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세귀환록-52화 (52/203)

# 52

현세귀환록

052. 신위(3)

대꾸도 못 하고 입술만 깨문 노인에게 강민이 재차 질문을 던졌다.

“내가 네놈들을 다 처리하고 안으로 들어가서 쇼군인지 쇼걸인지를 만날 수도 있는데 그러지 않는 이유가 궁금하지 않은가?”

사실 궁금했다. 자신의 실력에 아무리 자신이 있어도 각개격파 후에 강적을 상대하는 것이 나을진대, 이렇듯 자신들을 앞에 두고 쇼군을 기다리는 행동이 의아했다.

그래서 원주는 혹시 강민이 마음이 바뀌어 자신들을 처리하려 들까 봐 강민과의 문답을 통하여 시간을 끌고자 하였다.

“그래, 궁금했다. 무슨 이유로 그러는 것이냐?”

“몇 가지 이유가 있지, 가장 큰 이유는 원귀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저 속으로 들어가면 기분이 더러워질 것 같아서지.”

“원귀?”

“아, 네놈들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 내 눈엔 저 성채 곳곳에 서려 있는 원귀들이 보이고 그 한숨 소리가 들리거든. 좀 적당히 하지. 이건 뭐 피로써 쌓은 성이구만.”

원귀 운운하는 말은 모르겠지만 피로써 쌓은 성이라는 말은 부인할 수 없었다.

헤이안이 자리 잡은 지 300년도 채 되지 않았고 자리 잡기까지 수많은 목숨을 거두고 피를 보아야 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원귀 따위야 강민의 행보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겠지만, 실제로 원기의 원념은 그것을 볼 수 있는 강민의 기분을 나쁘게 할 수는 있었다.

특히 저 정도로 많은 원념이 모인 곳은 들어갈 필요가 없으면 가고 싶은 곳은 아니었다.

또한 안에서 싸우다 죽이지 않으려 기절까지 시킨 일반인들이 죽는 것을 보기 싫었다는 점도 작용하였지만 굳이 그 말은 하지 않았다.

원주는 시간을 더 끌고자 강민에게 다시 물었다.

“다른 이유도 있는 것이냐?”

“다른 이유? 아, 몇 가지 이유라 했으니……. 다른 이유는 별거 없어. 쇼군인지 하는 너희들의 두목이 나와봤자 별거 없다는 것이지.”

“별거 없어?”

“그래. 이왕 힘쓸 것 한 번에 모아서 쓰는 게 귀찮음도 덜고 좋잖아. 괜히 한 놈 더 잡으러 저 똥통 속에 들어가는 것보다 말이야.”

강민의 말에 다시금 분노가 치밀어 눈가가 붉어지려는 노인의 눈가에 이채가 띠었다. 멀리서 강대한 기운이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곧 일본 전통복을 입고 상투를 튼 노인 한 명이 일본도를 들고 등장을 하였다. 그의 뒤에는 아까 쇼군에게 상황을 알리러 갔던 이치로가 공손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리고 노인이 전면에 등장함에 따라 나머지 8명은 한쪽 무릎을 꿇고 상체를 숙이며 그에게 존경을 표시하였다.

쇼군은 도집 채로 들고 있던 일본도의 손잡이 부분으로 강민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놈은 대체 누구길래 우리 헤이안에서 이런 난장을 부리는 것이냐!”

쇼군 역시 강민의 처음 공격을 받았다. 그 공격은 광범위하기는 했지만 A급 정도면 충분히 버틸 수 있는 수준이었고 A급 수뇌부가 10명이나 강민을 맞으러 나갔기에 곧 해결되리라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나카무라의 기감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느낀 쇼군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일본도를 챙겨 나가려는 찰나 이치로가 들어와서 상황을 알렸고, 지금 이 자리까지 나오게 된 것이었다.

분노를 머금은 외침과 함께 쇼군은 강민에게 강한 기파를 날리며 그의 실력을 짐작해 보려 했으나, 강민은 마치 산들바람을 맞은 듯 아무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깊이가 짐작이 가지 않는군……. 저 나이에 이런 실력이라니…… 설마, 반로환동?’

반로환동은 경지가 극에 달하여 나이 들었던 신체가 다시 재구성되어 젊어지는 현상을 말하는 것으로 그랜드 마스터급 이상에서나 가능한 경지였다.

