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
현세귀환록
060. 만남(2)
“지금 네 상태라면 과거의 네 잘못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겠지. 네 양심의 소리에 따라 여기에다 과거의 잘못을 기록해 봐.”
말을 마친 유리엘은 아공간에서 종이와 비슷한 재질의 천을 꺼내어 간단한 마법진을 그렸다. 천에 그려진 마법진은 잠시 밝은 빛을 내더니 종이에 스며들었고, 유리엘은 그 천과 함께 역시 아공간에서 꺼낸 펜에 마법을 부여해 김창민에게 건넸다.
“이 펜으로 이곳에 잘못을 쓰고 사죄를 한 다음, 피해자에게 이 펜으로 널 용서한다는 글을 받아오렴. 모두 완료하면 네 금제를 사랑하는 사람과는 관계를 할 수 있도록 바꿔줄 테니.”
유리엘의 말에 김창민은 입술을 깨물며 마음을 다잡았다.
여전히 무릎을 꿇은 상태의 김창민은 유리엘에게 건네받은 천을 대리석 바닥에 올리고 엎드려서 이제까지 저지른 그의 악행을 쓰기 시작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천 가득히 그의 악행들이 나열되었다.
가깝게는 성폭행을 하려 하였던 써니데이 사건부터 멀게는 학창시절에 왕따를 주도했던 이야기까지 김창민의 악행이 A3 사이즈의 천에 빼곡이 들어찼다.
이런 잘못들을 용서받는 것은 절대 쉽지 않을 것이다. 강민과 유리엘은 과거에도 몇 차례 이런 구제 기회를 준 적이 있었지만 실제로 용서를 받아 구제를 받은 비율은 열에 하나도 드물었다.
10%도 안 되는 성공률이라는 이야기였다. 이 방식의 가장 큰 어려운 점은 대부분의 피해자에게 용서를 받아도, 단 한 명이라도 용서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도루묵이라는 것이었다.
어떤 이는 사회적으로 보아서 큰 잘못도 대범하게 용서해 주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고작 이 정도 일이라고 생각되는 일도 용서를 하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가해자가 ‘고작’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는 사람에 따라서 상처를 받은 정도가 다르고 그것을 극복하는 정도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가해자가 용서를 받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의 경중을 따지는 일이 아니라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고 잘못을 빌어 진심으로 사죄하는 일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악행의 정도에 따라서 절대 용서하지 않으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가해자는 몰라도 피해자에게는 뼛속 깊이 사무치는 원한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만약 김창민이 그런 사람들에게까지 용서를 받아온다면 그는 과거의 잘못으로 인한 처벌에 대하여 용서를 받을 가치가 있었다.
한참 동안 그의 악행을 쓰던 김창민은 A3 용지가 다 메워질 때쯤 한참 동안 생각을 더듬으며 한두 줄을 더 쓴 후 펜을 내렸다.
김창민이 다 썼다는 표정을 짓자 악행을 쓴 천과 펜이 동시에 빛을 발하여 천에서는 은은한 푸른 빛이 돌았다.
“과연 다 썼구나. 만약 네가 네 양심의 소리를 어기고 하나라도 빠뜨렸다면 그 천은 빛나지 않았을 것이야. 그리고 많기도 많구나. 각각의 잘못에 대해서 다 용서를 받으려면 오래 걸릴 거야. 하지만 그걸 해낸다면 넌 용서를 받을 자격이 생기겠지. 모두에게 용서를 받고 나면 그 천이 붉은빛으로 바뀔 거야. 그때 그 천을 내게 가져오렴.”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알겠지만 진심이 담기지 않은 용서는 그 천에 쓰이지 않을 것이야. 그러니 폭력을 통한 강압이나 금전을 통한 매수 같은 건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거지. 물론 금전적인 피해를 입힌 경우에는 금전적인 보상을 해야겠지만, 그것만으로 진심이 담긴 용서를 받을 수는 없을 것이야.”
“잘 알겠습니다. 그리고 한 번 더 기회를 주신 점 정말 감사합니다.”
강민과 유리엘에게 인사를 한 김창민은 단단히 마음을 먹은 듯 굳은 표정으로 천과 펜을 가슴에 갈무리하고 일어났다. 그때 강민이 그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어떻게 너희들이 내가 한 일인지 알 수 있었지?”
