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
현세귀환록
045. 공세(2)
최강훈은 강서영의 표정을 보지 못했는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밤에 하는 수련으로도 충분해요. 또 형님께서 집은 안전하니까 집에 있을 때는 자유롭게 수련하라고 하셨어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요. 뭐든 무작정 시간만 많이 투자한다고 좋지는 않잖아요. 하하.”
최강훈은 강서영보다 한 살 어렸지만 그 눈 속에 담긴 슬픔의 깊이는 나이답지 않았다.
다부진 몸, 훤칠한 키와 함께 우수에 젖은 듯한 그의 눈은 남자답게 생긴 최강훈의 매력을 돋보이게 하는 마력이 있었다.
얼굴이 화끈거리며 잠시 가슴이 두근거린 강서영에게 때마침 전화가 오며 어색한 상황을 벗어날 수 있었다. 물론 어색한 감정은 아직 강서영 혼자 느끼고 있었지만 말이다.
휴대전화 액정에 뜬 이름은 백지호였다. 최강훈의 말에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던 강서영은 잘되었다는 생각으로 평소보다 더 쾌활하게 전화를 받았다.
“선배~ 무슨 일이에요?”
-또 선배야? 오빠라고 하라니까?
“아, 오빠, 헤헤. 아직 입에 붙지 않아서요. 근데 무슨 일이에요?”
-뭐 우리가 무슨 일이 있어야 연락하는 사이야? 하하.
“음…… 그런 사이 아니었어요? 난 그런 줄 알았는데…….”
-서영아~ 섭섭하다, 섭섭해. 내가 너 곤란한 상황도 해결해 주었는데. 이렇게 말하기야?
강서영의 정색에 백지호는 애써 과장된 말투로 섭섭함을 표시했다.
“농담이에요, 오빠. 히힛.”
-그, 그렇지?
“근데 진짜 아무 일 없이 연락한 거예요?”
-아, 별일은 없고 시간 되면 밥이나 먹자 하려고. 어때?
“음. 그렇게 해요. 어차피 저도 수업 끝나서 집에 갈까 하는 중이었거든요.”
-그래, 그럼 학교 정문에서 보자. 더 스시 어때?
“괜찮아요. 그럼 좀 이따 봐요.”
전화를 끊고 정문으로 가니 백지호는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백지호는 강서영을 발견하곤 손을 흔들며 반갑게 맞이하였다.
강서영이 다가오면서 뒤에서 따르던 최강훈과 이은실 또한 보였는데 눈썰미가 좋은 백지호는 강서영의 경호원이 바뀐 것을 알아차렸다.
“서영아~ 여기~”
“오빠, 빨리 도착했네요.”
“그럼! 어떤 분 만나는데 내가 기다려야지 하하. 근데 경호하시는 분들 바뀌신 거야?”
“아, 네. 일이 좀 있어서…….”
강서영의 납치 사건은 이슈화시키지 않아서 다들 모르고 있었다. 김한모 기자가 자신도 피해자라며 언론에 알려야 한다고 방방 뛰었지만 나중에 강민과의 단독 인터뷰를 잡아준다는 말로 무마시켰다.
전에는 30대 중반의 남성과 여성이었는데 지금은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성과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성이었다.
상식적으로 20대 초반이라면 경험이 적어 경호가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되어 백지호는 약간 의아했다.
호기심이 생긴 백지호는 굳이 그 호기심을 감추지 않았다.
“이분은 경호일을 하시기엔 연배가 낮아 보이는데…….”
“아, 강호는 오빠 지인 제자인데 그분 돌아가시면서 우리 집에서 같이 살고 있어요. 우리 오빠가 후견인 해주기로 했대요.”
“민이 형님이 후견인이라고? 근데 왜 경호를…….”
“저는 괜찮다는데 강훈이가 오빠랑 약속이라면서 고집하네요. 고집불통이에요. 아, 인사해요. 여기는 제 경호해 주시는 두 분이구요, 이쪽은 아는 오빠예요.”
강서영의 아는 오빠라는 말에 백지호는 왠지 섭섭한 표정을 지었지만 최강훈과 이은실이 인사를 해오기에 같이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세요, KM가드의 이은실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십니까, KM가드의 최강훈입니다.
“아, 저는 백지호라고 합니다. 민이 형님, 아니, 강민 회장님과 친분이 있어서 이렇게 서영이하고도 알게 되었지요. 우리 서영이 잘 부탁드립니다.”
