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
현세귀환록
042. 인연(4)
강민의 말에 최강훈이 고개를 번쩍 들고 강민에게 물었다.
“그, 그럼, 저, 저희 사부님도 치료가 가능하신지요?!”
“안타깝게도 한 원주님은 치료가 불가능하겠구나. 선천진기의 소모가 너무 심해서 더 이상 손댈 수가 없단다. 2년 정도만 빨리 만났어도 다른 방도가 있었을 것인데…….”
한진문의 상태는 그야말로 꺼지기 직전의 촛불이었다. 언제 꺼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을 그간 수련했던 마나가 간신히 붙잡고 있는 실정이었다. 즉, 한진문은 수명이 다한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최강훈의 질문에 한진문 또한 약간의 기대를 품으며 강민을 바라보았으나 어쩔 수 없다는 말에 다시금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양초로 보자면 한수아는 선천진기인 심지는 길게 남아 있는데 그것을 지탱하여 줄 몸통이 거의 없는 것이고, 한진문은 몸통 부분은 많이 남았으나 심지 자체가 거의 다 타서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한수아는 맥만 이어 마나만 보충하면 살 수 있었으나, 한진문은 그것이 불가능하였다. 물론 맥을 잇는 것 자체도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강민은 그것이 가능했다.
“그런데 이 아이를 살리는 대가는 무엇이지요?”
“대가라면……?”
100억에 달하는 금전도 포기를 했고, 천 년의 무공도 거부한 강민에게 한진문이 줄 수 있는 대가는 없었기에 그로서는 강민에게 반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한 사람을 살리는 일이지요. 그 대가는 한 사람의 목숨으로 받겠습니다.”
“제 목숨이라도 드리겠습니다. 은인! 우리 수아를 살려주십시오!”
“한 원주님의 목숨은 이미 경각에 달했으니 제가 받을 목숨은 저기 강훈이로 하지요. 어떠냐, 최강훈. 네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겠느냐!”
강민은 다소 강한 어조로 최강훈에게 물었다.
“어찌 강훈이를…….”
한진문은 딸을 살리고 싶은 마음과 제자를 아끼는 마음이 충돌해서 그런지 무척 혼란스러운 마음인 것 같았다.
하지만 최강훈은 약간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네, 저는 사부님이 살려주신 목숨. 사부님을 위해서라면 내어놓을 수 있습니다. 제 목숨을 받고 수아를 살려주십시오!”
고아로서 한라산을 떠돌던 최강훈이 죽어가는 것을 한진문이 거두어 살린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최강훈이 스스로의 목숨을 버릴 수 있을 만큼 자신을 생각하는 것을 몰랐던 한진문은 눈물을 흘렸고 그제야 마음을 정리하였다.
“강훈아…… 안 된다. 수아가 아무리 중하다 하여도 창창한 네 삶을 포기하게 할 수는 없다! 은인, 사람이 목숨이 필요한 일이라면 수아를 그대로 두십시오. 강훈이를 죽일 수는 없습니다.”
최강훈의 다짐을 받은 강민은 미소를 짓고 말했다.
“누가 강훈이를 죽인다고 했소?”
“예? 아까 목숨을 받겠다고…….”
“목숨을 받겠다는 것은 목숨을 바쳐서 내가 시키는 일을 해줄 사람을 원한 것이오. 목숨을 뺏으려는 것이 아니고.”
“아…….”
최강훈도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수아만 살려주신다면 무슨 일이시든 시키는 일은 다 하겠습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니 걱정 말거라.”
강민은 최강훈이 단지 직원으로서 강서영의 경호원을 하는 것을 넘어, 충심으로 강서영을 지키겠다고 생각하는 진정한 수하가 되기를 원했기에 목숨을 운운하며 최강훈을 시험해 본 것이었다.
“누나를 살려주신다면 저도 뭐든지 다 하겠습니다!”
최강훈의 뜨거운 마음에 한수강 역시 같은 말을 하였지만 강민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는 얼른 커서 너희 누나를 지키는 것이 앞으로 네가 할 일이야.”
“네!”
한수강의 말에 분위기는 다소 완화되었고 강민이 이어서 말했다.
“지금 수아의 상태가 너무 가라앉아 있으니 제가 진기를 활성화 시켜놓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일주일 뒤에 돌아올 테니 그때 치료하는 것으로 하지요. 그때까지는 수아를 그냥 두시면 됩니다.”
단숨에 치료하기에는 지금 한수아의 상태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조차 없는 상태였기에 일주일의 시간을 두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은인.”
강민과 유리엘은 한진문 일행의 인사를 받으며 백록원을 벗어났다.
“민, 개정대법을 펼치려고요?”
“그래, 지금 수아의 상태는 그 방법밖에 없겠어. 일주일간 가라앉은 선천진기를 띄워 활성화시킨 다음에 일거에 몸 전체의 악기를 몰아내고 새 기맥을 뚫어서 강화시켜주면 괜찮아질 것 같아.”
