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세귀환록-62화 (62/203)

# 62

현세귀환록

062. 만남(4)

강민은 스티븐이 대답을 하지 않고 망설이자 한 번 더 압박을 주었다.

“사실 이 자리에서 널 바로 처단하지 않은 것은 네 성향이 악해 보이지 않고, 잘못을 순순히 인정하는 네 태도가 마음에 들어서였다. 그런데 네 스스로 빚을 진 것을 인정하면서도 이렇게 대답을 망설이는 것을 보니 내가 잘못 판단 한 것인가 싶군.”

강민의 말에 스티븐은 이를 한 번 악물며 마음을 다지더니 강민에게 반문했다.

“저희 클랜 리더님을 만나시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까지 네게 말을 해야 하나?”

“제, 제 잘못은 저 혼자 잘못한 것이니 제 클랜에게까지 피해를 주고 싶지는 않습니다. 만약 저희 클랜 리더님께 죄를 물으시려 한다면 여기서 제 목숨을 받는 것으로 끝내주십시오.”

스티븐은 강민과 유리엘의 실력을 가늠조차 못 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자신의 클랜 리더 역시 둘을 상대하긴 힘들 것이라 판단했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강민이 악한 마음을 먹고 클랜 리더를 만나려 한다면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막을 생각이었다.

스티븐은 강민의 의도를 오해하고 있었지만, 강민은 죽음을 무릅써서라도 클랜과 클랜 리더를 보호하려는 스티븐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음. 지금 내가 너희 클랜 리더를 만나려는 것은 이번에 네가 잘못한 것과는 관계가 없다. 오히려 그에게 도움이 되는 제안을 하려는 것이지. 좋다, 네가 그것이 우려된다면 네 클랜 리더를 만나더라도 그를 해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지.”

강민의 약속에 스티븐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제가 리더님께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강민이 고개를 끄덕이자 스티븐은 휴대전화를 꺼내어 전화를 걸었다.

-스티븐?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무슨 건수라도 생긴 거야?

“말론도 님? 실비아 님은 어쩌고 말론도 님이 전화를…….”

-실비아 님은 지금 주무시지.

아직 낮이었지만 밤이 익숙한 뱀파이어에게는 낮에 잠을 자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기에 스티븐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실비아 님을 바꿔주실 수 있습니까?”

-무슨 일인데 그래?

“중요한 분이 실비아 님을 만나 뵙길 원합니다.”

-중요한 분? 누군데?

“KM그룹의 강민 회장입니다. 최소한 뱀파이어 듀크급 이상의 강자인 것 같은데 우리 클랜에 도움이 될 만한 제안을 하신다는군요.”

스티븐은 강민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과거 인식 장애를 해제했을 때 이일광이 강민이 KM그룹의 회장임을 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듀크급? 확실한가? 위험한 상황은 아닌가?

“위험한 상황을 없을 것이라는 약속이 있었습니다.”

-그래? 그래도 혹시 모르니 실비아 님을 바로 모시는 것보다는 내가 먼저 만나서 판단하도록 하지.

“클랜 리더를 만나 뵙고 싶다 하시는데…….”

-어떤 상황인지 확인은 해봐야지.

“네 알겠습니다.”

전화 통화를 마무리 지으려고 하는 찰나 전화기 너머로 실비아로 추정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고 말론도는 스티브와의 전화를 끊지 않고 그녀와 이야기를 하였다.

-아, 스티븐입니다. KM의 강민 회장이라는군요. 네, 그래도 위험할 수 있으니 제가 먼저 만나보는 것이……. 아, 네, 알겠습니다.

말론도의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다 들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실비아 님께서 직접 가신다는군.

“아, 그러시군요. 알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말론도와 대화를 한 실비아가 직접 이곳으로 오기로 결정한 것 같았다.

전화를 끊은 스티븐은 강민을 돌아보며 말했다.

“지금 리더님이 직접 오신다 하시는군요. 아마 30분 정도면 도착하실 겁니다.”

강민과 유리엘은 스티븐이 있는 곳에 온 것처럼 전화를 통해 좌표를 넘긴 후 그리로 갈 수 있었으나 굳이 그러지는 않았다.

어차피 이리로 오기로 한 사람들에게 경계심을 심어줄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화를 끊은 스티븐은 잠시 여유가 생겨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은신처로 마련해 놓은 곳이 전투에 대한 여파로 인해 난장판이 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사실 은신처에 대한 직접적인 타격은 없었다. 하지만 강민의 호신막에 튕겨 나간 자신의 마법과 탄환으로 인하여 벽의 군데군데가 그을리고 구멍이 나 전투를 치르고 난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 되어 있었다.

