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세귀환록-40화 (40/203)

# 40

현세귀환록

040. 인연(2)

웜홀의 발생 장소에는 조선시대에서나 볼만한 도복을 입은 남자 세 명이 있었다. 그들은 40대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 한 명과 20대 청년 한 명, 10대 소년 한 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웜홀이 생성된 지 한참이 지났지만 웜홀 밖으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사실 웜홀이 열린다고 모든 웜홀에서 마물이 출현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처럼 때때로 아무런 마물 없이 잠깐 열렸다가 사라지는 웜홀도 많았다.

시간이 흘러 웜홀이 임계점에 달하여 없어지려고 하자 40대 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이번엔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것 같구나. 새벽에 괜한 헛수고를 했군. 그래도 우리가 이렇게 즉각적으로 대응해야 일반 사람들의 피해를 막을 수 있으니 향후에도 경계석을 확인하는 것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향후라는 부분에서 잠시 망설인 중년인은 말을 끝냈고 나머지 두 남자도 즉각 대답을 하였다.

“네, 사부님.”

“네, 아버지.”

20대의 남자는 사부라 불렀고 10대 남자는 아버지라 불렀으니 그들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 40대 중년인의 판단은 틀렸다.

웜홀이 없어지기 직전 웜홀의 규모에 맞지 않는 강대한 마나를 지닌, 사람 크기의 두 배 정도 되는 마물이 웜홀을 찢고 나타났다.

웜홀의 규모를 보았을 때 절대 C급 이상의 마물이 나타날 수 없는 규모였는데 그 마물은 웜홀이 임계점에 달하는 시점을 노려 웜홀의 경계가 옅어질 때 웜홀을 찢으며 등장했다.

다른 타 차원의 마물과 마찬가지로 마나 충돌로 전신이 파지직 거리는 스파크로 둘러싸여 있었다. 마물은 인간형으로 마나량을 보았을 때 B급은 족히 되어 보였다.

마물은 3미터가 넘는 키와 비늘처럼 보이는 검붉은 피부를 가지고 있었는데 머리에는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되는 작은 뿔이 나와 있어 날개만 달려 있다면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악마의 모양새와 흡사했다.

마물은 흰자 없이 검은자만 번들거리는 눈으로 세 명의 남자를 바라보다 갑자기 입을 열고 괴음을 내질렀다.

“캬악~!”

마물이 내뱉는 소리에 세 명의 남자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는데, 그중 가장 마나가 약해 보이는 10대 소년이 머리를 쥐고 쓰러지고 말았다. 정신파 공격이 섞인 괴음이었던 것이다.

“수강아!”

“강훈이 네가 수강이를 수습하거라. 내가 저 마물을 상대하겠다.”

“사부님!!”

한진문은 한수강이 쓰러지자 최강훈에게 그의 수습을 부탁하고 마물의 앞에 섰다. 마물은 온몸에 튀는 마나 불꽃이 그리 고통스럽지 않았는지, 별로 불편한 기색도 없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진문을 바라보았다.

[민, 저 마물 최소 인간 정도의 지능은 있어 보이는데요?]

[그러게, 게다가 웜홀을 찢고 나온 타이밍을 봤을 때 마나를 느끼는 기감도 상당한 것 같아.]

[마나 충돌이 약한 걸 보니 애초에 마나 성질이 비슷한 차원에서 온 것 같네요.]

[그래, 아니면 마나 성질을 바꿀 수 있는 특수한 능력이라도 있겠지. 저 피부색이 변하는 걸로 봐선 적응력이 뛰어난 마물 같아.]

[어떡할까요? 저대로라면 마물에게 쓰러지고 말 텐데.]

[잠깐 기다려봐, 저 뒤의 아이가 곧 합류할 것 같아. 둘로도 조금 위험할 것 같지만 위험해지면 나서지.]

유리엘의 말처럼 마물이 내뿜는 기세만 보아도 한진문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한진문 역시 그 사실을 파악했는지 선수필승의 자세로 마물이 덤벼들기 전에 먼저 마물에게 덤비며 검격을 펼쳤다.

마나를 잔뜩 머금은 샤이닝 소드를 전개하며 빛나는 검으로 마물의 목을 노렸지만 마물이 팔을 들어 한진문의 검을 막았다.

팡-!

하지만 마물의 팔에서 난 소리는 잘리는 소리가 아니라 무언가에 막힌 소리였다.

마물의 거죽은 한진문의 생각보다 더 질겼던 것이었다. 한진문은 막은 마물의 팔까지 일거에 잘라버리려 하였으나, 검붉은 피부가 은은히 빛을 내며 마나까지 띄고 있어 그의 검은 마물의 거죽에 약간의 붉은 기운만을 남긴 채 튕겨 나갔다.

공격에 실패한 한진문이 뒤로 물러나며 다시 자세를 잡으려고 하였지만 마물의 움직임은 그것보다 빨랐다.

