실비아의 양아버지였다. 또한 그녀를 뱀파이어로 이끈 소르빈의 부하이자 친우였다.
소르빈이 유언으로 실비아를 부탁하였기에 그녀 옆에 있는 것이지, 로얄 뱀파이어 등급인 그 스스로도 클랜을 만들 능력은 되었다.
실비아 역시 그 사실을 알고 말론도를 부하로서 대하고는 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아버지처럼 그를 무척이나 의지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어느덧 한 시간 정도가 지나자 마법진의 무지갯빛이 서서히 옅어지며 강민과 실비아의 모습이 드러났다.
여전히 강민의 오른손은 실비아의 단전 부위에 있었고, 실비아는 누운 채로 체내의 마나 순환을 행하고 있었다.
“합!”
강민의 가벼운 기합 소리와 함께 주위에 펼쳐진 마법진을 휘돌던 무지갯빛의 마나가 일시에 실비아의 몸속으로 파고들며 그녀의 몸이 가볍게 떠올랐다.
강민은 깨어난 실비아의 진혈을 자신의 마나로 부드럽게 다독인 후 서서히 그녀의 단전에서 손을 떼고 일어섰다.
강민이 실비아의 단전에서 손을 떼자 마법진 또한 그 목적을 다했는지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빛을 흩날리며 사라졌다.
무지갯빛 가루가 사방으로 흩날리며 서서히 사라지는 모습이 마치 동화 속의 한 장면 같이 몽환적으로 느껴졌다.
마법진 역시 사라져 대법이 끝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아직도 실비아는 일어나지 않고 마나 순환을 하며 체내의 마나를 다스리고 있었다.
대법을 통해 강제로 각성시킨 진혈의 잠재력을 하나라도 더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것이었다.
한참을 더 누워 있던 실비아는 누운 채로 눈을 번쩍 떴는데 그녀의 눈은 빨간 물감을 떨어뜨린 듯 새빨간 빛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그녀의 눈에 있는 붉은 기운이 서서히 옅어지며 사라졌고, 곧 평상시의 눈으로 돌아왔다.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수준에서의 모든 기운의 갈무리를 마친 실비아는 벌떡 일어나 강민에게 감사를 표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벌떡 일어나려 했던 그녀는 10미터 가까이 되었던 은신처의 천장에 이를 정도로 뛰어올랐다.
갑자기 본신의 힘을 훌쩍 뛰어넘는 강대한 힘을 얻은 그녀가 잠시 자신의 힘을 조절하지 못하여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능력이 없다가 생긴 것이 아니기에 힘을 조절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
조심스레 바닥에 착지한 실비아는 강민에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마스터.”
“그래, 몸은 어떠냐?”
“몸 전체가 힘이 넘치는 느낌이에요. 이런 것이 피의 각성이었군요.”
실비아의 말에 옆에 서 있던 말론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실비아의 말을 통해 자신이 아는 피의 각성과 강민의 알고 있는 그것이 그리 큰 차이가 없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가 말해주는 것이니.
“지금 네 마나 수준으로 보아하니 유니온에서 말하는 A급은 충분히 되어 보이는군. 향후 네 노력에 따라서 A+급까지도 가능하겠지. 뭐 그 이상은 네가 하기 나름이겠지.”
하기 나름이라는 강민의 말에 실비아의 눈에는 굳을 결의가 스쳐 지나갔다.
유니온 기준으로 A급의 능력자면 백작급 뱀파이어, A+급이면 후작급의 뱀파이어였다.
즉, 남작급 뱀파이어였던 실비아로서는 지금 두 단계가 넘는 능력 승급을 한 것이었다. 물론 그 등급에 맞는 뱀파이어로서의 능력은 배우고 익혀야 하겠지만 말이다.
이 정도면 뱀파이어의 전체 로드에 도전하기는 턱없이 부족했지만 인근의 뱀파이어들을 규합하여 수족이 될 만한 뱀파이어들은 충분히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 강민은 생각했다.
“그런데 괜찮으십니까?”
질문은 실비아가 아닌 말론도에게서 나왔다.
말론도의 상식으로는 피의 각성은 공작급 뱀파이어도 몇 년간의 휴식이 필요할 정도로 힘든 대법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 가지고 뭐.”
강민의 말에 말론도는 약식으로 하여 그런가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지금 강민이 한 방법이 말론도가 알고 있는 방법보다 몇 배는 더 시술자에게 부담이 가는 방식이고 피시술자에게는 혜택이 가는 방식이었다.