이형태도 그랬고 김창민도 그랬고 이능과는 관련이 없었다. 물론 이일광이 사이토를 불러오긴 하였으나 돈을 통해서 부른 것이었고 사이토 역시 마법과는 무관하였다.
그랬기에 어떻게 인식 장애를 풀 수 있었는지 궁금하였다. 물론 지금의 개량된 인식 장애와는 달리 과거의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게 풀 수 있었을 것이지만, 강민은 누가 그 일을 했는지 가벼운 궁금증이 생겨 김창민에게 물었던 것이었다.
“아, 그것은…….”
김창민은 강민의 질문에 스티븐 파머를 만난 이야기를 하였다. 김창민의 이야기에 따르면 스티븐은 악행을 저지르면 고통을 주는 금고아의 금제는 해제하지 못했으나, 인식 장애는 풀어서 이일광과 김도관에게 이형태와 김창민에게 금제를 건 사람이 강민임을 알려주었다고 하였다.
“여기 그 사람의 전화번호가 있습니다. 스티븐 파머라는 외국인이었는데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정도로 보였습니다.”
김창민은 스티븐 파머의 전화번호를 강민에게 알려주었다.
김창민이 허리를 90도 이상으로 숙여 인사를 하고 회장실을 나가고 난 뒤 강민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악인에게 그냥 정보를 알려주었다라…….”
“그렇지만 김창민의 말을 들어보면 금제를 보고 민의 능력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 선처를 부탁해 보라고 말했다 하잖아요. 그런 거로 봐선 악인은 아닌 것 같아요.”
“하지만, 그 녀석들의 성향을 알았을 텐데 그냥 그렇게 정보를 넘긴 것을 보면 선인이라 보기도 힘들 것 같아. 그리고 나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지도 않았잖아.”
“그렇긴 하네요.”
“어때? 한번 만나 보는 게 말이야. 어떤 녀석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래요, 뭐 딱히 바쁜 일도 없으니.”
강민의 말에 유리엘도 바로 동의를 하였다.
강민은 조금 전 김창민이 알려준 전화번호로 스티븐 파머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간의 신호음이 울린 후 한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누구십니까?
“파머 씨인가요?”
-그렇습니다만, 누구시죠?
“잠시만요.”
잠시만이라고 한 강민은 유리엘을 바꿔주었고, 그녀는 전화기를 통해서 사람이 들을 수 없는 마나가 담긴 고주파의 소리를 내었다.
이 방법은 목소리에 이동식 마나 좌표를 담아 상대방이 있는 곳의 좌표를 확인하는 방법으로, 마나 통신 수단이 발달한 다른 차원에서는 이런 좌표 확인을 막는 통신 수단도 개발되어 있었다.
물론 유리엘은 그런 방호벽까지 뚫고 좌표를 넘기는 방법도 알고 있었으나 이곳의 마나 문명 수준은 거기까지도 필요하지 않은 실정이라 단순 좌표 이전 기술만 하더라도 충분한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사람이 들을 수 없는 고주파였으나 스티븐 그것을 들은 것처럼 깜짝 놀라며 수화기에서 귀를 떼었다가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강민은 스티븐의 물음에 답하지도 않고 유리엘에게 물었다.
“찾았어?”
“그래요, 그리 멀지 않은 곳인데요?”
유리엘의 대답에 강민은 수화기를 들어서 스티븐에게 말했다. 무슨 짓이냐는 스티븐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아니었다.
“거기서 뵙지요, 그럼.”
강민의 말이 끝나자마자 유리엘은 손가락을 튕겼고 둘의 모습은 회장실에서 사라져 버렸다.
* * *
스티븐이 전화를 받은 곳은 그의 은신처였다. 서울 외곽 공터에 공장형 창고 형태의 건물을 개조한 곳으로 그가 혼자 사용하기에는 다소 넓은 규모였다.
그곳에는 방이 따로 마련되어 있지는 않았고, 건물 한구석에 침대와 싱크대가 있어 숙식을 할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그 외에는 이곳저곳에 스티븐이 연구하던 물품들과 이런저런 장비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은신처의 침대 위에서 전화를 받고 있던 스티븐은 괴상한 고주파 음에,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이름 모를 사람에게 내심 욕을 하며 전화를 끊으려 하였다.
