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세귀환록-54화 (54/203)

# 54

현세귀환록

054. 후담(1)

50대 정도로 보이는 한 중년인이 검은 가죽 의자에 앉아 있고, 현대풍의 검은색 테이블 앞에는 70대 노인이 서 있었다.

잠시 먼 곳을 응시하던 50대 중년인은 노인을 바라보고 물었다.

“벤자민 부총재님, 아직도 인식 장애를 해제하지 못하였나요?”

“네, 죄송합니다. 총재님.”

노인은 유니온의 부총재인 벤자민 그린이었고, 노인의 앞에 있는 인물은 유니온의 앤더슨 총재였다.

총재는 죄송하다는 벤자민의 말에 손사래를 치며 말을 이었다.

“아닙니다. 부총재님이 미안해하실 사안은 아니지요. 마스터급의 쇼군을 그렇게 척살해 버린 퍼니셔가 펼친 인식 장애 결계라면 분명 쉽게 해제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실 인식 장애 결계는 일반인들에게서 이능력자의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 올림포스에서 개발한 마법이라 해제의 난이도가 그리 높지 않습니다. 고위 마법사가 걸었다고 해도 별도의 락을 걸지 않는 이상은 해제하기 어렵지 않을 텐데. 이번엔 락도 안 걸려 있습니다.”

벤자민의 말에 앤더슨 총재는 의아한 표정으로 벤자민에게 되물었다.

“그런데 왜 해제가 안 되는 것이지요?”

“문제는 인식 장애라는 결과물은 같지만 마법 체계가 전혀 달라 노이즈 자체를 필터링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넓은 범위에 펼쳐진 결계라면 어느 정도 노이즈 패턴이 보일 텐데 그 패턴조차 발견하기 힘든 상태라 해제까지는 더 오래 걸릴 것 같습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지금 제 실력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오히려 락이 걸려 있다면 인식 장애 패턴의 키만 발견하면 되니, 이걸 푸는 것보다는 차라리 고위법사의 락을 푸는 것이 더 빠를 것 같습니다. 예전 7서클 마법사의 락을 풀 때보다도 더 어려운 상황입니다.”

마법사가 아닌 앤더슨 총재는 벤자민의 말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현재 그 인식 장애 결계를 풀기 힘들다는 사실은 확실히 이해하였다.

“올림포스에 보내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어차피 올림포스에서도 이미 대지의 기억을 추출하여 갔을 것입니다. 사안이 사안이지 않습니까.”

“하긴 사안이 사안이지요. 아무리 비상임위원이라 하더라도 위원회의 멤버가 이렇게 살해당한 건 처음이니 올림포스에서도 가만히 있지는 않겠지요.”

앤더슨의 말을 받아 벤자민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마법이라면 탐욕을 부리는 올림포스에서 자신들이 만들지 않은 마법에 대해서 궁금해하지 않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분명 지금 분석 중일 것입니다. 마법 공학 쪽은 우리가 나을지 몰라도 순수 마법 쪽으로는 올림포스를 따라갈 수 없겠지요. 하지만 지금 제 생각으로는 올림포스라도 쉽게 해제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음…… 그래도 올림포스 마법이라면 어떻게든 분석하지 않겠습니까? 분석 결과가 나오면 우리에게도 알려줄 것 같나요?”

“그러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위원회도 우리가 그쪽을 견제하는 것을 상당히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둘을 제외하고는 방에 아무도 없었지만 앤더슨은 목소리를 낮추며 벤자민에게 말했다.

“그렇지요. 요즘 위원회의 감사관들이 움직이는 것도 예전 같지 않고, 기존에 차출되어 유니온에 배치해 놓았던 정예들도 상당수 다시 본래 조직으로 돌아갔다 하더군요.”

“우리 유니온에서 키운 정예들도 상당한 수준으로 올라왔기 때문에 크게 걱정할 사항은 아닙니다. 위원회에서 차출되어 유니온에 들어온 정예들이 돌아가더라도 우리 유니온의 힘만으로도 카오틱에빌들은 충분히 제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아직 상위 등급이 너무 부족해요. A급 능력자를 상대할 정예조차 이제 20명을 채웠지 않습니까. 위원회와 상대하기에는 너무도 역부족이죠.”