최소 화경, 즉 마스터의 단계에 오르지 못하면 힘든 치료법이었고, 마스터라고 할지라도 치료한 이후에는 상당한 후유증이 남는 치료법이었지만, 강민은 손쉬운 것처럼 이야기하였다.
숙소를 떠나 마물을 만나고 백록원까지 다녀왔지만 아직 해가 뜨려면 시간이 남았다. 밤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하늘을 날던 강민에게 함께 있던 유리엘이 말했다.
“민, 이왕 이렇게 된 것 수영이나 할까요?”
“수영?”
“그래요, 수영. 예전엔 가끔 했는데 여기 와서는 아직 한 번도 못했잖아요.”
사람이 많은 곳을 별로 좋아하지 않은 유리엘이었기에 강민과 유리엘은 종종 아무도 없는 천공의 데이트나 심해의 데이트를 즐기곤 하였다.
그런데 이번 차원에서는 가족과 함께 있고 싶어 하는 강민을 이해하여 둘만의 데이트를 가진 적이 별로 없었다.
유리엘의 말에 강민은 새삼 미안함을 느끼며 유리엘의 제안에 동의하였다.
“그러네, 정말. 앞으로는 종종 하늘도 날고 수영도 해. 이왕이면 공기 좋은 곳이나 물 좋은 곳을 찾아야겠네. 하하하.”
“그래도 제주도 정도면 공기도 물도 괜찮은 편이죠. 호호.”
저기 멀리 보이는 바다까지 직선거리로는 10킬로미터가 조금 넘어 보였는데 강민과 유리엘은 눈 깜짝할 사이 바닷가에 도착했다.
바닷가에 도착한 유리엘은 손가락을 튕겨 자신의 옷을 갈아입으며 강민의 옷 또한 수영복을 바꿨다.
아직 새벽이라 어두워서 일반인들은 아무것도 볼 수 없겠지만 강민의 눈에는 화려한 붉은 색의 비키니가 너무도 잘 보였고, 그 비키니는 유리엘의 폭발적인 몸매와 어우러져 만약 누군가가 보았다면 연예인의 화보 속 한 장면이라고 했을 것이다.
강민 역시 검푸른 빛의 사각 수영팬츠를 입었는데 늘씬한 키에 탄탄한 근육이 잘 드러나는 상체가 뭇 여성들이 보았다면 한참 동안 시선을 돌리지 못했을 것이다.
둘은 한 번의 도약으로 해변에서 1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으로 다이빙하여 거기서부터 수영을 시작했다.
단순한 유흥이었기에 마나를 사용하지 않고 신체의 힘만으로 수영을 하였지만 그리 힘들이지 않아도 웬만한 배보다 빠른 속도로 앞으로 나아갔다.
강민과 유리엘은 해변에서 백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수영을 하며 즐겁게 바닷속 데이트를 즐겼다.
[여기 자연환경이 많이 파괴되었다고 하는데 아직 여기는 괜찮은 것 같네요.]
[그러네. 나도 이곳의 자연이 많이 훼손되었다고 해서 별로 기대 안 했었는데 생각보다 괜찮네.]
제주도의 앞바다는, 아니, 앞바다라 하기엔 많이 나왔지만, 해외 휴양지 광고에서 나오는 깨끗한 바닷물 못지않았다.
바닷속은 다양한 물고기와 산호가 어지럽지만 자연스럽게, 그리고 아름답게 어우러져 있었다.
한참 동안 수영을 즐기던 둘은 바다 수면에 둥둥 떠다니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주위에 인공적인 불빛이 없었기에 검은 하늘 속에서 아득히 반짝이는 별들이 쏟아질 것처럼 눈에 박혔다.
“아름답네요.”
“그러게, 그리고 평화롭네.”
“그렇죠. 평화롭네요, 여기는.”
삶의 터전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이 평화롭다는 말에 동의하기 힘들 것이지만, 전쟁이 일상사인 과거의 차원들에 비해서 이곳은 상당히 평화로운 곳이었다.
물론 중동에서는 아직까지 인종과 종교 등으로 전투가 한창이었고 한반도만 하더라도 휴전 상태이긴 하였지만, 과거에 있던 차원에서 전 대륙이 전화에 휩쓸려 몇백 년씩이나 전쟁이 지속되었던 것에 비하면 여기는 평화로운 곳이 분명하였다.
강민과 유리엘은 이 평화를 위해서라도 과도한 힘을 쓰고 싶지 않았다. 전쟁이 심한 차원에서 모두를 힘으로 억눌러서 전쟁을 억제해 보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강민이 꾸준히 힘을 쓰지 않는다면 그의 힘을 본 한두 세대까지가 평화의 한계였다. 그의 힘을 보지 못한 세대에서는 어느새 강민을 추종하는 무리와 반대하는 무리가 세력을 갖추어 또 전쟁을 시작하였기 때문이었다.
