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세귀환록-63화 (63/203)

# 63

현세귀환록

063. 수하(1)

강민은 스티븐의 망설임을 이해했다.

리더도 아닌 수하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모든 상황을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내용이 뱀파이어 사회의 일반적인 이야기였다면 방금의 질문은 클랜의 개인적인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클랜의 은원을 알 수 있는 민감한 문제니 스티븐의 말처럼 리더에게 물어보는 것이 맞았다.

“그래, 알겠다. 그 이야기는 저기 네 리더가 들어오면 물어보면 되겠군.”

강민이 말을 마치자 스티븐이 외부로 귀를 기울였고 저 멀리서 바이크 한 대와 자동차 한 대의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이 들려왔다.

이내 바이크와 자동차의 소리는 멈췄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은신처의 정문이 열렸다.

딱 붙는 검은 라이더 복장에 검은 헬멧을 쓴 여성과 정장을 입은 은발의 50대의 백인 남성이 스티븐의 은신처로 들어왔다.

50대 남성은 따로 얼굴을 가리지 않아 그 나이대의 중년임이 보였는데 라이더 복장의 여성은 아직 헬멧을 벗지 않아서 연령대가 짐작되지 않았다.

다만 육감적인 몸매를 드러내는 딱 붙는 라이더 복장이 그리 많은 나이는 아닐 것이라는 추측은 가능하게 하였다.

은신처 안으로 들어온 여성은 헬멧을 벗어 옆구리에 끼었는데 헬멧을 벗자 쇼트커트의 검은 머리가 찰랑거리며 드러났다.

몸매와는 달리 얼굴은 많이 보아도 20대 초반, 그냥 봐서는 10대 후반 정도로 약간 앳되어 보이는 얼굴의 여성은 나이대에 맞지 않게 섹시한 눈빛이 도드라져 보이는 육감적인 표정을 가지고 있었다.

딱 보이는 이미지로는 폭주족 여고생의 느낌이었다. 하지만 눈빛 속에는 뱀파이어의 흉폭한 기운이 서려 있는 것이 확실히 일반인과는 달라 보였다.

부모의 배에서 뱀파이어로 태어난 태생적 뱀파이어였다면 개체별로 차이는 있지만 인간과 비슷한 성장 속도를 보이다 20대 후반 즈음 신체의 기능이 절정에 오르면서 노화가 급속히 느려진다.

그 이후 수명은 베이스가 되는 종족에 따라 다소 다른데 인간이라면 일반적으로 5백 년 정도의 수명은 가지고 있었다. 물론 능력이 뛰어나다면 수명 또한 길었다.

하지만 진혈이 주입되어 뱀파이어가 된 시드 뱀파이어의 경우는 진혈이 주입된 시기부터 노화가 급속히 느려져 태생적 뱀파이어와 비슷한 수명을 가지게 된다.

즉, 지금 1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실비아는 태생적 뱀파이어가 아닌 시드 뱀파이어일 확률이 높았다. 태생적 뱀파이어였다면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외모를 가졌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반면 50대로 보이는 말론도는 50대에 진혈을 받아 시드 뱀파이어가 된 것이 아니라면 최소 400살 이상의 엘더 뱀파이어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것은 인간을 베이스로 한 뱀파이어의 노화는 400살이 지나면서부터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헬멧을 옆구리에 낀 실비아는 또각거리는 발소리를 내며 강민의 10미터 정도 앞까지 다가와 강민을 다그치듯 말했다.

“네가 날 보자고 했나? 무슨 제안이지? 말해봐.”

10대 후반으로 보였지만 아마 실제 나이는 그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기에 그녀에게 반말은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클랜의 리더로서 반말이 익숙해져 있기도 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강민은 그 몇백 배가 넘는 시간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지금껏 나이를 내세우려 한 적은 없었지만 안하무인으로 나오는 상대는 굳이 존중해 줄 필요는 없었다.

또한 스티븐이 공작급 뱀파이어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사전에 경고를 했는데도 그것을 잊은 건지 아니면 강민을 떠보는 건지 이런 반말을 하며 허세를 부리는 그녀를 곱게 보아줄 강민이 아니었다.

