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현세귀환록
064. 수하(2)
드미트리라는 말을 들은 실비아의 눈빛이 변했다.
분노와 아련함이 섞인 뭔가 복잡한 심경이 그녀의 눈 속을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드미트리? 그런가…… 그래서 그 정도 강자가 될 수 있었던 건가……. 그럼 내가 대법을 받으면 그 정도로 강해질 수 있을까?]
[글쎄요. 잠재 능력에 따라서 다를 것이니……. 하지만 실비아 님도 50년도 채 안 되는 빠른 시간에 바론급에 올라왔으니 잠재 능력은 상당하리라 생각합니다. 마르퀴스급인 소르빈 님의 진혈을 얻으셨으니…….]
[그 이야기는 그만!]
소르빈의 이야기가 나오자 실비아는 강한 어조로 말론도를 제지하였다. 말론도 역시 사죄를 하면서 말을 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아무튼 결론만 말씀드리면 마르퀴스까진 어렵더라도 비스카운트나 카운트 등급까지는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음…… 듀크급까진 무리인가?]
[듀크급은 뭔가 다른 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 세계의 마스터 등급이 그 하위 등급과는 다른 게 필요하듯이 말입니다.]
[그래, 일단 계약 조건을 듣고 판단하자.]
말론도와 이야기를 끝낸 실비아는 강민에게 말을 건넸다.
“피의 계약은 어떤 내용으로 계약하려는 것이지요? 그리고 피의 각성을 행할 만한 능력은 되는 건가요? 계약만 하고 각성은 실패하면 어쩌죠?”
실비아는 마음을 단단히 먹은 듯 강민에게 능력이 되냐는 도발적인 말을 하였다.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어. 각성을 시킨 다음 계약을 할 테니 말이야.”
“그, 그런……”
실비아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아니, 말론도까지 당연히 계약이 먼저일 것으로 생각했다.
아니, 계약상의 조건이 피의 각성이라 생각하였다.
그 이유는 피의 각성을 행하고 나면 공작급이라 할지라도 엄청난 마나의 손실 때문에 십 년 가까이 되는 시간의 요양이 필요했다.
그래서 피의 각성을 시행한 직후에는 자신보다 하위 능력자의 공격에도 치명상을 입을 수 있기에 당연히 피의 각성을 조건으로 한 피의 계약이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강민은 그들의 그런 생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각성을 먼저 시켜준다고 하였다. 그랬기에 실비아는 하나의 질문을 더 할 수밖에 없었다.
“마, 만약에 각성만 받고 대법을 끝낸 당신을 우리가 공격한다면 어쩌려고……? 혹시 옆의 여자를 믿고?”
“하하하. 해볼 테면 해봐. 내가 사람을 잘못 본 대가로 생각하고 얼마든지 받아주지. 다만 공격에 실패할 경우 그 대가는 너희들의 목이 될 것이야. 유리가 없더라도 네놈들 정도야.”
강민의 말과 함께 주위를 둘러싼 마나의 성질이 더욱 무거워졌고, 묵직한 살기가 함께 느껴졌다.
그런 마나 성질의 변화에 따라 강민과 유리엘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숨을 쉬기조차 힘든 상황이 되었다.
“콜록콜록.”
“쿨럭, 윽…….”
사람들이 기침과 동시에 숨을 쉬기조차 힘들어하며 신음을 내뱉자 강민은 주위에 실린 마나의 무게를 덜어냈다.
애초에 강민의 깊이를 잴 수조차 없는 그들이었지만 방금의 한 수로 강민의 무서움을 더더욱 느낄 수 있었다.
마나의 무게가 덜어지며 다시금 말을 할 수 있게 되자 실비아는 다급히 강민에게 질문하였다.
“피의 계약 내용은 어떻게 되죠? 그것을 듣고 결정하겠어요.”
“내용은 간단해. 네가 내 수하가 되는 것이지.”
“수하요?”
“수하라 하더라도 너희 클랜의 운영에 개입할 생각은 전혀 없어. 다만 내가 원하는 일이 생기면 그것을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하겠지. 그 정도야.”
수하라는 말에 속으로 발끈하였던 실비아는 다시 생각해 보니 수하라는 이름으로 이런 강자의 그늘에 들어갈 수 있다면 자신들에게는 이익이면 이익이였지 손해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피의 각성이라는 큰 이익까지 있는 상황에서는 두말할 것도 없었다.
