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세귀환록-53화 (53/203)

# 53

현세귀환록

053. 신위(4)

생명을 포기한 듯한 쇼군의 말에 쇼군의 뒤에 서 있는 8인의 수뇌부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강민과 쇼군과의 대결을 자세히 볼 수조차 없었던 그들은 쇼군이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 자체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그들이 볼 수 있었던 것은 쇼군이 공격을 했다가 무슨 이유인지 그냥 물러났던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강민이 쇼군의 일본도를 막는 것은 보지도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공격을 했다가 아무 이유 없이 물러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고, 단호한 쇼군의 말에 강민에게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직감하였다.

그랬기에 차라리 최후의 공격을 함께 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강민의 말을 듣는 순간 그들에게 선택권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 여기 있는 사람들은 보내줄 수 없다네. 대신 성 안의 다른 사람들은 일체 건들지 않도록 하지.”

“뭐! 지, 지금 전음을 들은 것이냐?”

“심어도 아닌 전음 따위 듣는 게 뭐 대수라고.”

점점 더 강민의 능력에 놀라고 있는 쇼군이었다. 강민이 여기의 사람들을 보내줄 수 없다고 천명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어쩔 수 없겠구나. 최후의 공격을 준비해라. 어차피 보내줄 마음이 없다 하니 진원도 아끼지 말고!”

“네! 쇼군!”

강민은 이들이 기세를 끌어올리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였다. 진원까지 건드려서 다소 거칠었지만 강맹한 기운의 흐름이 그들이 서 있는 영역을 뒤흔들었다.

“쇼군! 우리가 빈틈을 만들 테니 쇼군께서 그 빈틈을 노리십시오!”

어차피 전음도 듣는 마당에 감출 것도 없었다. 그리고 상식에 가까운 이야기였기에 강민이 그 말을 듣는다고 해도 달라질 것도 없었다.

한참 동안 기세를 끌어올려 최고조로 빛나는 샤이닝 소드를 형성한 헤이안의 수뇌부는 일제히, 아니, 한 명을 제외하고 강민을 공격해 갔다.

강민을 공격하지 않은 한 명은 50대의 중년인으로 다른 이들이 강민을 공격하는 사이 유리엘을 공격해 갔다.

그 의도는 뻔히 보였는데 여자라서 약하게 보이는 유리엘을 인질로 삼아 협상을 할 의도였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의도로만 그쳤다.

퍼엉--!

유리엘에게 달려든 50대 중년인의 검격은 유리엘의 3미터 앞에서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 멈추고 말았고, 유리엘이 손을 튕기자 중년인이 서 있는 자리에는 직경 2미터 정도의 거대한 불기둥이 땅에서 하늘로 솟구쳤다.

“으아아아악!!!!”

50대 중년인은 그 불기둥 속에서 호신막을 끌어올려 조금 버티나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호신막이 불길에 견디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호신막이 사라지고 나자 그 자신 역시 불기둥에 녹아서 뼛조각 하나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세상에 그가 남긴 흔적이라곤 불기둥의 범위에서 살짝 벗어나 있던 그가 가지고 있던 일본도의 끄트머리, 손가락 한 마디 정도가 전부였다.

유리엘이 50대의 중년인을 처리하는 동안 나머지 8명이 동시에 강민에게 덤벼들었고, 이내 쇼군 역시 전력을 다한 듯 검기를 줄기줄기 뻗으며 강민에게 덤벼들었다.

쇼군은 8인이 나선 뒤에 공격하였지만 강민의 근처에 온 것은 거의 동시였다.

이미 초월의 영역에 들어와 있는 쇼군에게 나머지 8인의 움직임은 멈춰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강민 역시 아직 아무런 움직임이 없이 멈추어 있었지만 아까 전의 공격과 같이 초월의 영역에서도 평상시처럼 움직일 것이 분명하였다.

강민의 말에 따르면 더 높은 단계에 있는 그의 눈에 자신 역시 멈추어 있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갈 수는 없었다.

강민은 역시 평상시와 같은 움직임을 보이며 수뇌부를 하나하나 처리하여 갔다.

아마 그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죽어 나가는지도 알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고 있을 것이다.

쇼군은 8인의 수뇌부가 하나하나 죽어 나가는 것이 볼 수 있었다.

머리가 잘려 나가는 카게루, 몸통이 상하 반으로 잘린 쥰지, 허리 위의 상체가 날아간 타카오, 몸통이 통으로 날아가 버린 하루오, 상반신이 사선으로 잘린 스스무 등 참혹하기 그지없는 광경이었다.