백지호는 이은실과 최강훈과 각각 악수를 나누었는데, 특히 최강훈과 악수할 때 그를 유심히 보았다.
백지호 역시 선이 굵게 생긴 남자다운 타입이었지만, 십 년이 넘게 수련만 해온 최강훈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단순 운동을 위해 격투기를 배우거나 헬스장을 다녀서 갖춘 백지호의 몸과는 질적으로 다른 실질적인 근육과 기세가 최강훈에게서 느껴졌다.
최강훈의 다부진 몸과 왠지 모를 슬픔이 있어 보이는 깊은 눈이 백지호에게는 인상적이었다.
백지호가 최강훈을 살펴보고 있을 때 강서영의 말이 분위기를 환기했다.
“우리 서영이? 내가 언제 오빠 서영이가 됐지? 흥.”
“민이 형이 나보고 널 잘 돌봐달라고 했으니, 동생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어? 그러니 우리 서영이지. 하하.”
“우리 오빠가 선배한테 그런 말을 했다고요? 우리 오빠가 그럴 리가 없는데 확인해 봐야겠다.”
당연히 거짓말이었기에 뜨끔한 백지호는 과장되게 손을 저으며 되려 강서영을 뭐라고 했다.
“민이 형 바쁜데 그런 거 물어보지 말고. 근데 너 또 오빠가 아니라 선배라 했어!”
“아, 맞다. 너무 그렇게 몰아붙이지 마요. 그럼 계속 선배라 부를 거예요!”
“미안, 미안. 한번 봐주라. 하하하.”
식사는 강서영과 백지호 둘이서만 한 것이 아니라 최강훈과 이은실도 같이 하였다. 경호원과 한 상에서 같이 식사를 하는 것은 드문 일이나 강서영이 권하였고 백지호 역시 최강훈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 같이 식사를 하자고 하였다.
밥을 먹는 동안 백지호는 강서영이 은근슬쩍 최강훈을 보는 일이 많다고 생각했다. 아마 그것을 알아차린 것은 백지호 자신이 강서영에게 집중을 하고 있어서 일 것이다.
이아현이 그간 자신을 보는 시선이 지금 자신이 강서영을 보는 시선과 같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강서영의 그런 행동과 함께 최강훈이 단순한 경호원이 아니라 강민 지인의 제자로 한집에서 같이 사는 사이라 생각하자, 백지호는 왠지 모를 질투의 감정이 생기는 것 같았다.
다만 아직 최강훈은 강서영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는 눈치가 아닌 것 같아서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귀엽고 매력적인 강서영에게 호감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내가 한발 앞선 것 같지만, 한집에서 산다면 곧 어떻게 될지 모르니…….’
* * *
KM그룹 산하 기업인 KM마트에서는 오늘도 연신 회의가 이어졌다. 30대 후반의 김진성 과장은 조사 결과를 50대 초반의 최흥식 부장에게 보고했다.
“부장님, 또 경쟁사에서는 할인 행사를 진행한다는데요?”
“경쟁사 어디?”
“SL하고 홈마트요.”
김진성 과장의 보고에 옆에 앉아 있던 40대 초반의 대머리 황규복 차장이 말을 덧붙였다.
“이번엔 ABC는 빠졌네?
“ABC는 얼마 전에 했었잖아요. 지금 돌아가면서 하는 것 같아요. 담합이 있는 것 같기도 하구요.
“근데 그래서 납품업체들이 버틸 수나 있겠어? 벌써 하반기만 해도 세 번째잖아.”
최흥식 부장의 말에 황규복과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조동일 차장이 말을 받았다.
“설마 그 회사들이 자기들 마진율 깎아서 하는 거야? 그렇지 않고서는 납품업체들 반발도 상당할 건데?”
“걔네가 자기들 마진율을 깎을 리가 없죠. 그냥 납품업체 반발 무시하고 강행한다더군요.”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
“왜긴 왜겠어요. 우리 때문이지요.”
“우리가 왜. DC 때랑 다른 것도 없잖아.”
지금 회의에 참석 중인 김진성 과장이나, 황규복 차장, 조동일 차장 및 최흥식 부장은 KM마트의 전신인 DC마트 때부터 근무했던 직원들이었다.
김진성 과장의 말에 다른 직원들은 상황을 이해하는 듯했으나, 최흥식 부장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상황파악이 다소 늦었다.