실비아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어느 정도의 기간을 원하죠?”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강민의 말은 이 세상에서 일을 다 보고 다른 곳으로 떠날 때까지를 이야기한 것이지만, 실비아는 강민이 죽을 때까지로 이해하였다.
하지만 어차피 가족들이 다 세상을 떠나고 나면 강민과 유리엘 역시 이 세상을 떠나 다른 차원을 갈 예정이었기에 그 뜻은 비슷할 것이었다.
강민의 대답에 실비아는 다시 말론도와 텔레파시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말론도, 어떡하지?]
[마스터급의 강자라 하더라도 인간인 이상 2백 년도 살기 힘들 것입니다. 저 정도 강자의 밑에서 2백 년 정도만 수하로 있으면서 능력을 키운다면 복수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복수라는 말론도의 말에 실비아의 눈이 순간 번뜩였다.
[저자의 수하가 된다면 지금처럼 숨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복수를 할 수 있을까?]
[저자의 능력이라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마나를 통해 의사를 전달하는 텔레파시 역시 전음과 마찬가지로 강민에게는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잘 들렸다. 그러나 강민은 말론도와 실비아의 텔레파시를 듣고 있으면서도 따로 내색하지 않았다.
가족들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세상에 머무른다면 2백 년보다 더 짧은 시간이 될 가능성이 높았지만 강민은 굳이 그들에게 그것까지 언급하지 않았다.
그것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유리엘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말을 듣던 유리엘이 강민에게 심어로 말을 건넸다.
[어쩐지 외국계 뱀파이어들이 한국에 있다 했더니, 숨어들어왔던 것이군요.]
[그렇군. 뭐 저기 실비아라는 뱀파이어가 한국계인 것은 맞는 것 같지만 말이야.]
[복수 운운하는 것이 전에 헤이안과 그랬던 것처럼 또 이상한 데 엮이는 것 아니에요? 호호.]
[그럼 이 녀석들은 포기하고 다른 클랜을 찾아볼까?]
[굳이 그럴 것 있겠어요? 복수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잖아요. 실비아라는 아이가 마음에 들기도 하고요. 호호호]
[끄응…….]
과거 카리나의 예가 생각나서 유리엘에게 다른 클랜을 찾아보는 것을 물어보았으나 유리엘은 강민의 심정을 알고도 재미를 이야기하며 실비아를 고집하였다. 실비아의 순진해 보이는 모습이 유리엘은 마음에 든 것 같았다.
그들의 고민이 어느 정도 정리되는 것 같자 강민은 실비아에게 다시금 물었다.
“어때. 결정했나?”
“그래요, 결정했어요. 제안을 받아들이겠어요!”
“알겠다, 그럼 준비하지.”
“그런데 제가 수하가 되면 그, 그쪽을 부르는 호칭을 어떻게 하면 될까요?”
실비아는 강민을 말하기가 애매했는지 그쪽이라며 얼버무리며 물었다.
실제로 보이는 외모보다 몇 배는 더 살아왔을 테지만, 얼굴을 붉히며 묻는 모습이 영락없는 10대 여고생처럼 보여 강민은 내심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마스터 정도면 될 것 같군.”
“알겠습니다, 마스터. 앞으론 그렇게 부를게요.”
아직 각성도 계약도 하지 않았지만 실비아가 대답하며 강민에게 고개를 숙이자 옆의 말론도 역시 따라 고개를 숙였다.
클랜의 리더가 수하가 된다는 것은 그 클랜 전체가 수하가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었다. 인사를 마친 말론도가 강민에게 물었다.
“마스터, 피의 각성은 언제 하시려고 하는 것입니까?”
“지금 바로 하지.”
“네? 듣기에는 준비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론도가 알고 있는 피의 각성은 최소 한 달 이상 시술자와 피시술자의 마나 상태를 최적화한 다음, 음기가 강한 보름달에 대법을 펼쳐야 한다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말론도 역시 구체적인 방법은 모르고 있었다. 그랬기에 각성의 방법까지 알고 있는 강민에게 더 놀랐던 것이었다.
“아, 괜찮아. 준비가 완료된 상태를 알고 있으니 그 상태로 만들어서 각성시키면 되니까 말이야.”
과거 한수아의 치료와는 다른 상황이었다. 한수아는 선천진기 자체가 약해져서 강민의 시술을 버틸 힘 자체가 없었지만, 지금 실비아는 신체가 건강한 상태였기에 강민의 힘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랬기에 강민의 능력으로 강제로 각성 준비가 된 신체 상태로 만들어 각성을 시킬 수 있었다.
