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
현세귀환록
061. 만남(3)
스티븐은 재빨리 뒤로 물러나며 자신의 몸을 안개화했다. 문을 열 필요도 없이 안개화 상태로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안개화 상태에서는 물리적 피해를 입지 않는다는 이점도 있었다. 물론 안개화를 한다 해도 마나가 담긴 공격까지 막을 수는 없었지만 순간적으로 이곳을 피해서 종적을 감추기에는 안개화 상태가 가장 나을 것이라 판단하였다.
“어딜 도망치려고.”
그러나 검은 안개로 변하던 몸은 강민의 손짓에 강제로 원래 상태로 돌아갔다.
“크윽…….”
“이리로 오지그래.”
강민이 한 번 더 손짓을 하자 스티븐의 몸은 숨어 있던 테이블을 넘어 속절없이 날아갔다.
처음에는 날아가는 반대 방향으로 힘을 주며 버티려 하였지만, 그 힘을 이겨낼 수가 없자 오히려 그 힘에 순응하여 더 빨리 강민에게 날아왔다.
강민의 지근거리까지 온 스티븐은 손목에 찬 팔찌에 손을 대더니 짧은 시동어를 외웠고 팔찌에서는 강한 빛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하지만 그 빛은 풍선에서 바람 빠지는 것처럼 푸시식 하는 소리와 함께 터지지도 못하고 꺼져 버렸다.
“어, 어떻게…….”
스티븐의 물음에 대답한 것은 강민이 아니라 유리엘이었다.
“민이 마나 유동 억제를 해서 그렇죠. 그건 그렇고 더블 스펠이 담긴 마법기네요. 마나 수준이 낮기는 하지만 말이에요. 담긴 마법은…… 버닝 라이트와 에어 봄인가요? 공격 마법으로만 넣은 것을 보니 성향이 공격적인가 봐요.”
유리엘은 아직 스티븐을 적대할 생각이 없었기에 그의 질문에 친절히 답을 하면서 그를 살폈다.
스티븐은 자신의 마법이 전혀 먹히지 않았으나 포기하지 않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둘의 기색을 보아하니 자신을 공격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스티븐도 다시 공격할 생각을 접었다. 어차피 자신의 공격은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만, 도망갈 생각은 포기하지 않고 그 기회만 보고 있었다.
그런 스티븐을 보던 유리엘이 말했다.
“음…… 마나 패턴이 브리딘 차원의 뱀파이어와 비슷한데요? 민, 그런 것 같지 않아요?”
“그렇네. 그쪽에서 넘어온 뱀파이어가 여기에 적응해서 진혈을 뿌린 것 같군. 본질적인 부분이 브리딘 쪽과 거의 비슷하니 말이야.”
“브리딘 녀석들이라면 나름 괜찮지 않았어요? 걔들은 다크마 차원 애들처럼 어둠의 마나를 사용하는 마족 계통의 뱀파이어가 아니라 단순히 혈액에 담긴 생기(生氣)만을 필요로 한 뱀파이어였으니 말이에요.”
“그렇지, 그러니 생식 활동을 하는 것에도 제약이 없었지. 마족이 아니라 하나의 이종족과 같았으니.”
“일종의 기생종족이긴 했지만 그래도 브리딘의 주요 종족 중의 하나였지요.”
강민과 유리엘이 그간 보아온 뱀파이어는 크게 두 종류였다.
한 종류는 인간이나 오크 등과 같은 하나의 인간계 종족을 이루는 뱀파이어였고, 다른 한 종류는 어둠의 마나를 기반으로 하는 마족의 한 종류인 뱀파이어였다.
두 타입의 뱀파이어 모두 인간계에서 활동을 하였지만 전자의 뱀파이어는 인간계의 구성원으로 생식 활동을 하여 후손을 볼 수 있었고, 후자는 인간계의 뒷면에서 단지 흡혈을 통해 일족을 늘려나가는 방법밖에 없다는 큰 차이가 있었다.
물론 전자의 뱀파이어도 뱀파이어의 진혈을 주입하여 동족으로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진혈을 주입하는 것은 인간이 진원을 넘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능력을 떨어뜨리는 행동이기 때문에 자주 발생하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퍼스트 블러드를 제외한 뱀파이어들은 퍼스트 블러드가 각 종족에 진혈을 주입하여 뱀파이어화 시켜 종족을 이룬 것이었기에 기생종족이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브리딘의 뱀파이어는 대표적인 전자 타입의 뱀파이어였고, 그렇기에 브리딘 차원에서 하나의 독립된 종족이 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인간형 뱀파이어가 가장 많았지만 오크나 드워프 등의 아종족 뱀파이어도 드물게 존재하였다. 그런 뱀파이어끼리 관계를 하는 경우에는 하프 오크 뱀파이어나 하프 드워프 뱀파이어가 태어났다.
