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현세귀환록
043. 인연(5)
강민과 유리엘이 데이트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것은 날이 밝기 직전이었다. 그들이 돌아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침이 되자 강서영이 잠옷을 입은 채로 거실로 나왔다.
“하암~”
“서영이 일어났어? 어머님은?”
강서영이 일어나기 전에 룸서비스로 가벼운 아침을 준비해 놓은 유리엘은 강서영의 등장에 우유를 따르며 아침 인사를 했다.
“엄마는 피곤하신가 봐요. 근데 오늘도 맛있는 유러피안식 아침이네요. 매일매일 이랬으면 좋겠다. 히히.”
“그래? 그럼 서울 가서도 이렇게 아침 준비하도록 사람 쓰지, 뭐. 어려운 것도 아닌데 뭘.”
“아, 아녜요. 엄마가 집에 사람들 쓰는 거 불편해하셔서……. 그리고 가족 식사는 엄마가 직접 챙기고 싶으시대요.”
“그래? 그러시구나.”
강서영과 유리엘이 이야기하는 동안 한미애도 일어나서 간단히 아침을 먹었고, 간단히 짐을 싸서 숙소 근처의 관광지로 이동하였다.
사실 3박 4일은 제주도를 모두 돌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기에 주요 관광지만 둘러볼 수밖에 없었다.
전용기가 있기에 별도의 비행기 시간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서울로 가기로 하였으니 점심을 먹고 공항으로 이동하였다.
“아, 짧다, 짧아. 3박 4일이 아니라 3.4초 같아.”
“서영아. 다음에 또 오면 되니까 너무 아쉬워 말아.”
유리엘이 달래는 듯 강서영에게 말을 건네자 강서영이 깜짝 놀란 얼굴로 말했다.
“언니! 다음엔 해외로 가야죠. 해외!”
“올 때는 제주도도 해외라면서. 호호호.”
“그렇긴 하지만, 제주도 한 번 왔으니 이번엔 여권 들고 가는 진짜 해외도 가고 싶어요. 히히히.”
일행이 웃으며 이야기하는 사이에 차량은 공항에 도착했고, 차량을 반납한 후 왔던 것처럼 전용기를 타고 서울로 복귀하였다.
* * *
“오늘이 일주일째지요?”
“그래, 오늘쯤은 가야지. 별일 없으면 지금 가 볼까?”
“그래요.”
강민을 잡은 유리엘은 전에 좌표를 기억해 놓았던 백록원 앞으로 공간이동을 시행하였다. 일주일 전과 다르지 않은 백록원의 모습이 보였는데 느껴지는 기척은 네 명이 아니라 두 명이었다.
한진문과 한수강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었다.
강민과 유리엘은 한진문을 부르며 백록원으로 들어갔다.
“한 원주님, 강민입니다.”
강민의 소리에 한진문이 아닌 최강훈이 나와서 강민과 유리엘을 맞이하였다.
“아, 형님 오셨습니까?”
저번에 회장님이라 부르려던 최강훈을 보고 다음에 볼 때는 형님이라고 부르라 했더니, 최강훈은 이렇듯 강민을 형님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최강훈이 강민을 부르는 목소리는 비감에 젖어 있었다. 최강훈의 옷차림만 보아도 한진문의 상황을 알 수가 있었다. 최강훈은 상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원주님 돌아가신 거냐?”
강민의 말에 다시금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꾹 참고 최강훈은 대답하였다.
“네, 형님.”
“어찌 된 일이지? 그때 분명히 한 달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는 상태였는데. 혹시 다시 마물이 출현한 것이냐?”
“아닙니다. 수아가 갑자기 발작하려 하여 그걸 막으려 진원까지 쏟아부으셨다가 이틀 전에 타계하셨습니다. 흐흐흑…….”
강민에게 이야기하던 최강훈은 다시금 그때 생각이 났는지 결국 울음을 참지 못하고 약간 흐느꼈다.
“허…… 그냥 두었다면 수아의 상태가 갑자기 나빠질 리가 없을 텐데…… 그럼 수강이는 어디로 간 거냐?”
“수강이는 죄책감에 집을 나갔습니다.”
“죄책감이라면……”
최강훈의 이야기에 따르면 강민이 서울로 돌아가고 난 뒤 이틀째 되던 날, 선천진기를 활성화시킨 한수아의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강민은 일시적인 명현 현상임을 바로 알았으나, 당시 한수아를 지키고 있었던 사람이 한수강인 것이 문제였다.