말론도가 알고 있는 정식의 준비, 즉 마나를 정돈하고 만월을 기다리는 행동 자체가 대법을 시행했을 때 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이려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강민은 그 정도의 부담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기에 그것이 필요가 없었고, 오히려 유리엘의 마법진으로 단순한 자연의 마나를 이용하는 것보다 더 강대한 마나 샤워를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 결과 실비아의 원래 잠재력보다 더 높은 수준의 성취를 얻을 수 있게 하였던 것이었다.
“그럼 피의 계약을 맺어볼까?”
“네, 마스터.
이미 강민의 능력을 확인한 실비아는 강민을 마스터로 모시는 것에 대한 거리낌이 없었다. 오히려 강민과 같은 강자가 자신 정도의 뱀파이어를 수하로 두어 어떤 이득이 있을지가 더 의문이었다.
피의 계약을 맺는다는 말에 실비아는 낮게 읊조리며 자신의 진혈을 활성화하기 시작했다.
주문과 같은 말이 끝나자 그녀는 자신의 검지 끝을 깨물어 상처를 냈다.
실비아는 상처의 피를 잉크 삼아 전방의 허공을 종이 삼아 뱀파이어 고유의 문자로 계약서를 작성하였다.
역시 이곳의 뱀파이어는 브리딘 차원의 뱀파이어와 동일한 문자를 사용하였다. 이곳의 뱀파이어 시조는 브리딘에서 넘어왔을 것이라는 강민과 유리엘의 추측이 맞았던 것이다.
마나를 머금은 피의 문자는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고 허공에 맺혀 있었는데, 실비아가 강민이 이 세상에 있는 동안 그를 주인으로 모신다는 내용의 글귀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진혈로써 그녀의 인장을 찍으며 계약의 작성을 마쳤다.
한동안 허공에 떠 있던 계약의 내용은 그녀가 진언을 읊으니 공중에서 불에 타 붉은 연기로 변했고 그 연기는 실비아의 몸으로 흡수되었다. 아마 그녀가 진정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면 연기로 변한 계약의 내용은 흡수되지 않고 허공으로 흩어졌을 것이다.
피의 각성에 비하면 피의 계약의 절차는 간단했다. 하지만 그 의미는 간단하지 않았다.
이제 그녀는 강민이 이 세상에 있는 동안 강민의 수하로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었다.
사실 피의 계약은 좀 더 명확한 상황을 가정하여 계약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몇 월 며칠까지 계약자의 목숨을 바쳐 특정인을 지킨다는 것과 같이 정확히 몇 년간 특정 행동이나 임무를 수행하는 식으로는 내용과 기간을 정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또한 그 기간은 단기간인 것이 일반적이었다.
지금 강민이 제시한 세상에 있는 동안이라는 식의 추상적이고 장기적인 계약은 잘 체결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어떤 상황이 어떻게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 식의 계약을 맺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강민이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수하가 된다는 식의 추상적인 피의 계약을 맺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피의 계약은 진혈에 새긴 맹세이다. 계약을 지키지 않으면 진혈의 힘이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계약을 지키면 지킬수록 계약의 힘이 진혈을 강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런 사실은 장기간의 피의 계약을 맺어본 적이 없는 대부분의 뱀파이어가 모르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과거 카리나와 피의 계약을 맺은 강민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이런 식의 계약을 맺은 것이다.
“마스터, 계약은 끝났습니다.”
“그래, 좋다. 간단한 사항들을 먼저 물어보지. 아까 스티븐에게 왜 루시페르를 탈퇴했냐고 하니 네게 물으라더군. 이유가 무엇이지?”
강민은 아까 스티븐이 대답하지 못한 사항에 대해서 실비아에게 다시 물어봤다.
그녀는 약간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결심을 한 듯 강민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루시페르의 중추에 있는 인물과 같이 있기 힘든 상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이지?”
“제 양아버지인 소르빈 님을 죽인 원수가 루시페르의 다섯 대행자 중의 한 명입니다.”
대행자라는 말에 옆에 있던 말론도가 보충 설명을 하였다.
“대행자는 로드의 생각과 행동을 대신하여 행하는 뱀파이어로, 로드를 제외하곤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뱀파이어입니다.”
대행자라는 말에 강민은 유리엘에게 심어를 전했다.
[여기는 다섯인가 보군.]
[그렇게요. 13 대행자가 다섯으로 줄어버렸네요.]
과거 브리딘에서는 열세 명의 대행자가 있었으나 여기에선 다섯 명의 대행자로 바뀌어 있었다. 그만큼 이곳의 뱀파이어는 브리딘에서처럼 성세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말일 것이다.
“그 원수가 누구지?”
여기의 뱀파이어를 모두 알지 못하는 강민은 이름을 들어도 누가 누구인지 모를 것이지만, 수하의 원수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물어보았다.