한진문이 자리 잡기도 전에 마나를 머금은 마물의 검붉은 팔이 한진문이 있는 곳으로 떨어졌다.

그는 처음보다는 약간 기세가 떨어져 있었지만 아직 충분한 마나가 남아 있는 샤이닝 소드로 마물의 팔을 빗겨내 피하려 하였다. 하지만 마물의 팔에 담긴 역도는 한진문이 빗겨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쾅!

굉음과 함께 한진문은 마물의 팔을 빗겨내지 못하고 정통으로 막아냈다. 마물의 팔에 실린 마나 역시 상당하였는지 한진문은 검은빛을 잃어가고 있었으며, 그의 입가에도 한줄기 피가 흘러 내상을 입었음을 가늠케 하였다.

한진문의 기세가 떨어짐을 느낀 마물은 한 번 더 팔을 들어 한진문을 끝장내려고 하였다. 이때 뒤에서 한수강을 돌보던 최강훈이 역시 샤이닝 소드를 빛내며 마물에게 덤벼들었다.

최강훈의 샤이닝 소드는 한진문의 것 못지않았다. 아니, 그의 검을 막은 마물의 팔이 약간 갈라진 것을 보아 오히려 그 절삭력이 한진문의 샤이닝 소드보다 더 높아 보였다.

푸쉬쉭-

최강훈의 검격에 갈라진 마물의 팔에서는 검은 피가 나왔는데 독성이 있는지 바닥에 떨어지며 아래의 잡초를 태웠다.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 마물은 내상을 입은 한진문은 두고 아까보다 더 빠른 움직임으로 최강훈의 왼쪽을 노리며 오른팔을 휘둘렀다.

샤악-

한진문과는 다르게 최강훈은 마물의 팔을 가까스로 빗겨내 막았다. 그 절삭력 또한 남아 있었기에 마물의 팔은 최강훈의 검을 지나며 더 많은 출혈을 일으켰다.

하지만 마물의 힘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공격이 실패하여 분노한 마물의 검은 눈에서 검붉은 기운이 줄기줄기 뻗어져 나오며 한층 더 강한 기세가 느껴졌다.

안 그래도 자신보다 강한 기세가 느껴졌었는데 거기에서 한층 더 강해지는 마물의 기운에 최강훈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피한다면 아직 내상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는 사부와 정신도 차리지 못하고 있는 한수강이 마물의 먹잇감이 되고 말 것이었다.

마물의 기세가 올라가는 것을 느낀 한진문 역시 애써 다스리던 내상의 기운을 무릅쓰고 다시금 자세를 잡고 최강훈 옆에 섰다.

그때 쓰러질 것 같은 정신을 가까스로 부여잡고 있는 그들에게 한줄기 빛이 내렸다.

“여기까지.”

강민이 투명화를 풀고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강민의 등장에 한진문과 최강훈은 한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강민이 의도적으로 뿜어내는 존재감이 마물의 존재감을 눌러버렸기 때문이었다.

족히 B급은 되어 보이는 마물의 존재감을 지울 정도라면 A급 이상의 강자임에 분명했다.

같이 나타난 유리엘은 쓰러진 한수강의 마나를 안정시켜 정신을 차리게 하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수강의 정신을 차리게 한 것을 본 한진문은 내상을 입은 몸에도 불구하고 정중히 인사를 하였다.

“일단 저놈부터 처리하고 말씀 나누지요.”

강민의 등장에 마물은 검은 눈을 굴리며 빠져나갈 틈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강민이 내뿜는 기세를 느끼고 자신의 힘보다 강함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이었다.

마물의 적응력이 무척이나 뛰어났는지 어느새 마나 충돌에 따른 스파크는 미약해졌고 곧 안정기에 들어설 것만 같았다.

그렇기에 이대로 도망친다면 유니온의 수호대가 출동할 때까지 일반인들이 엄청난 피해를 입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마물에게 그런 기회는 없었다. 강민이 의도적으로 도망갈 길에 기세를 돋워 도망치는 것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마물은 강민을 처리하지 않고서는 자리를 벗어날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강대한 마나를 두른 팔로 강민을 내려쳤다.

쾅!

굉음과 함께 먼지가 일었지만 마물의 팔은 강민의 머리 1미터 정도 위 허공에서 가로막혔다.

쾅쾅쾅쾅!

마물은 강민의 호신막을 마나를 두른 팔과 다리로 수차례 가격했다. 하지만 당연히 그의 팔다리는 강민의 호신막을 뚫지 못했고, 시간이 갈수록 가격하는 강도가 약해져 갔다.

“더 이상 볼 필요가 없겠군.”

나지막이 중얼거린 강민은 가볍게 손을 휘둘러 마물의 팔과 다리를 끊어냈다.

