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
현세귀환록
048. 습격(2)
“뭐야? 사이토가 죽어?”
“네, 사부님. 사이토가 남긴 일본도를 보면 그의 죽음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예상대로였다. 사이토의 죽음을 알게 된 야스오는 쥰이치가 가져온 증거에 불같이 격노하며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였다.
“……누가 그런 것이냐.”
“쥰이치가 가져온 증거를 분석해 본 결과, 10여 년 전 우리가 공격했던 백록원의 짓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아마 우리가 그때 공격했던 것에 대한 복수를 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사실 이런 조작 증거는 조금만 더 찬찬히 알아보면 여러 허점을 발견할 수 있었으나 이미 머리 꼭대기까지 분노에 찬 야스오는 그것을 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쇼군께 보고하고 출전하겠다. 살행조를 준비시키거라.”
“네! 사부님.”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는 슌스케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번졌으나 야스오는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헤이안의 쇼군에게 보고를 한 야스오는 백록원의 정벌을 명했다.
백록원을 정벌하고 10년 전 취하지 못한 제주도의 고정 포인트를 취하겠다고 천명하였다.
하지만 야마토가 제주도에 도착하면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야스오를 비롯한 야마토의 정예 20여 명이 백록원에 도착하니 이미 백록원이 있던 장원은 폐허가 되어 있었고, 급하게 고정 웜홀 포인트 쪽으로 가 보니 그곳은 이미 유니온에서 나온 요원들이 지키고 있었던 것이었다.
“슌스케! 어찌 된 일인 것이냐!”
뜻밖의 상황에 슌스케 역시 당황하여 말을 잇지 못하였다. 이미 멸문지경에 있는 백록원이었기에 별도의 척후를 운용하지 않고 소수 정예로 급습을 계획했던 것이었는데 이런 상황이 벌어져 있어 슌스케도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또한 국제적 분쟁은 유니온에 사전 통보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관례는 관례일 뿐 그것을 지키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이번에 유니온 한국 지부에 통보하지 않은 것은 정보통제 차원에서였다.
만일 미리 정벌 사실을 알려주었다가 그 정보가 백록원에 새어 나가 그들이 도망을 치거나 조력자를 구한다면 괜한 피를 흘릴 수도 있었기에, 일단 점거를 하고 유니온 한국 지부에 통보해 승인을 받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백록원이 이 포인트를 유니온에 반납한 지 벌써 몇 달이 넘었다는 요원의 말에 야스오를 비롯한 야마토의 정예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유니온의 요원들과 이야기해 본 결과 백록원이 폐쇄된 시기가 사이토가 죽은 시기와 비슷했다. 야스오는 백록원에서 사이토를 죽인 후 야마토의 복수가 두려워 잠적했다고 최종적으로 판단했다.
슌스케의 입장에서는 제주도의 포인트는 차지하지 못했지만, 차기 후계자로 거론되던 사이토를 해치울 수 있었기에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것이기에 내심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야스오와 슌스케 일행은 혹시나 싶어 다시 백록원으로 돌아왔다.
야스오와 슌스케가 정벌을 위해서 데려온 수하들은 최하가 D급의 능력자로 야마토에서는 살행조라고 불리는 정예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뽑은 칼은 쓰지도 못하고 칼집에 곱게 꽂혀 있었다.
분노를 풀지 못한 야스오는 백록원의 현판을 보다가 안면을 굳힌 채로 옆의 수하에게 명했다.
“당장 저 꼴도 보기 싫은 장원을 불 질러 버리거라!”
“네!”
야스오의 분노에 씩씩하게 대답한 수하는 이내 장원의 여기저기에 불을 놓았고 장원의 곳곳은 어느새 불길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야마토의 수하 한 명이 장원 위를 바라보며 손가락질하며 외마디 말을 외쳤다.
“저, 저기!”
그 말을 신호로 모두가 하늘 위를 바라보았는데, 하늘 위의 허공에는 선남선녀가 떠 있었다. 강민과 유리엘이었다.
“이건 웬 놈들이야. 보니까 일본 놈들 같은데.”
“그러게 말이에요. 혹시나 수강이가 돌아올까 싶어서 마나 감지기를 깔아놓았더니, 잡것들이 왔네요. 그냥 두고 볼 수가 없겠네요. 장원에 불까지 지르다니 말이에요.”