그때 갑자기 빛이 번쩍하면서 그의 앞에 갑자기 두 명의 인영이 나타났다.
“헉!”
스티븐은 깜짝 놀라 전화기를 떨어뜨리며 반사적으로 인영을 공격해 나갔다.
결계까지 쳐져 있는 이곳에 무단으로 난입했다면 분명 호의를 갖고 찾아온 사람은 아니라는 판단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펑-!
하지만 스티븐의 공격은 무엇에 가로막힌 듯 인영을 치지 못하였고 스티븐은 뒤로 두 걸음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강민과 유리엘은 공격하려는 의사를 보이지 않았지만, 스티븐은 정황으로 보아 이미 둘이 적이라고 확신한 듯 계속해서 공격을 시도하였다.
스티븐은 짧은 시동어를 외치며 에너지탄을 쏘아낸 후, 빠르게 침대 옆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총기를 잡았다.
한국은 총기가 금지된 나라였지만, 이능의 세계에서 총기는 흔한 물품이었기에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사실 무투형 이능력자는 총화기 등의 열병기보다는 고전적인 형태의 검이나 도, 둔기 같은 냉병기를 더 선호하였다. 그 이유는 열병기보다 냉병기가 마나를 담기 쉬웠기 때문이었다.
물론 총화기를 전문으로 하는 능력자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탄환 자체에 마나를 담았는데, 보통의 무투형 이능력자들은 검이나 도 같은 냉병기를 사용하는 것이 더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무기에 마나를 담는 능력이 떨어지는 능력자들은 검이나 도 같은 냉병기보다는 총화기를 사용하는 것이 더 강한 무력을 보일 수 있었다.
특히 이능적인 처리를 한 총화기를 잘만 사용한다면 상위 등급조차 잡을 수 있었기에 그들은 총화기의 사용에 익숙하였다.
즉, 특수한 케이스를 제외하고는 이능 세계에서 총화기는 고위 능력자보다 하위 능력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무기였다.
스티븐 역시 총기를 사용하는 것에 익숙한 것으로 보아, 그리 높은 수준의 고위 능력자는 아닌 것을 알 수 있었다.
스티븐은 테이블을 이용하여 몸을 은폐하고 한 탄창을 다 쏟아부었다. 그리고 중간중간 에너지탄을 비롯하여 윈드커터나 파이어볼트 등의 하급 서클의 공격 마법을 사용하였다.
하지만 강민의 호신막은 모든 것을 튕겨 냈고, 스티븐은 실드 계통의 마법이 전개되어 있어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테이블 뒤에서 이곳을 빠져나갈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스티븐의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강민과 유리엘은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듯 대화를 주고받았다.
“조잡스럽지만 결계가 쳐져 있어서 약간의 반발이 있었네요.”
“그러게 말이야. 결계의 수준이 높았으면 쉽게 이 안으로 이동하지는 못했겠네.”
“맞아요. 그런데 지금 이 녀석 인간이 아니군요.”
둘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스티븐은 인간이 아니라는 유리엘의 말에 흠칫 놀랐고, 이어지는 강민의 말에 더 크게 놀랐다.
“여기에도 뱀파이어가 있었군.”
“뭐 흔한 종족이잖아요.”
뱀파이어는 차원 이동을 하면서 자주 보았던 종족 중 하나였기에 강민과 유리엘은 스티븐이 뱀파이어라는 사실에 그리 놀라지 않았다.
그러나 스티븐은 자신이 뱀파이어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는데 뱀파이어임을 확신하는 둘에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빠져나갈 기회를 노리고 있던 스티븐은 강민과 유리엘이 대화하는 틈을 그 기회라 보고 이곳을 탈출하려 하였다.
스티븐이 대화조차 시도하지 않고 탈출하려 한 것은 강민과 유리엘이 결계까지 무력화시키고 갑자기 난입한 것으로 보아 좋은 목적으로 왔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한 번 보고 자신이 뱀파이어라는 사실까지 알아차렸다. 반면 자신은 둘의 등장조차 알아차리지 못했고, 지금도 둘의 경지가 짐작도 되지 않았기에 자신보다 훨씬 윗줄에 있는 실력자라고 판단하였다. 도망치는 것이 그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