자신이 마스터급, 화경의 단계에 들어서 신체의 재구성을 겪어보아서 잘 알았지만, 화경에 들어서며 신체의 재구성이 일어나 70대의 몸이 50대 정도로 젊어지고 노화가 급속히 느려지는 효과는 있었지만 저렇게 20대 청년이 되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랬기에 만약 강민이 반로환동으로 젊어졌다면 최소한 마스터급 이상이라는 이야기였다. 어쩌면 그랜드 마스터급일지도 몰랐다.

‘설마 그랜드 마스터라니…….’

그랜드 마스터라 추정이 되는 인물을 본 적이 있었지만 그 역시 강민의 기파와는 차이가 있었다.

당시 그가 자신을 드러내려고 했는지 숨기려 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자신이 확인한 그의 경지는 분명 자신보다는 한 수 위에 있었고 그래서 그랜드 마스터라 추정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강민의 기파는 분명 그와는 달랐다. 쇼군은 강민이 그랜드 마스터가 아닐까 하며 떠올린 생각을 애써 지우며 위안하였다.

만일 그런 경지라면 아직 마스터급 밖에 안 되는 자신이 상대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시금 자세를 잡고 기를 끌어올리기 시작한 쇼군의 기파는 과연 마스터급의 강자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강렬하였다.

일반적으로 무공수련자에게 S급이라고 불리는 마스터와 그 하위 등급 간의 가장 큰 차이는 오러 소드의 발현 유무라고 알려져 있었다.

마스터의 오러 소드는 샤이닝 소드 정도는 몇 개를 가져다 놓아도 잘라 버릴 수 있는 절삭력과 파괴력을 가진 마스터 이하의 능력자들에게는 무적의 검과 다름없었다.

그런 오러 소드가 쇼군의 일본도에서 솟아 나왔고 그에 담겨 있는 흉폭한 힘을 느낀 9명의 수뇌부는 역시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강민은 아무런 반응 없이 쇼군을 향해서 덤비라는 식으로 손가락을 까딱거렸을 뿐이었다.

그러나 쇼군은 강민의 그런 도발에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마스터 급의 강자였고 그 경지만큼이나 심계도 깊었다. 쇼군은 검기를 두른 일본도를 상단세로 들고 강민의 빈틈을 찾아갔다.

쇼군이 본 강민은 너무도 빈틈이 많았고, 또한 하나의 빈틈도 없었다. 공격 의도를 없이 보면 모든 곳이 허점인 것 같은데 막상 공격하려는 마음으로 보면 모든 곳이 방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지루하군. 그렇게 자랑하던 일본의 검술은 언제쯤 볼 수 있는 것이지? 벌써 한참을 기다린 것 같은데 말이야.”

강민이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상대를 이렇게 시간을 끌어서 살피는 것은 이 세계의 검술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것도 여기서는 보기 드물다는 마스터급의 무위를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상황이었는데, 상대방을 손쉽게 처리하고 싶지는 않았다.

강민의 말에도 한참 동안 쇼군은 강민의 허점을 살피다가 잠시간 드러난 강민의 허점을 발견하고 일격필살의 자세로 검세를 펼쳤다.

그 허점은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그 허점의 여파는 남아 있었고 충분히 그의 일본도가 그 허점을 가를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사실 강민의 왼쪽 목에 있는 허점은 강민이 쇼군의 공격을 유도하기 위해서 잠시 보인 것이었고, 쇼군도 강민이 그랬을 것이라 추측하였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보인 허점도 허점이었다.

잘만 공략한다면 의도적으로 보인 허점은 자승자박의 전략이 될 수도 있는 양날의 검이었기에 속도에 자신 있었던 쇼군은 자신 있게 검을 질러냈던 것이었다.

공격에 들어가는 헤이안의 쇼군이자, 신화일도류(神火一刀流)의 장문인인 히데오는 오랜만에 초월의 영역에 들어섰다.

초월의 영역은 마스터급의 강자가 초집중의 단계에 들어서면 나타나는 현상으로 단전과 기맥뿐만 아니라 온 전신에 충만한 마나가 들어차며 평소의 한계를 돌파하여 활동할 수 있게 되는 현상이었다.

이 상태에 들어오면 시간이 느려지는 것 같고 공간이 이지러지는 것 같은 시공간을 초월한 영역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에 마스터들 사이에서는 초월의 영역이라는 말로 통칭하고 있었다.

보통은 마스터 간의 대결에서나 볼 수 있는 이 영역에서의 싸움은 서로의 몸이 천천히, 마치 슬로우 모션으로 움직이는 것 같았고 서로의 신체들도 일부 일그러져 보였다.