이곳도 각종 전쟁 속에서 간신히 형성된 평화였기에 굳이 강민이 나서서 그것을 깨고 싶지는 않았다.
둘은 수면에 떠서 한참 동안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았는데, 문득 유리엘이 강민에게 물었다.
“어머님과 서영이에게 마나 수련을 시키지는 않을 거예요?”
유리엘의 말에 잠시 생각하던 강민은 나지막이 대답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어. 제대로 된 수련을 하려면 오랫동안 강한 의지를 갖고 힘들게 수련해야 하잖아. 행복하게만 지내도 짧은 삶을 그렇게 고행의 길에 나서게 하고 싶지가 않네……. 물론 필요하다면 어떻게든 시켜야 할 일이지만 우리가 있는데 그것이 필요할까?”
“하긴 그렇죠…….”
강민은 인위적으로 마나를 모아서 마나 수련을 생략하고 한미애와 강서영의 몸에 마나를 주입하여 단전을 형성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단기간이라면 모를까 스스로의 의지 없이 외부의 힘으로 가져온 마나는 언젠가는 파탄을 일으키고 말 것이다.
마나 수련의 핵심은 마나를 통제할 수 있는 의지력을 기르는 것이었다. 그 의지력을 만드는 절차를 생략하고 무작정 마나만 퍼 준다면, 어린아이에게 총을 쥐여주는 것보다 훨씬 위험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통제되지 않는 마나는 주위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기맥까지도 찢어발겨 버리는 주화입마로의 지름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제대로 된 수련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상단전이 열리면서 마나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각성형 능력자는 올바른 수련을 행하지 않고 그 힘에 취해 폭주하여 결국 죽음에 이르는 경우가 많았다.
한미애와 강서영 또한 마찬가지였다. 제대로 된 이능력자가 되려면 그 힘에 걸맞은 수련이 당연히 필요하다. 그런 것 없이 강민이 주는 힘을 받아만 들인다면 결국엔 통제되지 않는 마나가 주변을, 스스로를 해치고 말 것이다.
물론 강민과 유리엘이 옆에서 도와주고 스스로의 의지가 굳건하다면 세상 누구보다 빠르게 수련의 성과를 볼 수 있겠지만, 강민은 굳이 그 힘든 수련을 시킬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더 컸다.
그의 말처럼 가족들의 삶은 유한하였고 행복하게만 살아도 짧은 시간인데 말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집에 있는 마나 집적진으로 깨끗한 마나만 받아들여도 충분히 마나 잠재력은 생길 테고 무병장수할 수 있을 텐데, 굳이 힘든 수련까지 필요하겠어?”
“그래요, 우리가 있는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죠. 특별한 조치 없이 이대로 수명이 될 때까지 둔다면 110살에서 120살 정도까지는 충분히 살 수 있겠죠. 생각해 보니 정말 짧은 시간이네요.”
“그래, 어머니는 앞으로 70년도 채 안 남았고 서영이도 100년도 채 안 남은 짧은 시간이지.”
보통 사람에게는 평생과 같이 긴 시간이었지만 영원한 삶을 가진 둘에게는 찰나와도 같은 짧은 시간이었다. 강민은 그 짧은 행복 동안 굳이 가족들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강민의 집에는 유리엘이 펼친 마나 집적진이 있었기에 대자연의 마나가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강민의 집으로 모여들었고, 그렇게 잠재 마나가 쌓인 한미애와 강서영은 잔병치레 없이 건강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 정도의 마나량을 유니온에선 F급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F급 중에서는 자신이 마나 능력자임을 모르는 경우가 더 많았다.
오랜 시간 동안 운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호흡을 취하다 보면 어느샌가 마나가 호흡에 따라 몸에 쌓이고, 특정 동작을 하면 그 미약한 마나를 움직이기도 하였다.
사실 대부분의 이름난 스포츠 선수들은 이렇게 무의식중에 마나를 움직였고 그로 인하여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불가능해 보이는 동작들을 하곤 하는 것이었다.
E급과 F급의 가장 큰 차이는 마나량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로 마나를 컨트롤할 수 있냐 없냐의 차이였다.
따라서 유니온도 무의식적으로 마나를 쓰는 것뿐이지 일반인과 다름없는 F급의 능력자들은 별도로 유니온 멤버로 등록하지도 않았고, 이능 세계에 대해서 알리지도 않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일반 세계에서 힘을 쓰는 것을 막지도 않았다.
물론 F급 중에서도 성장 가능한 인재라면 유니온에서도 적극적으로 영입하여 가르쳐서 E급으로 만든 후 멤버로 영입하는 경우는 많았다.
결국 유니온이 멤버로 받아들이는 것은 E급 이상이고, 힘에 대한 통제를 하는 것도 E급 이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