“그래, 내가 보자고 했다. 스티븐을 보고 너희 클랜을 좋게 봤는데 네 행태를 보니 내가 잘못 생각한 것 같군.”

“뭐? 무슨 소리야?”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지 못하고 안하무인으로 구는 네 녀석에게 실망했다는 이야기다. 아니면 어린 외모만큼이나 생각도 어린 것인 건지.”

“뭐라고!”

실비아는 강민의 말에 화가 났는지 순간적으로 기파를 쏘아냈지만 그녀의 기파는 바닷물에 들어간 조약돌처럼 어디로 갔는지도 모른 채 사라져 버렸다.

자신의 기파가 사라졌음에 당황하던 실비아는 잠시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금 마나를 끌어올렸다. 조금 전 급하게 기파만 쏘아 보낸 것과는 다르게 신중한 모습이었다.

찬찬히 마나를 끌어올려 다시금 상황을 본 실비아는 경악하고 말았다.

스티븐의 은신처 전체를 덮는 넓은 공간이 자연의 마나가 아닌 이질적인 마나에 장악당한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헉. 어떻게 이런 일이…….”

“이런 마나 장악조차 집중을 해야 감지할 수 있다면, 내가 널 너무 과대평가했나 보군. 한 클랜의 리더라 해서 기대를 했건만.”

강민의 냉정한 말에 실비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실비아는 이들이 공작급 이상의 힘을 갖고 있다는 스티븐의 말을 과장으로 생각했었다.

사실 아직 작위급의 로얄 뱀파이어에도 오르지 못한 스티븐이 제대로 상대를 평가했으리라곤 생각하지도 않았다.

실제로 자신이 와서 보니 자연체의 상태인 강민에게 아무런 기세를 느끼지 못하였기에 강민이 공작급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강민이 제안을 한다고 했으니 자신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 것으로 판단했다. 즉, 자신이 주도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여러 이유로 안하무인의 모습을 보이며 강민을 실력을 떠보고자 했는데, 강민은 그녀가 떠볼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무, 무슨 일로 저를 부른 것이죠?”

실비아는 어느새 강민에게 존댓말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 스스로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네게 하나의 제안을 하려고 했는데 지금 널 보니 망설여지는군.”

실비아가 강민에 대한 판단을 잘못하기는 하였으나 그녀의 마나 기질은 악인의 성향이 아니었다.

물론 이후에 강민의 생각대로 된다면 어느 정도의 교육은 필요할 것이지만 말이다.

강민의 실력을 본 그녀는 감히 대거리도 하지 못하고 얌전히 강민에게 되물었다.

“……어떤 제안이죠?

“피의 각성을 대가로 피의 계약을 하려는 것이었다.”

“피의 각성!”

외마디 외침은 실비아가 아닌 그 옆의 50대 중년인 말론도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실비아는 강민이 말한 피의 각성과 피의 계약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는 것인지 오히려 놀라는 말론도에게 되물었다.

“말론도, 피의 각성이 뭐야?”

놀란 얼굴의 말론도는 실비아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 대신 강민에게 질문하였다.

“어, 어떻게 피의 각성과 피의 계약을 알고 계십니까? 피의 계약은 그렇다 치더라도 피의 각성은 우리 일족에서도 엘더 뱀파이어가 아니면 모르는 것인데…….”

“여기서는 이미 사장되었던가? 하긴 그걸 행할 만한 존재가 드물었을 테니…….”

강민이 말하는 피의 각성과 피의 계약은 브리딘 차원에서 자주는 아니지만 종종 행해지던 방법이었다.

우선 피의 각성은 대상이 되는 뱀파이어의 진혈을 일깨우는 방법으로, 사람으로 치자면 전신의 혈도를 뚫어내는 개정대법에 비견할 만한 대단한 대법이었다.

피의 각성을 통하여 진혈이 깨어난 뱀파이어는 능력이 급상승하게 되는데 잠재력에 따라 능력의 등급이 몇 등급 이상 급상승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하지만 이 피의 각성이 사장되다시피 하여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시술자의 희생이 너무도 컸기 때문이었다.

피의 각성을 시행할 수 있는 최소한의 요건은 백작급 정도의 뱀파이어였지만 대가에 비해 얻는 것이 너무 적었다.