마침내 원로원주이자 자신의 친구인 케이타로의 머리통이 박살 나는 순간 쇼군 히데오는 최후의 공격을 감행했다.

쇼군는 일반적인 공격이라면 어차피 자신이 들어가 있는 초월의 영역보다 상위의 영역에 있는 강민이 손쉽게 막을 것이라 생각을 했다.

그랬기에 막는 것까지 생각하여 일종의 자폭에 가까운 최후의 수를 던지기로 마음을 먹고, 진원을 터뜨려 생긴 폭발력을 그의 일본도에 실었다.

최후의 기력까지 끌어올려 혼신을 다한 쇼군의 힘에 일본도의 도신은 거북이 등껍질같이 금이 가며 갈라졌다.

이윽고 펑 하는 파열음과 함께 일본도의 조각들이 강민의 전신으로 날아갔다. 수백 조각으로 갈라진 일본도의 도신은 하나하나 강대한 마나를 담은 오러 소드나 마찬가지였다.

최후의 잠력까지 동원한 동귀어진의 수이자 혼자서 죽을 수 만은 없다는 생각으로 감행한 수였다.

이 수가 통하더라도 자신은 살아남을 수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쇼군은 어차피 자신은 죽겠지만 강민 역시 저승에 함께 데리고 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눈을 천천히 감았다.

하지만 그 일본도의 조각들이 강민의 호신막에 튕겨져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이 눈감기 직전 쇼군의 눈에 들어왔다.

그 찰나를 본 쇼군은 눈을 부릅떴고 그런 그의 목을 강민이 잘라버렸다.

데구르르 구르는 머리와 함께 쓰러진 쇼군의 몸은 마치 벌집과 같았는데 그가 쏘아낸 자신의 일본도 조각들이 그의 전신을 통과했던 것이었다.

헤이안의 주인이었던 자의 처참한 최후였다.

강민의 전장을 보고 있던 최강훈은 쇼군을 비롯한 모두가 쓰러지고 나서도 그곳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실 최강훈의 능력으로는 A급 수뇌부의 최후의 공격까지는 볼 수 있었으나, 쇼군의 동귀어진의 수나 강민의 방어는 볼 수조차 없었다.

그의 눈으로는 헤이안의 수뇌부들이 잘리고 터져 나가다 갑자기 쇼군의 칼이 터지며 쇼군의 목이 잘려 그가 죽어버린 것만 알 수 있었다.

물론 그게 전부가 맞긴 하지만 최강훈은 그 과정은 알 수가 없었다.

최강훈이 그곳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이유는 그곳에서 죽은 헤이안의 수뇌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제주도에서 눈감은 사부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0여 년간 비원으로 삼고 있던 복수가 어찌 보면 허무하게 끝나 버렸다.

그의 머릿속에는 사부와 자신의 힘들었던 시기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최강훈이 기억하는 한진문은 심각한 내상을 입은 몸으로도 백록원의 원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 진원까지 태우며 웜홀 포인트를 지키며 자신과 수강이, 수아를 돌보았다.

그 스스로는 피를 토하며 괴로워하면서도 헤이안에 대한 복수를 잊지 못하며 한스러운 삶을 살았다. 하지만 자신이 눈을 감기 직전에는 최강훈을 위해서 복수에 연연하지 말라는 말까지 하였다.

하나 그런 모습을 10여 년간 보아온 최강훈은 한순간도 복수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복수가 지금 이루어진 것이었다. 물론 자신의 손으로 한 것은 아니었지만, 복수를 마친 그의 눈에는 왈칵 눈물이 흘렀다.

왠지 멀리 보이는 하늘에서 사부가 환하게 웃고 있는 듯하였다.

최강훈의 감회에 젖은 기분을 방해하지 않고 유리엘은 강민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민이 하도 강한 모습을 보이니, 내가 쉬워 보였나 봐요.”

“그러게 말이야. 그쪽은 시체조차 남기지도 못했네.”

이름 모를 중년인이 남긴 것이라곤 일본도 조각 하나뿐이었다.

“시체는 안 치울 생각인가요?”

“그래, 이번엔 본보기로 남겨두려고.”

유리엘은 깔끔하게 처리하던 다른 때와는 다르게 남긴 시체의 면면이 참혹한 것으로 보아 강민이 본보기를 노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긴 만약에 그냥 없애버리면 단순 실종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그렇지. 그리고 경고 문구 하나 정도도 남기려고 해.”

“경고 문구요?”

“뭐 별건 아니고 하늘 위에 하늘이 있다는 것 정도만 알려주려고.”

“음……. 이능 단체들이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는 건가요?”