위원회와 상대한다는 이야기를 할 때 그 목소리가 더욱더 낮아졌다. 앤더슨의 우려 섞인 낮은 목소리에 벤자민은 다소 힘을 주어 말을 하였다.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마법 공학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시중에 판매하는 장비가 아니라 우리만의 역작인 마나 장비를 착용한다면 C급의 능력자라도 충분히 A급을 견제할 만할 것입니다. B급 정도 되면 역량과 마나 장비에 따라 어쩌면 A급을 이길 수도 있을 것이고 말입니다.”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우리 자체적으로 A급 요원들을 더 키울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마법이나 무공에 대한 정보는 각 조직의 비전이라 할 만한 내용을 제외하고는 충분히 획득했지 않습니까? 우리 유니온도 더 이상 각성형 능력자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체계적인 마법이나 무공의 수련을 통해서 안정적으로 능력자를 길러내야 할 것이에요.”

아무래도 앤더슨은 마나 장비에 대한 의존보다는 마법이나 무공을 통해서 자체 역량을 키우는 것을 원하는 듯하였다.

마나 장비에 대한 기대감이 컸던 벤자민은 다소 힘이 빠진 듯 대화를 이어갔다.

“그 부분은 이미 진행은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총재님도 아시다시피 마법이나 무공은 절대적인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습니까? 지금 가장 빠른 아이가 이제 C급에 올라섰다더군요.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아직 스무 살도 안 되었는데 C급이라…… 대단하군요. 어차피 절대적 시간은 어쩔 수 없지요. 처음부터 시간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시작했지 않습니까? 특히 무공에 신경을 더 써주세요. 그쪽이 우리 마나 장비와 상성이 가장 좋더군요.”

“네, 저도 그렇게 판단하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벤자민의 다소 힘 빠진 분위기를 느낀 앤더슨이 마나 장비를 언급하자 벤자민은 힘을 주어 대답하였다.

벤자민의 분위기를 돌린 앤더슨은 무언가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다시 물었다.

“그러고 보니 올림포스에서 유니온으로 넘어오려는 마법사는 더 없는가요? 마법 공학 쪽에 관심이 있는 마법사라면 충분히 매력을 느낄 만한 조건일 텐데 말이죠.”

“4서클 마법사 정도는 다소 있는 편인데 5서클 이상의 중위급 마법사는 마법 공학보다는 순수 마법에 더 관심이 있으니 영입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실정입니다.”

“하긴 벤자민 부총재님이 특이한 경우이겠지요.”

벤자민은 6서클 마스터 마법사로 아직 7서클의 벽은 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그 지식은 7서클에 못지 않았다.

올림포스에서 마법 공학을 전문으로 연구를 하고 있었으나 순수 마법사 집단인 올림포스에서는 크게 인정받지 못하였고, 결국엔 자신의 연구를 알아주는 유니온으로 옮겼던 것이었다.

벤자민이 유니온에 합류한 이후 유니온의, 아니, 전 세계의 마법 공학 수준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기에 벤자민 역시 천재의 한 부류라 할 수 있었다.

“하여튼 문제는 A급이라기보다는 마스터급을 상대하는 것입니다. A급 능력자야 물량으로 장비로 해결할 수 있지만 마스터급은 달라요.

지금도 우리 유니온에서 마스터급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저뿐이지 않습니까. 혹시 해결할 방법은 찾으셨습니까?”

“……아직은 시간이 필요한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 추정하건대 AA1팀을 전부 동원하면 한 명 정도 발을 묶어둘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이 부분만큼은 아직 해결하지 못하였는지 벤자민은 힘주어 대답하지 못했다.

“그 시간은 공평하지요. 우리에게만 주어진 것은 아닐 겁니다. 사실 지금도 위원회에서 마스터 급이 두어 명만 나서더라도 우리는 버텨낼 수가 없을 겁니다. 하긴 그래서 아직 위원회가 우리를 만만하게 보고 있기는 하지요.”

“하지만 저들의 폐쇄적인 분위기에 비해서 우리는 마법에도 무공에도 각종 비술에도 열린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지 않습니까? 마법 공학 역시 매우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고요. 아마 10여 년의 시간만 지나면 우리도 마스터를 상대할 방책이 생길 것이라 생각합니다.”

벤자민은 시간이 지나면 위원회의 발전보다는 자신들이 월등한 속도로 발전하여 위원회를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자신하였다.

“10년이라…… 부총재님 말씀대로라면 10년간은 워원회의 손아귀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겠군요.”

“아, 아니 그런 말은 아니고…….”

앤더슨의 다소 자조 섞인 말에 벤자민이 약간 당황하며 말을 받았고, 그의 그런 모습을 본 앤더슨은 강한 어조로 다시 벤자민에게 말을 했다.