또한 뱀파이어와 비뱀파이어 간의 생식 활동을 통해서도 하프 뱀파이어를 만들 수 있었는데, 하프 뱀파이어는 혈액에 대한 욕구가 적은 만큼 뱀파이어로서 낼 수 있는 힘 또한 약하였다.
그리고 한 세대 더 내려가 쿼터 정도로 뱀파이어의 피가 적어지면 그때부터는 혈액을 취하지 않아도 생존이 가능하여 뱀파이어라 부르지도 않았다.
물론 반대로 이야기하면 그만큼 뱀파이어로서 낼 수 있는 힘도 거의 없다는 이야기가 되겠지만 말이다.
브리딘의 이야기를 하던 유리엘은 갑자기 무엇인가 생각난 듯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강민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카리나 녀석이 새삼 생각나네요. 그 녀석 잘 있으려나? 우리가 브리딘 차원을 떠날 때 민한테서 안 떨어지려고 울고불고 매달렸잖아요. 우리 가는 곳에 데려가 달라고 고집까지 피우면서. 호호호.”
“흠흠, 갑자기 카리나 이야기는 왜 꺼내고 그래.”
그때 일이 기억난 강민은 괜히 쑥스러운지 헛기침을 하였다.
“브리딘 얘기하니까 기억이 나서요. 로드라는 녀석이 그렇게 울고불고했던 것이 생각나니 우습기도 하고, 민의 아이를 갖고 싶다고 유혹하던 모습도 생각나고. 드물게 엘프에서 뱀파이어가 된 녀석이라 한 미모 했잖아요. 호호.”
“그래도 유리한테는 안 됐지, 흠흠.”
유리엘은 강민이 쑥스러워하는 모습에 다시금 웃음을 짓더니 말을 이었다.
“생각난 김에 여기 일 다 끝나고 나면 브리딘 한번 들러봐요. 물론 이미 만년도 넘은 시간이 지났으니 카리나는 아마 마나로 돌아갔을 것 같지만, 차원마다 시간의 흐름이 다르니 혹시 그 녀석이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래, 여기 일 다 끝나면 생각해 보자. 그래도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워낙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말이야.”
“그래요. 그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겠죠.”
한 번 들렀던 차원에는 마나 각인이 되어 강민이 차원검을 쓸 정도로 회복이 된다면 얼마든지 다시 갈 수 있었다.
게다가 마나 각인이 된 덕분에 마나 충돌 역시 없었기에 아무런 힘의 손실 없이 차원 이동을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말 그대로 가벼운 마음으로 한 번 들렀다가 곧바로 다른 차원으로 이동할 수도 있었다.
물론 여기에서의 일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함부로 차원 이동을 할 수는 없었다. 차원마다 시간의 흐름이 달랐기 때문에 잠시만 왔다가도 여기서는 얼마의 시간이 흘러갈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유리엘도 여기의 일이 다 끝나고 가 보자고 말한 것이었다.
아직도 어떻게 자신의 마법이 봉쇄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한 스티븐은 둘의 대화에도 계속 마나를 끌어올려 마법을 시도하였으나 시행되지 않았다.
마법뿐만 아니라 안개화 같은 뱀파이어의 고유 기술 역시 발현되지 않았기에 스티븐의 당혹감은 더욱 컸다.
스티븐의 당혹감에도 강민과 유리엘의 대화는 끝나지 않았다.
“여기도 브리딘과 유사한 체계일까?”
“완전 똑같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비슷하지 않겠어요?”
“그럼 한 클랜 정도 잡아서 부려볼까? 아무래도 수족이 필요한 시점이긴 하잖아.”
“하긴 이 차원도 흐름의 변곡점에 들어온 이상 수족으로 부릴 만한 이능 집단이 필요하긴 하죠. 웜홀의 폭주가 일어날 시기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으니 말이에요.”
“그래, 그때 수족이 없으면 불편할 것 같아.”
“브리딘 쪽 뱀파이어라면 괜찮은 선택인 것 같아요. 계약을 할 수도 있으니 말이죠.”
“그렇지. 저번처럼 잘 키워서 뱀파이어 로드까지 되면 상당히 편해질 수 있겠지.”