“그래, 힘이 있는 집단은 언젠가는 전면에 드러나는 것을 여태껏 우리가 봐와서 알잖아. 전면에 드러나는 과정에서 이능 단체 간의 협의가 되고 일반인에게도 잘 받아들여져서 무혈로 연착륙하게 되면 괜찮겠지만, 여태까지는 피와 시체를 밟고 경착륙할 경우가 더 많았잖아.“

둘은 여태껏 많은 차원을 지나오면서 이능이 있는 세계를 많이 보았는데, 대부분의 세계에서는 이능이 전면에 드러나 있었다.

그런 세계에서는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이능력자가 사회 지도층이나 지배층이 되었고, 일반인들은 피지배층이 될 수밖에는 없었다.

반면, 이능의 세계가 이면에 있는 경우에는 시기의 차이가 있었지만 어느 정도 임계점에 도달하면 이능력자가 전면에 나서며 헤게모니를 거머쥐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수많은 피가 흐르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었다. 능력자 간에는 물론이거니와 일반인들도 많은 피를 흘렸기에 강민은 가족들을 위하여 그런 일을 어느 정도 방지하고자 하였다.

자신과 유리엘이 있다면 가족들이 휘말릴 일은 없겠지만, 일반인으로서는 그런 피 튀기는 상황을 보는 것만 해도 스트레스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랬지요. 그래서 민은 그들이 모르는 강대한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것을 파악할 때까지 조심할 것이라는 걸 노리는 건가요?

“그래, 물론 그것도 임계점에 다다르면 관계없이 터질 테지만 당분간은 막을 수 있겠지. 어머니나 서영이가 있는 동안만이라도 막을 수 있으면 좋겠지.”

“그래요. 그런데 과연 그렇게 참아질까요? 지금도 어느 정도 임계점에 다다른 것 같은데 말이죠.”

“나도 오래 막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 특히 지금처럼 웜홀이 빈번하게 발생한다는 거로 봐선 이 차원도 흐름의 변곡점에 들어섰다는 것 같은데 아마 조만간 큰 변혁이 있겠지.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 이능 세계를 이면에 두기는 힘들겠지.”

강민 역시 이런 행동이 시대적 흐름을 막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물론 자신이 나서서 모든 이능력자를 척결해 버린다면 상당한 시간을 지연시킬 수 있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웜홀에서 발생하는 마물을 처리하지 못해 오히려 인류가 더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그렇겠죠. 만약 이능이 전면에 드러나면 행동양식도 바꿔야겠죠?”

“그렇지 그때는 더 이상 [은둔]이나 [적응]이 필요하지 않을 테니.”

“[군림]이나 [지배]로 갈 건가요?”

“그건 나중에 상황 봐서 결정하자. 급한 건 아니니 말이야.”

“그래요, 그런데 경고 문구는 어떻게 남길 거예요?”

“글쎄, 아까 말한대로 하늘 밖에 하늘 있다 정도로 남기려고 해. 유리엘은 다른 생각 있어?”

강민의 말에 유리엘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을 하였다.

“음……. 문구는 그대로 두고 이니셜이나 호칭 같은 걸 두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호칭?”

“그래야. 나중에 다른 곳을 처벌할 때 동일인임을 알리기가 쉽겠죠. 다른 곳도 정도를 벗어나서 나서게 된다면 수뇌부 정도는 갈아 치울 필요가 있을 거잖아요. 그때 동일인임을 알리면 경고의 효과가 더 크겠죠.”

“그렇군. 그럼 어떤 호칭이 좋을까?”

“처벌자의 의미로 퍼니셔(Punisher)나, 주시자의 의미로 오버시어(Overseer)면 어때요? 아니면 아예 모두의 위에 있다는 의미로 더 원 어보브 올(The one above all)도 나쁘지 않겠네요. 호호호.”

유리엘이 거론한 호칭 중에서 잠깐 생각하던 강민은 이내 하나를 골라 이야기를 하였다.

“뭐 그리 거창할 필요가 있을까? 퍼니셔 정도면 좋을 것 같아.”

“퍼니셔도 좋죠.”

대화를 마친 강민은 헤이안의 성채 전면에 ‘하늘 위에 하늘 있다’는 간단한 문구와 함께 퍼니셔라는 이름을 거대한 규모로 새겼다.

물론 세계의 공용어나 마찬가지인 영어로 새겼기에 강민이 드러날 일은 없었다.

강민과 유리엘, 최강훈이 사라진 그곳에는 헤이안 수뇌부와 쇼군의 사체가 처참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헤이안의 성채에 그들이 새겨놓은 거대한 문구는 마치 공포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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