하지만 주위에서 보기에는 눈으로 쫓을 수도 없는 속도로 공방이 이어졌는데, 이 단계에 얼마나 잘, 그리고 오래 머무를 수 있는지가 마스터 간 대결의 핵심이었다.

마스터가 되지 못한 능력자들은 검기, 즉 오러 소드를 마스터의 상징으로 꼽지만 마스터들 사이에서는 초월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지고 마스터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고 있었다.

초월의 영역에 들어간 쇼군은 이내 시공간이 느려지는 것이 느껴졌고 자신의 몸이 생각의 속도를 따르지 못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지 오래되어 초월의 영역을 활용하는 것에도 상당한 경험이 있었기에, 생각과 움직임의 괴리에도 어색하지 않은 동작을 이어가며 강민이 보인 허점을 공격해 나갔다.

주위에서 느끼기엔 번개 같은 움직임이었지만, 쇼군 그 자신은 자신의 움직임이 한없이 느리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강민의 가까이에 다가섰는데도 강민의 움직임이 없었기에 쇼군은 득의의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자신이 초월의 영역에서 보는 시각으로는 아까 전 움직였어야 지금 강민의 목을 향하는 자신의 검격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초월의 영역에서의 속도는 개개인의 역량에 따라 약간씩은 달랐지만 마스터급에서는 기본적으로는 슬로우 모션과 다름없는 움직임이었다. 때문에 쇼군의 생각으로는 이제 강민이 그의 검격을 막으려고 하여도 늦을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였다.

깡-!

하지만 강민은 그의 목까지 다가온 쇼군의 일본도를 손쉽게 쳐냈고 쇼군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자신의 기파를 산들바람처럼 여긴 강민이었기에 보통의 실력이 아니라 생각했고, 아무리 허점을 노렸지만 자신이 추정한 강민의 실력이라면 지금의 검격을 막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까지는 하였다.

그렇기에 막았다는 사실 자체가 그를 놀라게 한 것은 아니었다.

쇼군을 놀라게 한 것은 초월의 영역에서 슬로우 모션이 아니라 평상시와 같은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보였다는 것이었다.

마스터 급의 강자와 몇 차례 대결을 벌인 적이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초월의 영역에서 평상시와 같은 움직임을 보이지는 못하였다.

다소간의 속도 차이는 있었지만 모두가 기본적으로 슬로우 모션이었고, 그 행동과 생각 간의 괴리감을 최소화시키는 것이 마스터 간 대련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평상시와 같이 움직이는 강민에게는 그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었다.

강민처럼 할 수만 있다면 초월의 영역에서 그 혼자 오롯이 설 수 있는 것이었다.

원래는 강민이 검세를 막을 것까지 예상하고 이어지는 공격을 펼칠 생각으로 선공을 가한 것이었지만, 너무도 놀란 쇼군은 경악한 표정으로 몇 걸음 물러서며 신음과 같이 두어 마디를 내뱉었다.

“어, 어떻게…… 초월의 영역에서…… 역시 그랜드 마스터인가…….”

“초월의 영역? 아, 하이퍼 모드 말하는 것이군. 근데 여기 마스터들도 영 맹탕은 아닌가 봐? 하이퍼로 들어가는 것을 보니 말이야. 그치만 하위 단계의 하이퍼 모드가 상위 단계를 이길 수는 없지.”

여기의 마스터들이 초월의 영역이라 하는 것을 강민은 하이퍼 모드라 불렀다.

또한 쇼군은 초월의 영역에 들어가면 모두가 같은 입장이라 생각했지만, 강민은 그 안에서도 단계가 있다는 식으로 말을 하였다.

아직 그랜드 마스터와 대결을 해보지 못한 쇼군으로서는 알 수가 없는 정보였다.

“이게 끝인가? 여기의 검술이나 기술을 좀 더 보고 싶은데 말이야.”

“크윽…….”

어차피 자신의 역량이 모자랐다. 쇼군은 이제 뒷일을 생각할 수밖에는 없었다.

[모두 들어라. 저자는 내가 감당하기 힘들겠다. 우리 헤이안의 앞날을 생각해서 너희들은 흩어져서 잠적하거라. 아마 날 노리고 온 것 같으니 나만 처리하고 나면 너희들을 쫓지는 않을 것이야.]

[쇼군!]

[쇼군! 어떻게…….]

[안 됩니다, 쇼군!]

[차라리 저희와 같이 공격을 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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