유리엘과의 이야기를 어느 정도 마무리 지은 강민은 아직도 둘을 살피고만 있는 스티븐에게 물었다.
“네 녀석이 있는 클랜의 리더를 만나고 싶은데.”
도망갈 생각만 하던 스티븐은 강민의 질문에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헌터는 아닌 것 같은데 누구십니까?”
“헌터? 그렇군. 뱀파이어가 있으면 헌터 역시 있겠지. 그래, 네가 본 대로 헌터는 아니지. 헌팅을 하려고 하였으면 이미 네 녀석의 목을 베고 진혈을 찾아 담았을 테니 말이다.”
목을 베었을 것이라는 강민의 말에 스티븐은 갑자기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목을 쓸어 만졌다.
“그럼 누구십니까? 어떻게 이곳까지 찾아오신 것입니까?”
스티븐은 아직까지도 강민이 아까 전화를 했던 사람인지 모르고 있었다.
몇 마디도 나누지 못했고, 워낙 짧은 통화였기에 목소리를 익히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단순히 전화만 가지고 이렇게 순간 이동을 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다.
“아까 전화로 여기서 보자고 말한 것 같은데?”
“헉! 서, 설마. 어, 어떻게…….”
스티븐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그는 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더듬기만 하였다.
“여튼 마나 성향을 보니 그리 나쁜 녀석은 아닌 것 같은데 왜 그런 거지?”
강민이 본 스티븐의 마나 성향은 나쁘지 않았다. 악인이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있는 기질이었다.
“무, 무엇을 말입니까?”
스티븐의 질문에 강민은 그를 알게 된 계기와 함께 그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해 보려고 여기에 왔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제야 어떻게 강민이 그를 찾아왔는지 알게 된 스티븐은 강민에게 답을 하였다.
“아…… 금제를 건 것을 보아 죽일 마음까지는 없으셨던 것 같던데. 한 명은 금제에 적응하였으나 나머지 한 명은 잘못하면 죽을 것 같아서 누가 했는지 알려주어도 문제가 없겠다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기억을 읽었다면 그 녀석이 어떤 잘못을 해서 금제가 걸렸는지도 알았을 텐데. 그럼에도 그 금제를 건 사람을 알려주는 것이 옳은 행동인가?”
강민의 말은 타당하였다. 애초에 써니데이를 성폭행하려다가 금제에 걸린 이형태와 김창민이었고, 만약 강민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두 여성은 성폭행을 당하고 말았을 것이었다.
그런 그들의 악한 성향을 알았다면 굳이 인식 장애까지 펼쳐서 그들을 금제한 강민의 정체를 밝히는 것은 강민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행동임이 분명했다.
실제로 이형태의 아버지 이일광은 아들을 금제한 것이 강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강서영을 납치하는 일까지 벌이지 않았는가.
분명 스티븐이 인식 장애를 해제하고 강민의 정체를 알린 것은 잘못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강민의 말에 스티븐도 잘못이라 생각을 했는지 잠시 생각을 가다듬다 말을 이었다.
“……사실 처음 인식 장애를 해제한 것은 호기심이 더 컸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금제를 걸었는지가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인식 장애를 푼 이후에는 금제를 건 상황을 보고 죽일 의도가 없었음을 알고 알려준 것입니다. 그들이 악인임을 간과한 제 섣부른 판단이었던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사실 스티븐이 강민의 정보를 이일광에게 알려줄 때는 큰 고민을 하지 않았다.
그 기저에는 강민 정도의 강자가 이일광 따위에게 곤란을 겪으리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스티븐은 더 이상 변명을 하지 않고 강민에게 솔직히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강민은 더 이상 변명하지 않는 스티븐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 네가 잘못한 것이다. 네가 나에 대한 정보를 알려준 것 때문에 내 동생이 납치도 당했었지.”
“헉! 그, 그런……. 내가 분명 보통 사람이 아니니 복수는 생각지도 말라고 했었는데…….”
당시 스티븐은 이능의 세계를 암시하며 복수는 생각지 말라고 하였으나, 이일광에게는 통하지 않았고 결국은 그 스스로를 죽음으로 이끌었다.
“그래, 어쨌든 넌 내게 하나의 빚을 진 것이다. 인정하는가?”
“……네, 인정합니다.”
“좋다. 그렇다면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자. 네가 소속된 클랜의 리더를 만나고 싶다. 가능하겠나?”
잠시 강민의 눈치를 보며 대답을 망설이던 스티븐은 강민의 기세가 점점 더 강해지는 것을 느끼고는 침을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