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세귀환록-55화 (55/203)

# 55

현세귀환록

055. 후담(2)

퍼니셔의 이야기를 하던 앤더슨 총재는 갑자기 생각난 듯 벤자민 부총재에게 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때 연금의 일족에 대한 조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확실히 연금의 일족이 맞던가요?”

“아직은 추정일 뿐입니다. 확실히 밝혀지지는 않았습니다.”

“만일 연금의 일족이라면 위원회와는 확실히 대적할 테지만, 우리도 그들의 원한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니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정체가 확인될 때까지 한국 지부에도 섣불리 건들지 말라고 지시해 놓았습니다.”

앤더슨은 잘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일단 그들의 정체부터 확인하고 만약 연금의 일족이 맞다면 그들이 과거의 일을 어느 정도까지 아는지 확인하는 것이 가장 관건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과거의 일을 알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 부분을 은폐하고 위원회가 한 일에 대한 정보만 제공하는 것도 생각해 보십시오. 어차피 연금의 일족은 위원회와 같이 가기 힘들 것이니 관련 사실만 알려주더라도 분명 위원회의 적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위원회에 정보를 제공한 것을 알고 있다면 당시 우리의 불가피성에 대해서 알리고 협조를 구해야 하겠지요. 현재 어디까지 조사가 진행되었습니까?”

앤더슨의 물음에 벤자민이 천천히 대답을 하였다.

“우선 연금의 일족이라 추정되는 강민과 김유리의 과거 행적에 대한 조사를 진행 중인데, 아무리 파헤쳐도 지난 10년간의 행적이 조사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나마 유력한 것은 여태껏 등장했던 다른 연금의 일족 후예들과 마찬가지로 일족들이 마련해 놓은 이공간 쉘터에 빠졌다가 10년간 그곳에서 마법과 무공을 익혔다는 추정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앤더슨은 무공이라는 벤자민의 말에 의아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하긴 연금의 일족은 그렇게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요. 그런데 연금의 일족은 무공과는 무관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기존에 출현하였던 인물들은 그러하였지만, 일족이 뿔뿔이 흩어진 다음 오랫동안 세계를 돌아다니며 누군가는 무공을 수집했을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일리 있는 추정이군요. 그런데 불과 10년 만에 이능이 없던 인물이 S급의 마스터까지 오를 수가 있었겠습니까? 우리도 지금 마법이나 무공 능력자를 양성하고 있지만 그 정도 수준까지는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도 그것이 마음에 걸리는 부분입니다. 일단은 연금의 일족 비전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지 않았나 추정은 하는데 확인된 바는 없습니다.”

벤자민은 다소 자신이 없는 표정으로 앤더슨에 말했고 앤더슨은 그를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들에 대한 감시는 하고 있지요?”

“주요 감시 대상에 올려놓았습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무래도 S급으로 추정하다 보니 가까운 거리에서 감시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접근했던 A급 요원 세명이 기절한 상태로 발견되었습니다. 살해가 아니라 기절이니 일단 경고의 의미인 것 같은데 더 이상 요원을 배치한다면 요원의 목숨을 보장할 수도 없을 것 같고, 거주지에는 이미 마나 결계가 펼쳐져 있어 감시의 의미도 없기에 현재는 철수한 상태입니다.”

“A급 요원이 반항조차 못 하고 기절해 버렸다면 확실히 S급은 맞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지금은 어떻게 감시를 시행하고 있습니까?”

“위성을 통한 감시를 하고 있습니다.”

“위성이라…… 그렇다면 간신히 행적 정도만 알 수 있는 수준이겠군요?”

“네, 그것도 순간이동을 사용하는 경우에는 다음 행적을 찾기가 힘듭니다.”

연금의 일족에 대해서 이야기하던 앤더슨은 잠시 생각을 가다듬다가 벤자민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음…… 그런데 이번에 연금의 일족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은 무공도 한다 하지 않았던가요? 무공과 마법이라…… 퍼니셔와의 관련성은 없겠습니까? 둘 다 같이 S급으로 판단되는데 알려지지 않은 S급이 갑자기 동시다발적으로 나올 가능성보다는 둘이 동일인일 가능성이 높지 않겠습니까?”