원수를 물어보자 실비아는 잠시 멈칫거리며 전에 보였던 복잡한 눈빛을 띠다가 강민에게 대답을 하였다.
“……. 제5대행자인 드미트리입니다.”
강민은 실비아의 표정을 보고 무언가가 뒤에 더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굳이 거기까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드미트리라. 알겠다. 나중에 복수할 기회를 만들어주지.”
“네? 드미트리는 듀크급의 뱀파이어인데…….”
“아직도 내 실력을 잘 모르겠는가 보군. 아무튼 그건 나중에 차차 알게 될 일이고, 너는 뱀파이어가 된 지 얼마나 된 거지? 아직 많이 미숙해 보이는데 말이야.”
“……네. 아직 100년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클랜의 리더라? 좀 이상한데? 수하들이 따르던가?”
보통은 뱀파이어로서 100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야 뱀파이어 사회에서 제대로 된 성인 뱀파이어로 인정을 받는다. 그렇기에 아직 100년도 채 되지 않은 실비아가 클랜의 리더가 되었다는 사실은 충분히 이상할 만도 하였다.
“그, 그건…….”
실비아가 대답을 망설이자, 옆에 있던 말론도가 말을 받았다.
“……그들은 아마 저를 보고 따라온 것일 것입니다.”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군.”
“네.”
말론도의 말에 따르면 실비아가 뱀파이어가 된 지는 아직 7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것만 해도 인간으로서는 노년층에 달하는 나이이나 뱀파이어에게는 많아 봐야 청소년을 갓 벗어난 연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실비아와 뱀파이어의 인연은 소르빈이 한국을 여행하다가 집안이 풍비박산 나서 거리를 헤매고 있는 그녀를 보고 프랑스로 데려가 입양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소르빈은 후작급의 뱀파이어로 과거 동양계 여성 제인과 사랑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녀를 깊이 사랑한 소르빈은 그녀가 사망한 이후에는 다른 여자와는 한 번도 인연을 맺지 않았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보내던 중 한국에서 실비아를 본 소르빈이 제인의 어릴 적 모습과 매우 흡사한 실비아를 보고, 제인과 과거가 생각이 나서 그녀를 입양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물론 어린 그녀에게 연애 감정을 느낀 것은 아니었고, 그녀와 흡사한 실비아가 거리를 떠도는 거지꼴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한 안타까운 감정이 더 컸을 것이다.
당시 제인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뱀파이어를 터부시하는 기독교인의 성향 때문에 소르빈은 자신이 뱀파이어인 것을 알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와의 추억으로 입양한 실비아에게도 자신이 뱀파이어인 것을 알리지 않아 실비아는 그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소르빈이 뱀파이어인지도 몰랐다.
사건은 실비아가 19살 때 벌어졌다. 소르빈은 모종의 사건으로 인하여 제5대행자인 드미트리에게 죽음에 이르는 상처를 입었고, 그 과정에서 실비아 역시 목숨을 잃을 상황에 빠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둘 다 살 수 없다고 판단한 소르빈은 자신의 진혈을 모두 실비아에게로 옮겨 실비아는 뱀파이어로서 살리고 그 자신은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
사건 이후 뱀파이어로 되살아난 실비아는 드미트리에게 복수를 하려 하였으나 소르빈의 친구이자 충직한 수하인 말론도가 그녀를 제지하였다.
실비아의 실력으로는 복수가 아니라 자살이 되고 말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복수가 아니라 드미트리의 눈을 피해서 소수의 충직한 수하들만 데리고 도피를 하게 되었고, 몇십 년간 유럽 및 북미 쪽에 있다가 10여 년 전에 한국으로 들어와서 지금까지 이곳에서 지내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지금 클랜원들은 실비아의 충직한 수하라고 하기보다는, 소르빈의 수하였고 말론도를 따라서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물론 소르빈의 딸이자 그의 진혈을 받은 후계자인 실비아를 따르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실질적으로 실비아보다는 말론도를 더 의지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렇군. 어차피 뱀파이어 세계는 강자의 세계이니 힘을 얻은 지금은 조직 장악력을 높일 수가 있겠지. 그런데 지금 클랜원은 몇 명이나 되지?”
이 질문에는 다시 실비아가 대답하였다.
“저를 제외하고 열두 명의 클랜원이 있습니다.”
“소규모 클랜이군. 그럼 여기 두 명을 제외하면 열 명이 더 있다는 소리인가?”
“그렇습니다.”
“좋다. 어차피 클랜원을 소집하고 지금 쓰는 레어를 정리하는데 시간이 걸릴 테니 일주일의 시간을 주지. 클랜원을 모두 모아서 일주일 뒤에 KM빌딩으로 찾아와.”
“네, 알겠습니다.”
강민의 말에 실비아는 힘 있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