벽에 걸려 있던 여러 장비는 떨어져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실험을 하던 물품들도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주위의 모습을 본 스티븐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가 스스로가 웃겼던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 지나가자 은신처가 어지럽혀지고 물품들이 나뒹구는 것을 걱정하는 자신이 우스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스티브를 보던 강민이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딱 봐도 한국 태생은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한국에서 자리 잡게 된 것이지?”

“클랜 리더님이 한국 출신입니다. 독립하면서 같이 오게 되었지요.”

“그래? 아까 실비아라고 하지 않았던가?”

분명 아까 전화 통화에서는 클랜 리더를 이야기할 때 실비아라는 이름이 나왔기에 강민이 다시 물었다. 실비아는 분명 외국 이름인데 한국 출신이라 하기에 묻는 말이었다.

강민의 물음에 스티븐은 망설임 없이 대답하였다.

“그건 실비아 님이 어릴 적에 해외로 입양이 되어서 그렇습니다.”

스티븐은 강민의 질문에 크게 감추는 것 없이 대답하였다. 비밀로 할 것도 아니었기에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런 스티븐에게 강민은 다른 질문을 하였다.

“독립이라면 원래 속해 있던 집단이 있었다는 것인데, 어디지?”

“루시페르입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현재 뱀파이어 세계를 장악한 곳이 루시페르입니다. 그러니까 루시페르의 로드가 지금 뱀파이어 세계의 로드이지요. 루시페르는 유니온에도 가입해 있는 단체입니다.”

루시페르가 유니온에 들었다는 이야기에 유리엘이 말했다.

“호오, 뱀파이어 집단이 유니온에도 들어갔다니, 여기 능력자들도 상당히 전향적이네요.”

“글쎄, 처음부터 받아들이진 않았을 거야. 분명 투쟁의 역사가 있었겠지.”

투쟁이 있었을 것이라는 강민의 말에 스티븐이 이어 이야기하였다.

“그렇습니다. 제가 태어나기도 전의 이야기이지만 과거 대항쟁이 있었다 하더군요. 몇백 년의 항쟁 끝에 지금 로드이신 로드 블라디미르께서 올림포스와 템플 나이트와 담판을 지은 후 우리의 존재를 인정받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역시 그렇군요.”

“그렇지. 흡혈이라는 것은 인간 세계에서 금기시되는 행위이니 말이야. 힘겨루기가 있었을 것이고 뱀파이어 쪽에서 그 힘을 보였겠지. 하지만 인간 세계에 뱀파이어 헌터가 존재하듯이 뱀파이어들도 의견의 일치를 보긴 힘들었을 텐데, 그렇지 않나?”

강민의 말에 스티븐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맞습니다. 인간과 공존한다는 루시페르의 이상과는 다른 생각을 가진 뱀파이어도 있었지요. 아니, 지금도 있습니다. 벨리알이 그 중심에 있는 조직이지요. 인간들이 말하는 카오틱에빌 중에서도 가장 큰 조직입니다.”

스티븐의 말에 따르면 루시페르에 있는 뱀파이어들은 인간과 공존한다는 대의에 동의를 하고 무분별하게 흡혈을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를 위해 루시페르에서는 많은 대형 병원과 혈액원을 소유하여 휘하 뱀파이어에게 주기적으로 혈액팩을 제공해 주고 있었다.

만약 뱀파이어가 진혈을 옮기지 않고 단순히 피를 위해서 송곳니를 꽂아 넣는 경우, 송곳니에 있는 일종의 바이러스가 흡혈자의 몸에 파고들어 그것을 이겨낼 마나 능력이 없는 일반 사람들은 시름시름 앓다가 목숨까지 잃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일반인이 이능의 세계와 엮이는 것을 막으려는 유니온은 루시페르와 협력하여 뱀파이어들에게 혈액을 제공하는 것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이 부분도 마족 계통의 뱀파이어와 차이가 있었는데, 마족 계통의 뱀파이어가 같은 행동을 하였다면 흡혈의 대상자는 더 빠른 시간 내에 목숨을 잃을 것이다.

그리고 목숨을 잃은 이후에는, 흡혈한 뱀파이어의 능력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 언데드 몬스터가 되어 인간 세계에 추가적인 피해를 주었을 것이다.

사실 브리딘 계통의 뱀파이어라면 생존을 위해서 정기적인 흡혈을 해야 했지만 그것이 꼭 인간의 피일 필요는 없었다.