앤더슨의 추정은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한국과 일본은 가까운 거리에 있는 두 나라였고, 보기 드문 S급 능력자가 비슷한 시기에 두 군데에서 나타났다면 충분히 동일인임을 의심해 볼 수 있었다.

“저도 퍼니셔의 이야기를 듣고 가장 먼저 그들을 의심하였습니다만, 조사 결과 동일인이 아니라는 판단을 하였습니다.”

“무슨 이유이지요?”

“사실 정황상 둘이 동일인이라 생각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판단일 것입니다. 지금 연금의 일족으로 추정되는 강민은 백록원의 마지막 계승자라고 할 수 있는 최강훈을 데리고 있습니다. 백록원은 과거 헤이안의 사주로 멸문지경에 이른 경험이 있는바, 강민과 퍼니셔가 동일인이라면 갑자기 헤이안을 친 이유도 설명할 수 있겠지요.”

유니온에서는 백록원이 야마토의 습격을 받았을 때 그들을 강민이 해치운 것까지는 몰랐으나, 최강훈을 강민이 거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벤자민은 이런 추정을 할 수 있었다.

벤자민의 이야기를 듣고 더 의아한 표정으로 앤더슨은 그에게 물었다.

“그렇지요, 그런데 왜 동일인이 아니라는 것이죠?”

“마나 파문이 다릅니다. 강민과 유리엘의 마나 파문은 저희가 유니온 멤버 카드를 발급할 때 확보하였는데, 이번 퍼니셔의 마나 파문과는 전혀 다른 파문 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아…….”

마나 파문이 다르다는 벤자민의 말에 앤더슨은 바로 이해했다.

마나 파문은 마나 이능력자들이 자신의 마나를 외부로 발현할 때 생기는 파문으로, 일반인의 손가락 지문이나 눈동자 홍채의 패턴이 모두 다른 것처럼 마나 파문 역시 마나 능력자별로 모두 다른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런 마나 파문은 능력자들의 주요 신분 증명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대기 중의 마나 파문은 금방 사라지지만 대지나 물건에 남은 마나의 파문은 상당 시일 남아 있어, 유니온은 이능력자가 죄를 저지른 경우 마나 파문 데이터베이스를 통하여 범인을 추적하였다.

그래서 유니온의 멤버들은 마나 능력을 이용하여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적었고, 주로 능력자 범죄는 유니온에 등록하지 않은 그레이 울프나 카오틱에빌 등이 일으키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자주 범죄를 일으키는 이들은 데이터베이스에 마나 파문이 등록되어 있어 요주의 인물로 관리 및 수배되어 흔적이 발견되는 즉시 체포되었다.

앤더슨과 벤자민은 정답에 가까운 추정을 하였으나, 자신들의 기술력을 너무 믿어 스스로 정답을 부인해 버렸다.

강민과 유리엘은 이미 마나의 패턴을 변화시켜 그들의 신분을 위장하는 기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나 파문은 차원마다 부르는 말은 달랐지만 그 용도는 비슷하였고, 마나 문명이 많이 발달한 곳에서는 일반인의 마나 파문까지도 데이터베이스화해서 신분증 용도로 쓰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런 곳에는 마나 파문의 형태를 랜덤하게 변화시키는 기술, 파문을 암호화시키거나 다른 사람의 파문으로 위조하는 기술 등이 만연했다. 때문에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집단에서는 변조된 파문에서 원래 파문을 찾는 기술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신분증 위·변조 기술이 발전하면 그것을 찾아내는 기술 또한 발전하는 것과 같은 양상이었다.

수많은 차원을 다닌 강민과 유리엘은 이미 마나 파문을 위·변조할 수 있는 기술을 알고 있었고, 변조된 마나 파문을 찾는 기술까지도 알고 있었다.

유니온 멤버가 되면서 자신들의 마나 파문이 등록된 것을 알고 있는 강민과 유리엘은, 자신들을 알리고 싶지 않는 경우에는 유니온 멤버 카드를 만들 때 사용한 마나 파문과는 다른 마나 파문을 사용해 왔었다.

강민과 유리엘은 위조 추적 기술까지 피해갈 수 있는 마나 파문을 형성해 놓았지만 이곳에서의 마나 파문에 관한 기술 수준을 알았다면 큰 의미가 없는 행동일 수도 있었다.