둘의 등장과 함께 번지려던 불은 일순 꺼져서 연기만 날렸는데, 야마토의 살행조는 그것이 둘의 소행이라 생각하지는 못하였다.
다만 야스오만이 둘의 등장에 따른 기파로 인하여 불이 꺼졌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챘을 뿐이었다.
허공에 떠 있다가 장원의 마당으로 내려온 강민과 유리엘에게 슌스케는 일본도를 빼 들며 외쳤다.
“네놈들은 누구냐! 혹시 백록원 놈들이냐!”
슌스케가 백록원을 운운하자 20명의 살행조 역시 칼을 빼 들며 전의를 불태웠다.
“그 말은 백록원을 알고 왔다는 것인데. 그러는 네놈들은 누구냐?”
“백록원을 안다라? 역시 백록원 놈들이구나! 우리는 네놈들의 손에 죽은 사이토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온 야마토다! 아마 10년 전 공격에 대한 복수를 한 것 같은데 사람을 잘못 건드렸다는 것을 알려주마!”
슌스케는 행여 백록원 놈들이 사이토의 죽음에 관해 발뺌을 할까 봐 옆에 있던 살행조에게 눈짓을 하여 공격할 것을 신호했다.
슌스케의 눈짓에 가슴에 대화(大和)라는 한자를 붙인 닌자 복장의 복면인은 일본도를 빼 들고 강민에게 검격을 날렸다.
깡-!
하지만 강민에게 접근도 하지 않았는데 검격은 허공에 막혔고 그 복면인은 공격했던 것과 같은 속도로 튕겨 나왔다.
첫 번째 공격이 실패하면서 나머지 복면인들도 공세에 나서려고 하였다. 하지만 강민은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슌스케에게 물었다.
“사이토? 사이토 하나부사 말이냐?”
강민의 말에 슌스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사이토를 죽인 인물은 미궁에 빠져 있었고 지금 백록원은 자신들이 꾸민 증거로서 범인으로 몰아서 공격하려 한 것인데, 백록원의 인물로 추정되는 사람이 사이토의 전체 이름을 알고 있었다.
“네, 네놈이 정녕 사이토를 죽인 것이냐?”
“아, 그렇지. 네놈들이 그 야마토 군. 사이토가 죽으며 복수 운운하더니 이렇게 온 것이군. 그런데 날 찾아온 게 아니라 왜 백록원을 건드리는 것이지?”
“그야 네놈이 백록원 소속이니 그렇지!”
“내가 백록원 소속이라고? 백록원 소속을 거둔 적은 있지만…….”
강민의 말에 야스오는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슌스케 역시 강민이 사이토를 죽인 진정한 범인은 맞지만 백록원 소속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괜히 대화를 더 이어가면 야스오에게 전말이 들통 날 것 같자 슌스케는 둘 사이의 대화에 멈칫거리고 있는 복면인들에게 수신호를 보내 다시 한번 공격을 감행토록 하였다.
20여 명의 살행조가 강민과 유리엘을 향해 공격하는 것을 보고 슌스케는 어차피 잘 되었다는 생각을 하였다.
사이토를 죽인 자가 누구인지 찜찜했었는데 공교롭게 이렇게 나타났으니 가짜 복수가 아닌 진짜 복수를 행하면 되는 것이었다.
챙챙챙- 우당탕탕-
하지만 슌스케의 잘 되었다는 생각은 20여 명의 살행조가 나뒹구는 것과 동시에 사라졌다.
30대 중반의 나이로 B급의 능력자가 된 슌스케는 헤이안 전체를 통틀어도 나이에 비해 상당한 실력의 능력자라 할 수 있었지만, 자신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강민의 손속을 알아볼 수조차 없었다.
강민은 굳이 기도를 보이지 않고 자연체의 상태로 있었기에 슌스케 정도로는 강민의 능력을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다만 뒤에 서 있는 야스오는 강민의 무서움을 약간이나마 느꼈는지 굳은 얼굴로 강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민을 공격했다가 튕겨 나가 바닥에 나뒹군 살행조는 바닥에서 꿈틀대며 일어나지 못했는데 그걸 본 슌스케는 살행조에게 고함을 쳤다.
“무엇들 하는 거냐! 야마토의 정신은, 사무라이의 정신은 어디다 팔아먹었어!”