아직 17살밖에 되지 않아 관련 지식이 짧은 한수강은 한수아의 상태가 절맥증 때문에 안 좋아졌다고 판단하여 기존에 먹던 포션과 약재를 투여한 것이었다.
하지만 활성화된 선천진기와 약 기운이 상승작용을 일으켜서 시기가 도래하지 않았는데 선천진기가 급속히 활성화되며 그 기운을 쏟아내 버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급격히 커지는 한수아의 선천진기에 그녀의 상황을 알아챈 한진문과 최강훈이 그 방으로 달려왔지만 이미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최강훈은 이런 사안에 대한 지식이 짧았기에 어쩔 수 없이 몸이 좋지도 않은 한진문이 한수아의 상태를 바로잡으려고 하였다.
결국 한진문은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선천진기까지 모조리 동원하여 한수아의 선천진기에 고삐를 매었고 전과 같은 상태로 돌릴 수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한진문의 선천진기는 모두 소모가 되어 결국엔 숨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이라 생각한 한수강은 최강훈이 말릴 새도 없이 집을 나서서 돌아오지 않았기에, 지금은 최강훈과 한수아 둘만 남게 된 것이었다.
“사부님은 수강이의 탓이 아니라고…… 제게 수아와 수강이를 잘 부탁한다는 마지막 말씀을 남기고 돌아가셨습니다. 수강이도 그 말을 들었지만 자신의 탓이라 생각하는지 편지 한 통만 남기고 나가 그 이후로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최강훈은 한수아를 돌보아야 했기에 한수강을 찾으러 갈 수조차 없었으리라.
한수아는 늘 정신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하루에 몇 시간도 채 움직이지 못하고 거의 자리에 누워 있었고, 강민이 선천진기를 활성화시킨 다음엔 가수면 상태로 일주일을 누워만 있어야 했기에 옆에서 돌보아 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었다.
“허…….”
강민은 짧은 한탄을 표했다. 백록원의 운명은 참으로 기구하였다. 천 년이 넘는 오랜 역사가 있었지만 일제 강점기 이후 쇠락하다, 일본 이능집단의 공격으로 명맥만 유지하는 힘든 시기를 겪고 지금은 그 명맥조차 간당간당한 상황이 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일단 수아부터 치료하고 보자.”
백록원의 기구한 상황에도 한수아가 이렇게 강민을 만나 기회를 가진 것은 행운이었다. 강민이 없었다면 약물로 좀 더 연명하다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기맥이 끊겨 죽을 운명이었기 때문이었다.
한수아의 상태는 한진문이 마지막 불꽃을 태워 원래대로 돌려놓아서 그런지 치료하기에 적합한 상태였다.
강민은 한수아의 옆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고, 침대 위의 그녀는 강민의 가슴 부근까지 천천히 떠올랐다.
한수아는 지금 가수면 상태로 지금 상황을 아예 기억 못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한진문이 운명을 달리하고, 한수강이 떠나간 것도 어렴풋이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강민은 낮지만 강한 어조로 한수아에게 이야기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헛되게 하고 싶지 않다면, 마음 단단히 먹어라.”
강민은 한수아의 눈꺼풀이 살짝 떨리는 것을 볼 수 있었고, 공중에 떠오른 그녀의 이마와 배에 한 손씩 얹고 기맥의 움직임을 파악해 갔다.
강민이 한수아를 자세히 살펴보니 한수아의 기맥은 세맥들은 이미 많이 끊어져 있었고 대맥 또한 매우 약해져 있었기에 이대로 가다가는 성인이 되기도 전에 목숨을 잃었을 상황이었다.
절맥증 중에서도 매우 중증에 해당하는 심각한 절맥증이었다.
이내 활성화 시킨 선천진기가 미약하게 이어진 대맥을 흐르는 것이 느껴졌고, 강민은 한수아의 몸, 특히 그 대맥을 통로로 하여 오른손과 왼손의 마나를 맹렬히 회전시켰다.
미약했던 대맥을 강민의 마나로 보호하며 막혀 있던 대맥을 뚫어내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끊어진 세맥도 강민의 마나로 임시로 이은 다음 막힌 곳을 뚫어내었다.
한수아는 가수면 상태였지만 모든 맥의 막힌 곳이 뚫렸고, 끊긴 곳이 이어져 융통무애한 상태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한수아의 기맥이 제 상태로 자리 잡으면서 한수아 체내의 나쁜 기운이 검은 땀으로 분출되기 시작했다. 처음엔 약간 배어 나오는 정도였지만 점차 옷을 적시며 나중엔 뚝뚝 흐르며 침대까지 검게 적셨다.