이곳의 마나 파문에 관한 기술은 아직 기초 단계였고, 그것을 위·변조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마나 파문이 다르다는 밴자민의 한마디에 강민과 유리엘은 퍼니셔의 후보에서 제외되고 말았다.

만일 유니온에서 백록원과 야마토에 얽힌 일을 더 자세히 알았다면, 그리고 야마토와 강민 사이에 얽힌 일을 더 자세히 알았다면 정황상 강민을 더 강하게 의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에 따라 마나 파문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으나, 현재까지는 유니온에게 강민과 퍼니셔는 철저히 다른 인물이었다.

“음, 퍼니셔를 찾는 것과 동시에 그 연금의 일족을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는데 좀 더 노력을 기울여 보세요. 히든 카드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요. 아직 위원회에는 노출되지 않았죠?”

“네, 위원회에는 아직 노출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다만?”

“강민과 몇 번 이야기했는데, 우리 쪽으로 끌어들일 만한 동인이 없습니다. 결국 연금의 일족에 대한 비사를 알려서 위원회와 적대하게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그 쉘터에는 어느 정도의 정보가 있었는지 확인할 수 없어서 아직은 그 정보를 알리는 것을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그렇겠군요. 우리가 관련된 것까지 알고 있다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을 테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아직은 신중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음……. 최후의 수단으로는 어느 정도 진실에 가깝게 말하고 우리 입장을 변호하는 수밖에 없겠군요. 당시 위원회의 수족이나 다름없었던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강민의 성향을 분석해서 감정적으로 움직이기보다는 합리적 판단을 하는 사람이라 판명되면 사실을 털어놓고 협조체계를 구축하는 쪽으로 생각해 봅시다.”

“알겠습니다.”

* * *

세월의 흐름을 오랫동안 겪은 것이 분명한 원탁에 8인의 인영이 앉아 있었다. 그러나 준비된 의자는 9개로 한자리는 비어 있었다.

원탁의 가운데에는 빛을 내는 수정구가 있었는데 그 빛이 약해서 원탁의 위만 간신히 밝히고 있었고, 원탁에 앉은 사람들에게까지는 그 빛이 미치지 않아 그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차별이 없는 자리를 뜻하는 원탁이었지만 하나의 의자만 나머지 8개의 의자와 다른 실루엣을 보였다.

정황상 이 원탁의 회의를 주재한 인물로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나머지 의자보다 조금 더 크고 장식이 들어간 의자에 앉은 인물이 말을 꺼냈다.

“오랜만입니다, 다들.”

회의의 주재자가 말을 꺼내자 반대편에 앉아 있던 한 사람이 말을 받았다.

“6개월 만인가요? 그런데 정기모임을 할 시기도 아닌데 갑자기 이렇게 소집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역시 소식이 늦군.”

“과연 뭔가 아시는가 보군요. 역시 소식이 빠르십니다, 의장님.”

“자네가 소식이 늦은 것이겠지.”

의장의 옆에 앉아 있던 사내가 면박을 주었지만 의장 반대편의 남자는 특별히 대꾸하지 않았다.

잠시 좌중을 살피던 의장은 이내 침묵을 깨고 한마디를 던졌다.

“이미 아시는 분도 있겠지만, 헤이안이 무너졌소.”

“뭐라구요?”

의장 반대편의 남자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알고 있었던 듯, 그를 제외하고는 놀라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자신을 제외하고 다들 알고 있었던 것 같이 보이자 그는 내심 신음을 삼켰다. 그가 가만히 있자 그 옆에 앉아 있던 남자가 의장에게 물었다.

“헤이안이 무너진 것이야 대부분 알고 있던 사실인데, 이유가 밝혀졌습니까?”

“아직 밝히지 못했소.”

“신기하군요. 대지의 기억에서 정보를 얻지 못하신 겁니까?”

“그렇소, 이번엔 그 현장에 광범위한 인식 장애 결계가 쳐져 있어서 대지의 기억을 읽어도 소용이 없었소.”

“인식 장애 결계라면 얼마든지 해제하실 수 있지 않나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기존의 마법과는 전혀 다른 마법 체계더군요. 지금 그 체계를 연구하고 있는데 인식 장애를 해제하고 제대로 된 정보를 얻으려면 상당히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소.”

“허어, 다른 마법 체계라니……. 그럼 범인은 다른 세계에서 온 인물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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