그래서 황규복 차장이 상황을 잘 모르는 최흥식 부장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부장님도 참……. 이젠 모기업이 있잖아요. 예전에야 모기업도 없는 조그만 유통사가 세상 물정 모르고 덤빈다는 인식이었지만 지금은 KM그룹이 버티고 있으니 자기들도 부담이 되겠지요.”
사실 DC마트의 정책은 KM마트로 인수된 지금에도 크게 바뀐 것은 없었다. DC 시절에도 사장인 황대창이 건전한 유통 구조를 만들고 싶다는 일념으로 시작하여 납품 업체를 후려치는 시장 관행을 DC마트에서는 막았고, 그로 인해 타사보다 수익률이 많이 낮았다.
황대창 사장은 자신이 앞장서서 이렇게 나선다면 점차 올바른 유통 구조로 나아 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타사에서 생각한 것처럼 순진한 생각이었다.
업계의 관행은 생각보다 견고했고, 강한 유통망과 자금력을 동원한 빅 3의 공세에 매출액은 나날이 떨어져갔다.
이것이 누적되다 보니 점포별 수익률은 점차 떨어졌고 적자를 보는 점포도 있었다. 그리하여 결국 황대창은 사업 자체를 포기하고 KM그룹에 DC마트를 넘기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DC마트가 KM그룹의 품에 안기면서 이야기는 달라졌다.
일단 점포의 개수부터 거의 두 배 가까이 늘어났는데, DC마트 시절에는 전국 점포가 50여 개로 유통 빅 3인 SL마트나 홈마트, ABC마트의 점포 수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KM그룹에서 DC마트를 인수한 이후 전국 브랜드가 아닌 지역 브랜드 업체의 점포를 인수하고, 체인이 아닌 개별 점포 등을 인수하여 지금은 다른 유통 빅 3에 버금가는 점포 수를 가지게 되었다.
이런 점포 개수에 모기업인 KM그룹의 자금력까지 등에 업은 KM마트는 이제 세상 물정 모르는 조그만 유통사라고 보기에는 힘들었다.
자칫 잘못하면 업계의 모든 관행을 뒤흔들 폭탄이 될 수도 있었기에 유통 빅 3에서는 대규모 할인을 통해 KM마트의 수익률을 줄여 결국엔 KM그룹에서 유통업을 포기하도록 만들 계획이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3사에는 돌아가며 대규모 할인 행사를 계획하고 각종 사은품 등의 고객을 끌어모을 수 있는 수단을 강구하였다.
물론 고객들은 이런 조치를 환영했다. 상품을 할인해서 살 수 있었고 사은품도 받을 수 있었으니, 하지만 납품 업체는 죽을 맛이었다.
시장의 관행상 행사를 하면 마트에서 전적으로 부담을 지는 것이 아닌 납품 업체와 공동으로 부담을 지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니, 오히려 납품 업체에 더 많은 부담이 가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심한 경우에는 하도 쥐어 짜내다 보니 제품을 납품하면서 수익이 아니라 손실을 보는 경우마저도 발생하였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을’인 납품 업체가 ‘갑’인 대형 마트에게 따질 수는 없었다. 잘못하면 대형 마트라는 큰 유통 라인 하나가 날아가 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대형 마트의 요구를 따를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심해져 도산하는 업체마저도 있었다.
지금 KM마트에서는 과거 DC 시절처럼 납품 업체의 후려치기가 없는 유통사였다. 그랬기에 많은 납품 업체들은 KM마트와 거래하기를 원하였다.
문제는 DC 시절처럼 KM마트의 수익이 타사에 비해서 많이 낮다는 것이었다.
할인 행사가 적으니 매출액 자체가 적었고, 할인 행사를 하더라도 업체를 쥐어짜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마진율을 깎아서 진행하니 수익률 또한 타사에 비해서 낮다는 악순환이 있기 때문이었다.
최흥식 부장 또한 유통사에 있은 지 30년이 다 되어가는 상황이었기에 황규복 차장의 설명에 그 뜻을 바로 이해하였다.
“아, 하긴……. 근데 계속 이러다가 DC 때처럼 KM그룹도 유통업 포기하는 거 아냐?”
“저도 그게 걱정이에요.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부장님께서 본부장님께 건의를 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최흥식 부장이 이해하는 듯하자 황규복이 약간 은근한 말투로 최흥식에게 말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