한참 동안 한수아의 전체 기맥을 대주천시켜 몸의 악기까지 내쫓은 강민은 보호했던 기맥 하나하나에 자신의 마나를 스며들게 하여 기맥을 강화해 주었다.
건강한 체질이었다면 단지 막힌 기맥을 뚫어내는 개정대법만으로도 충분히 효과를 볼 수 있을 테지만 한수아는 맥 자체가 끊기거나 약한 상태였기 때문에 맥을 살려야 했다.
아마 단순한 마스터였다면 이 치료에만 자신의 기 대부분을 소모하여야 했을 것이고, 진원조차 상처를 입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강민은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치료를 마쳤다.
강민의 손이 한수아의 머리와 배에서 떨어지자 한수아는 천천히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치료를 마치며 가수면 상태에서 깨어났는지 침대에 내려오자마자 누워 있던 한수아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강민에게 인사를 하였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고개를 숙여 말을 끊낸 한수아는 다시 고개를 들지는 못했다. 고개를 숙인 상태로 어깨가 들썩거리는 것이 분명 한진문의 죽음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흑, 흐흑…….”
옆에 서 있던 최강훈은 그런 한수아를 가만히 앉아주었다.
* * *
강민이 치료를 마치고 유리엘과 함께 대청에 앉아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상복을 벗고 티셔츠와 면바지의 평상복을 입은 최강훈이 봇짐을 싸 들고 나왔다.
“너도 평상복이 있구나.”
“네, 누님. 가끔은 시내로 나가기도 하는데 도복은 너무 눈에 띄니까요. 사부님 말씀도 있었으니 수아가 나오는 대로 떠나시죠.”
“수강이는 어쩔 생각이냐?”
최강훈의 차림을 보고 강민이 물었다.
“수강이는…… 예전부터 외곬적인 성격이 있었지요. 아무리 자기 책임이 아니라고 해도 스스로가 그렇게 여긴다면……. 스스로 납득이 되는 상황이 되기 전까진 돌아오지 않으려 할 겁니다.”
“그렇지만 아직 아이 아니니?”
“누님, 저도 처음엔 찾아서 데려가려고 했는데, 편지에 쓰인 글을 보고나니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한수강이 집을 나서며 쓴 편지에는 아버지, 즉 한진문은 자신의 탓이 아니라 하였지만, 한수강 자신은 아버지를 그렇게 죽게 만든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어 자신이 아버지 영전에 떳떳한 사람이 될 수 있을 때까지는 나타나지 않겠다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쌍둥이 누님인 한수아를 잘 부탁한다고 하였다.
“떳떳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했으니, 아마 나쁜 생각은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 수강이도 마음고생이 많겠구나.”
사실 강민과 유리엘이 한수강을 찾으려면 못 찾을 것도 없었지만, 보호의 책임을 받은 최강훈이 그렇게 판단한다면 그의 의지를 존중해 주기로 하였다.
그리고 17살은 어리다면 어린 나이지만 스스로 하고자 한다면 못할 것도 없는 나이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동안 한수아가 나왔다. 아까 몸의 악기가 빠져나온 탓에 악취가 일었기에 샤워를 한다고 다소 시간이 걸렸는데, 창백했던 예전의 얼굴과 달리 혈색이 돌아 보기 좋은 얼굴빛을 하고 있었다.
한수아 역시 전에 입고 있던 헐렁한 베옷이 아닌 하늘색 원피스의 평상복을 입고 있었는데, 황소처럼 큰 눈망울과 오랜 세월 집안에만 있어 하얀 피부가 인상적이었다.
가느다란 몸매에 허리 정도까지 내려오는 까만 생머리가 한눈에 보아도 미소녀라 할 만했다. 물론 유리엘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는데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한수아라고 합니다. 저를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수아는 다시금 허리를 꾸뻑 숙이며 인사를 하였다. 강민은 한수아를 두 번째 보지만 한수아는 강민을 처음 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강훈아, 수아에게 이야기했어?”
“네, 누님. 수아도 상황은 잘 알고 있습니다. 수강이 건도 어렴풋이 알고 있기에 제가 아까 말해줬습니다.”
“그래? 수아야, 괜찮겠어? 살던 곳을 떠나야 하는데 말이야.”
“네……. 이제는 아버지도 안 계시고 수강이도 없으니까요……. 그리고 건강해졌으니 학교도 다녀야 하잖아요.”
한수아는 슬픔을 머금은 얼굴로 애써 웃음 지으며 유리엘에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