백작급의 마나로는 진혈을 다 깨우지도 못하고 자신의 모든 진원이 고갈되어 얼마 남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많았다.

최소한 공작급의 뱀파이어는 되어야 피의 각성을 시행할 만하였는데, 그 역시 피의 각성을 시도하고 나면 능력에 따라 최소 몇 년은 자신의 진원을 회복하는데 전력을 기울여야 할 정도로 무리가 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피의 각성이라는 방법은 나이가 많은 엘더 뱀파이어 정도만 알고 있었고, 젊은 뱀파이어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었다.

자신의 질문에 대답해 주지 않는 말론도에게 실비아는 옆구리를 찔러 다시 물었고, 말론도는 실비아에게 피의 각성에 대해서 간략히 설명해 주었다.

그렇게 말론도의 대답을 들은 실비아는 그에게 다시 한 가지를 물었다.

“피의 계약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것을 말하는 것이 맞겠지?”

“아마 그럴 것입니다. 외부인이 어떻게 피의 계약을 아는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피의 계약은 마법사 간에서 행해지는 언령의 약속과 유사한 뱀파이어만의 절대적인 계약 방법이었다.

언령의 약속은 마법사들이 마나를 걸고 하는 약속으로 그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외부의 마나가 더 이상 마법사의 의지를 따르지 않아 더 이상 마법사라고 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절대적인 계약이었다.

마찬가지로 피의 계약은 뱀파이어의 진혈에다가 맹세를 하는 계약 방식으로 그 계약을 어기게 되면 진혈이 말라버려 모든 마나 능력 및 뱀파이어의 능력을 상실하게 되어버리는 뱀파이어에게 절대적인 계약이었다.

피의 계약을 어긴 뱀파이어는 뱀파이어로서의 단점은 모두 가지고 있으면서 능력을 모두 잃어버려 일반인만도 못한 존재가 되어버리기에 계약을 행했다면 절대적 구속력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언령의 약속이든 피의 계약이든 계약의 당사자들이 진정으로 원하지 않으면 발현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슷한 점이 있었으며, 둘 다 최근에는 잘 행해지지 않는다는 점 또한 비슷하였다.

브리딘 뱀파이어 일족의 율법에는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피의 계약을 요구해서는 안 되었는데, 이곳에서도 같은 율법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요구하여도 상대가 진정으로 원하지 않는 경우에는 발현되지 않았기에 큰 의미는 없었다.

과거 강민은 이런 브리딘 뱀파이어의 특성을 듣고 카리나에게 피의 각성을 시행해 주고 피의 계약을 맺은 적이 있었다.

우수한 잠재력을 갖고 있던 카리나는 피의 각성을 토대로 로드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고, 그녀는 그 이후로도 강민의 손발이 되어 많은 일을 행하였다. 그러다가 점점 강민에게 호감을 느끼고 결국 짝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도 여자군. 흠, 다른 클랜을 찾아봐야 하려나. 전처럼 되면 귀찮을 텐데.’

강민의 심정을 눈치챘는지 유리엘이 심어를 보냈다.

[민, 그냥 이 녀석으로 해요. 마나 기질도 괜찮아 보이고, 나이답지 않게 순진한 모습도 있는 것 같은데 말이에요.]

[참, 유리엘한테는 비밀도 없네. 하하.]

[민의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는 걸요. 호호호.]

강민과 유리엘이 심어를 나누는 사이, 말론도와 실비아 역시 텔레파시를 나누고 있었다.

[말론도, 어떡하는 것이 좋겠어?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까?]

[피의 계약으로 어떤 조건을 제시하는지 들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그런데 피의 각성이라는 것이 정말 가능한 것이야?]

[가능하니 저렇게 장담하지 않겠습니까? 피의 각성이 가능하다니…… 정말 듀크급 이상은 된다는 말이군요.]

[그런데 피의 각성을 받은 뱀파이어 중에 아는 사람이 있어?]

[과거의 듀크급이나 킹급 뱀파이어들이 자신의 자식들을 위해서 대법을 베풀었다는 기록은 있으나, 어차피 하더라도 비밀로 하니 확실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알기로는 최근 몇십 년 사이에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 흐음…….]

[확실한 것은 아닌데 드미트리가 어릴 적에 피의 각성을 받았다는 소문이 돌긴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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