“그래서! 우리가 퍼니셔를 먼저 찾아야 합니다. 어떤 의도로 쇼군을 해치우고 헤이안에 그런 글을 남겨놓았는지 퍼니셔를 찾아서 확인해 봐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인식 장애를 풀지 못한다면 찾기는 힘들지 않겠습니까?”

“인식 장애를 해제하는 것은 올림포스에 맡기고 우리는 우리의 방식으로 찾아야지요.”

“우리의 방식이라면?”

“우선 우리는 퍼니셔의 이번 행동으로 세 가지의 정보를 얻었습니다.”

앤더슨은 손가락을 세 개를 펴며 말을 했고, 벤자민은 그런 그를 보며 반문하였다.

“세 가지라면?”

“쇼군과 헤이안의 수뇌부를 그렇게 해치운 것을 보면 퍼니셔는 최소한 마스터 이상의 강자라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쇼군만 해도 S급의 마스터였고, 헤이안의 수뇌부들도 최소 A급에서 A+급의 강자였으니 말입니다. 그들은 한 번에 처리했다면 S+급 이상은 되어 보이는군요.”

“맞습니다. 두 번째는 무공과 마법 둘 다 사용이 가능하다는 것이죠. 만약 무공과 마법을 혼자서 그 정도로 사용했다면 SS급은 될 것입니다. 만약 혼자가 아니라면 최소한 마법에 능한 조력자가 있을 것입니다. 인식 장애 결계의 수준이나 전장 가운데의 화염 마법의 흔적을 보면 그 또한 S급은 될 것이니 최소 한 명의 SS급이나 두 명의 S급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 흔적을 보면 타당한 추측이겠지요. 확실히 마법의 수준도 저보다 우위에 있는 듯했으니 S급은 된다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 마지막 정보는 위원회와, 아니, 적어도 헤이안과는 대립하고 있는 입장이라는 것이겠군요.”

앤더슨의 의도를 파악한 벤자민이 그의 말을 받아서 말을 덧붙였다.

“그렇습니다. 이런 정보를 토대로 우리가 위원회보다 빨리 ‘그’인지 ‘그들’인지 모를 퍼니셔를 찾아서 의중을 확인해 봐야 할 것입니다.”

“의중이라면…….”

“만약 퍼니셔가 단지 쇼군과의 개인적인 대립이 아니라 위원회 전체와 대립하는 것이라면 우리에게도 큰 힘이 되겠지요. 퍼니셔가 어떤 의도로 쇼군을 척살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쇼군 개인만이 아니라 수뇌부까지 다 척살한 것으로 보아 헤이안 전체와 대립했다고 보는 것이 더 맞겠지요.”

“그렇겠지요.”

“그리고 추측이긴 하지만 헤이안과 비슷한 성향인 위원회와도 적대할 가능성이 크지 않겠습니까? 만일 위원회에서 복수한다고 나서면 금상첨화일 것이고요. 그렇다면 우리와도 충분히 손잡을 만하지요. 적의 적은 친구라는 것이지요.”

“친구라…….”

“만약 우리가 퍼니셔와 친구가 될 수 있다면 위원회를 멤버 하나하나를 견제하기가 더 쉬울 것입니다. 만약 그게 계속 암중에 머물며 위원회의 수뇌부들을 제거해 준다면 우리의 목표 달성이 더 빨라지겠지요.”

애초에 위원회에서 태어난 유니온을, 위원회와 동등한 독립된 조직, 아니, 위원회를 넘어서는 조직으로 만들기 위해서 앤더슨과 벤자민은 그간 많은 노력을 하였다.

둘의 최종적인 목적은 위원회를 굴복시키고 이능 세계의 패권을 쥐는 것이지만 위원회가 있는 한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S급의 강자를 배후의 위원회를 저격할 수 있는 킬러로 사용할 수 있다면 그 목표에는 한 발 더 빨리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니온은 아니, 앤더슨 총재와 벤자민 부총재는 하늘 위에 하늘이 있다는 의미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 하늘 밑의 하늘에 자신들이 해당된다는 것을 그들은 간과하고 있었다.

또한 위원회에는 그들이 생각하지도 못하는 괴물이 있었고, 강민은 마치 용을 잡아먹는 가루라처럼 그들조차 잡아먹을 수 있는 존재인 것을 앤더슨 총재와 벤자민 부총재는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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