하지만 살행조는 슌스케의 고함에도 일어나지 못했다. 호신막에 부딪혀 나가떨어진 살행조는 단순한 물리적 충격에 의해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슌스케는 알아보지 못했지만 살행조가 강민을 공격함과 동시에 강민에게 쳐져 있던 호신막의 성질이 변하며 침투경이 발생하였고, 그것을 그대로 맞은 살행조의 진원이 흔들렸던 것이었다.
그랬기에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하였지만 기맥을 파고들며 진원을 흔들고 있는 침투경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서 움찔거릴 수밖에 없었다.
[유리엘, 10년 전 운운하는 것 보니 저놈들이 백록원의 원수들 같은데, 우리가 처리하는 것보다 강훈이를 부르는 건 어떨까?]
[그것도 괜찮은 방법 같네요. 근데 강훈이 실력에 저 뒤에 노인도 고사하고 저 녀석을 이길 수 있을까요?]
[과정이 중요한지 결과가 중요한지는 사람마다 다르니까. 그래도 복수에 한몫하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한 감정 아닐까? 일단 강훈이에게 물어보자.]
[그래요, 그게 낫겠네요. 강훈이가 선택하게 하지요.]
유리엘은 심어와 메시징을 결합한 마법을 통하여 최강훈의 정신에 직접 질문했다.
[강훈아, 유리 누나야.]
강서영이 수업을 듣고 있는 동안 뒤에 앉아서 그녀를 경호하던 최강훈은 갑자기 들려온 유리엘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지금 민이랑 난 제주도인데, 너한테 물어볼 게 있어서 이렇게 마법 통신을 보내는 거야. 머릿속으로 대답하면 내가 들을 수 있으니까 당황하지는 말고.]
[예, 누님. 이런 마법은 처음이라 조금 당황했습니다. 그런데 제주도는 왜……?]
[백록원에 마나 감지 마법을 펼쳐놓았는데 일본 조직이 백록원을 공격하러 왔더라고. 대강 이야기를 들어보니 10년 전에 백록원을 공격했던 세력 같은데.]
[네? 헤, 헤이안입니까?]
[야마토라고, 헤이안 산하 조직 같더라. 알고 있지?]
[아! 야마토!]
10년 전 백록원을 공격했던 조직들은 헤이안 산하의 야마토, 시미즈 및 헤이세이의 3개 조직의 연합이었다.
당시 헤이안은 한국의 상황이 어수선한 틈을 노려 제주도에 있는 고정 웜홀 포인트를 점거할 계획을 갖고 있었고, 3개의 조직 중 공이 가장 큰 조직에 그 포인트를 넘긴다고 천명하였다.
이에 3개의 조직은 백록원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는데, 야마토가 기습적으로 나서서 공세를 이끌었다.
뒤늦게 시미즈와 헤이세이가 참전하려고 했으나 이미 야마토에게 승산이 넘어갔기에 공격하는 시늉만 했을 뿐이었고, 이 공격에 의해 백록원은 거의 멸문지경에 이르렀었다.
3개 조직의 연합이라 하였으나 실질적인 백록원의 원수는 야마토였고, 그것을 사주한 헤이안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한국의 이능 단체들이 이런 헤이안의 행동을 규탄하였고, 만약 제주도에서 물러나지 않는다면 한국도 대마도를 공격한다고 엄포를 놓았다.
결국 유니온의 중재로 인하여 헤이안은 물러났고 백록원은 멸문 직전에 살아남게 된 것이다.
나중에 사정을 알게 된 백록원의 한진문은 복수심을 불태웠으나 이미 심각한 내상을 입어 자신들의 웜홀 포인트를 수호하는 것조차 힘든 상황이었다.
최강훈이 야마토를 아는 듯하자 유리엘은 이어서 메시지를 전했다.
[처음엔 민하고 나하고 다 처리하려다가, 그래도 복수는 네가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문제는 우두머리로 보이는 인물들은 네가 처리하기 힘들 것 같아.]
[형님이나 누님은 처리 가능하신 거죠?]
[물론이지.]
[복수에 굳이 제 손만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형님께서 괜찮으시면 단칼에 날려 버리셔도 좋겠어요. 다만 그 마지막은 보고 싶은데…….]
[그건 문제없지. 서영이한테 잠시 자리 비운다 하고 화장실로 가. 이리로 공간 이동 시켜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