동물의 피로도 생존은 할 수 있었다. 다만 그 맛과 영양이 극히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었기에 인간의 피를 선호할 뿐이었다.

사람으로 치자면 맛없는 에너지바 같은 식량만으로도 먹고 살 수는 있지만, 제대로 된 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의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모두가 이런 루시페르의 정책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신선한 인간의 피는 뱀파이어에게는 맛있는 만찬이나 다름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막는 루시페르의 방침은 인간의 피를 즐기는 일부 뱀파이어가 받아들이기 힘든 정책이었다.

이런 이유로 인간과 공존한다는 루시페르에 속한 뱀파이어도 가끔은 몰래몰래 인간을 납치하여 흡혈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루시페르에서도 정도를 넘지 않는 이상은 눈을 감아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루시페르의 대척점에 서 있는 벨리알의 뱀파이어는 가끔 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벨리알은 인간의 신선한 피를 추구하는 집단이었다. 특히, 벨리알의 일부 뱀파이어는 인간이 마약에 중독되듯, 깨끗한 처녀나 아이의 피에 중독되어 무차별적인 흡혈을 벌이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런 뱀파이어는 중독자라고 불리며 유니온의 최우선적인 척결대상에 올라가기도 하였다.

이렇듯 일반인의 피가 맛있는 음식이라 한다면, 마나 능력자의 피는 뱀파이어의 진혈을 강화시켜 능력을 발전시킬 수도 있는 영약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뱀파이어 헌터가 뱀파이어를 사냥하듯 벨리알의 뱀파이어들은 마나 능력자를 사냥하여 능력을 키우기도 하였다.

루시페르의 뱀파이어 역시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일반인이 아니라 마나 능력자의 피를 취하는 것에 대해서는 막지 않았다.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을 막는다면 반발이 심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능력이 없다시피 한 F급의 능력자는 예외의 대상이긴 하였다.

이처럼 루시페르와 벨리알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 많았고, 서로가 서로를 경멸하고 기피하는 경향이 강했다.

루시페르의 뱀파이어는 벨리알의 뱀파이어를 보고 본능에만 충실한 짐승이라고 불렀고, 벨리알은 루시페르를 보고 로드의 말이라면 음식조차 먹을 수 없는 노예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 두 집단이 공동으로 대응하는 때가 있었다. 변종 뱀파이어를 만났을 때였다.

변종은 뱀파이어를 흡혈하는 뱀파이어다.

강함을 추구하는 뱀파이어는 진혈을 강화하는 것에 목숨을 건다. 뱀파이어에게 진혈은 인간에게 진원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그중 변종 뱀파이어는 진혈의 질이 아니라 양에 초점을 두고 다른 뱀파이어의 진혈을 흡혈하여 강해지려 하는 종류의 뱀파이어였다.

이곳의 뱀파이어는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십자가나 마늘을 무서워한다든가 햇빛을 보면 재로 변한다든가 하는 일은 없었다.

다만 햇빛 아래에서는 진혈의 활동이 억제되어 본신의 능력이 다소 제한되고 어둠 아래에서는 진혈이 활성화되어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좀 더 용이한 정도의 차이는 있었다.

뱀파이어의 피를 흡혈한 변종은 이것이 극대화되어 있었다.

뱀파이어의 피를 흡혈할수록 체내의 핏속에 진혈이 점점 더 많은 양을 차지하여 나중에는 햇빛 아래에서는 움직이기조차 힘들었고, 반면 어둠 속에서는 본신의 몇 배의 힘을 발휘하여 번개처럼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변종 뱀파이어는 항상 밤에만 움직이며 동족을 노렸다.

그렇기 때문에 변종을 만났을 때에는 루시페르 소속이든 벨리알 소속이든 관계없이 변종을 최우선으로 처리하였다.

또한, 변종 뱀파이어는 중독자들과 마찬가지로 유니온에게도 최우선적인 처리 대상이었다.

그것은 무분별하게 동족의 진혈을 흡수하여 진혈이 탁한 변종 뱀파이어는 그것의 자체적인 정화 과정에서 인간들에게 진혈을 뿌려 일반인들도 무차별적으로 뱀파이어로 만드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뱀파이어 세계에 대한 대강의 설명을 마친 스티븐에게 강민은 하나의 질문을 더 던졌다.

“그런데 왜 루시페르에서 나오게 된 것이지?”

“그, 그건…… 제가 답하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나중에 실비아 님께 직접 물어봐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의 클랜이 루시페르에서 나온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 여태껏 술술 대답하던 스티븐은 대답을 망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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