여기에서 각성에 관한 절차를 아는 사람은 강민과 유리엘 뿐이었기에 실비아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자신만만한 강민의 말에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사람들을 조용히 시킨 강민은 손을 휘둘러 스티븐의 은신처에 직경 10미터 정도의 빈 공터를 만들어냈다.
창고형의 은신처는 그 정도 공간은 넉넉하게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넓었다.
공터를 만든 강민은 유리엘에게 말했다.
“유리, 부탁해.”
이미 이심전심 단계에 있는 유리엘은 강민이 별다른 설명 없이 부탁한다고만 하였는데도 고개를 끄덕이며 공터의 옆에 섰다. 마법진을 그리려는 것이었다.
영구적인 마법진이 아닌 임시 마법진이라 별도의 촉매 없이 그녀의 마나로만 마법진을 그리는 것인지, 유리엘은 아무런 도구도 꺼내지 않고 마나를 일으켰다.
어디선가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온 듯 잠시 마나의 유동이 느껴졌다. 그림을 그리듯 휘두르는 유리엘의 손끝에서 무지갯빛 마나가 풀려 나와 공터에 마법진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룬문자와 함께 삼각형, 오각형 등의 일반적인 도형부터 말로 표현하기 힘든 문양까지 각종 그림이 형형색색의 빛깔로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이런 신비로운 광경에 강민을 제외한 나머지 뱀파이어들은 그 광경을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특히 스티븐의 놀라움은 더 컸다. 둘과는 달리 정통의 마법을 배운 마법사이기도 한 스티븐은 유리엘의 마법진이 이곳의 마법진과 그 기초부터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법진에 쓰인 룬문자 역시 여기의 룬문자와는 다른 모습이었는데, 그 문자에 내재된 힘은 여기의 문자보다 훨씬 컸다.
그랬기에 스티븐은 입을 쩍 벌리고 온몸으로 놀라움을 표현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10미터 정도의 공간은 유리엘이 그려놓은 마법진으로 가득 찼다. 유리엘이 그려놓은 마법진은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그 강대한 힘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유형화된 마나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것이 눈에 보였다.
유리엘이 마법진을 완성하자 강민은 실비아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실비아, 이리로 와서 누워봐.”
이미 결심을 굳힌 실비아는 아무 말 없이 강민의 손짓에 따라 마법진 가운데에 누웠다.
실비아가 준비된 곳에 자리하고 눕자 강민이 실비아의 옆에 앉아 단전부위에 손을 올렸다.
준비를 마친 강민이 유리엘을 바라보자 유리엘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딱-!
유리엘이 손가락을 튕기는 것과 동시에 마법진이 활성화되어 무지갯빛 장막이 반구형으로 마법진 전체를 감싸며 강민과 실비아의 신형을 시야에서 감추었다.
마법진이 활성화되어 강민과 실비아가 보이지 않자, 말론도가 유리엘에게 물었다.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사실 말론도는 처음에는 유리엘을 약간 경시하고 있었다. 강민이 나서서 모든 일을 하고 있었기에 그녀의 실력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 그린 마법진의 수준으로 보아 유리엘 역시 자신의 실력으로는 가늠할 수조차 없는 강자임을 알고 자연스럽게 존댓말을 하였다.
“글쎄? 실비아의 잠재 능력에 따라 다르겠지. 예전에 했을 때는 두 시간 정도 걸렸는데, 아까 보니 한 시간 정도면 될 것 같아.”
카리나에 비해서 실비아의 잠재 능력은 다소 낮았기에 유리엘의 판단에 한 시간 정도면 충분히 피의 각성을 마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쯤 되니 말론도는 자신이 아는 피의 각성과 강민이 말한 피의 각성이 같은 것인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준비 과정도 자신이 알던 것과 너무 달랐고, 소요되는 시간도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와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그가 알기로 피의 각성은 최소 일주일에서 길게는 한 달까지 걸리는 시간이 소요되는데, 유리엘은 한두 시간을 이야기하고 있었으니 말이었다.
물론 강민 정도의 강자가 그에 비해 강하지도 않은 실비아의 클랜을 수하로 삼으려고 거짓을 얘기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하였다.
‘아직 피의 계약을 맺은 상태도 아니니 일단 각성이 끝나는 것을 보고 생각해 봐야겠군. 어차피 실비아가 피의 각성을 마치고 나오면 제대로 대법이 시행되었는지 스스로가 알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