화기를 머금은 공격이었기에 팔다리가 끊어졌음에도 아까와 같은 독성이 있는 피는 흐르지 않았다. 공격하는 순간 접촉면을 태워 버렸기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팔과 다리를 잃은 몸뚱이만 남은 마물은 바닥에 쓰러졌고, 잘린 팔다리는 아직 기운이 남아 있는지 움찔거리고 있었다.

강민이 일격에 마물을 죽이지 않고 이런 번거로운 일을 한 것은 알아볼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민은 배가 바닥에 닿아 있는 마물의 등에 올라가서 두부를 가르듯 손쉽게 마물의 등에 손을 넣었다.

쿠에에에엑!

팔다리가 잘릴 때는 순식간에 잘린 것이라 고통을 느낄 새도 없어서 그랬는지 비명을 지르지 않았지만, 강민의 손이 등에 파고들 때는 엄청난 괴성을 질렀다.

하지만 강민은 그 괴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먹 크기만 한 붉은 색 돌을 마물의 등 가운데에서 꺼냈다.

붉은 돌이 꺼내진 마물은 아까보다 더 격렬히 버둥거렸는데, 어느새 거의 잦아들었던 마나 불꽃이 처음 웜홀에서 나올 때보다 더 격렬하게 튀었다.

아마 붉은색 돌이 빠져나오면서 마물의 검붉었던 피부색이 검게 변하는 것과 관계가 있는 것 같았다.

마물의 몸에서 나온 붉은 돌 역시 격렬한 마나 불꽃을 내며 빛나더니 어느새 원래 크기의 반의반 정도의 작은 검은 돌로 변했다.

강민이 너무도 손쉽게 마물을 처리하는 모습을 본 한진문 일행은 경악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A급의 능력자라 하더라도 저렇게 허수아비에 칼질하듯 쉽사리 마물을 처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랬기에 한진문 일행은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마물을 처리하고 검은 돌을 쥐고 있는 강민에게 어느새 유리엘이 다가와서 말을 건넸다.

“역시 제대로 된 마나 변환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카멜레온 같은 표피만 이곳의 마나에 적응했던 것이네요.”

“그래, 마나 코어가 그대로 타 버리는 것을 봐선 그런 것 같네. 대신 이놈이 썼던 방법을 이용하면 다음 이동 때는 몸을 숨겨서 신체를 재구성할 필요가 없겠는데?”

강민이 괴물의 공격을 그대로 받고 있었던 것은 마물이 이곳의 마나에 적응했던 방식을 알아보려 한 것이었고, 나름 성과가 있었다.

강민의 말에 유리엘 역시 동의했다.

“음……. 그렇겠네요. 외부 파장만 그곳의 마나와 성질을 동일하게 변화시키고, 점차적으로 내부의 마나와 신체를 그곳의 마나에 적응시키면 될 테니 말이에요. 그치만 이 방법이면 순간적으로 강한 힘을 내기는 힘들 것 같은데요?”

“그렇긴 하겠지, 아무래도 내부 마나는 그쪽 마나와 적응시켜 변환하는데 전력을 해야 할 테니. 그래도 손실을 조금 감안한다면 순간적인 마스터급의 무위는 충분히 낼 수 있을 것 같아.”

“좀 무리하면 검강도 뽑아낼 수 있을 테지만, 마법 쪽으로는 4서클도 힘들 것 같아요.”

“하긴, 마법은 외부 마나에 간섭해야 하니……”

“쿨럭쿨럭.”

한진문은 강민과 유리엘의 진지한 대화에 내상도 참고 있었으나 결국 피를 동반한 기침을 하였다.

이미 마물의 움직임도 멈추었기에 강민은 마물의 움직임을 제압한 마나를 풀고 한진문에게 다가갔다.

“쿠, 쿨럭. 죄, 죄송합니다. 내상에 기침을 참을 수가 없었네요. 두 분의 대화를 방해했습니다.”

“아닙니다. 먼저 부상자를 돌보았어야 했는데 저희 불찰입니다.”

“쿨럭.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분명 C급 이상의 마물이 나올 웜홀의 규모가 아니었는데 B급이라니……. 최근 들어 상급 마물의 출현이 잦아졌군요.”

보통 A, B급의 마물을 상급 마물, C, D급의 마물을 중급 마물, E, F급의 마물을 하급 마물로 분류하고 있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아, 네. 이 정도 내상은 금방 회복하지요.”

애써 밝은 모습을 보이는 한진문에게 강민이 다시 물었다.

“아니, 방금 입은 내상 이야기가 아니라 원래 몸 상태 말입니다. 지금 기맥이 엉킨 지 상당히 오래된 것 같은데…… 이렇게 마나를 쓰면서 움직이시는 것 자체가 대단하시군요.”

“어, 어떻게 그 사실을…….”

한진문은 강민이 한눈에 자신의 상태를 알아본 것에 놀라며 말했다.

가까이서 살펴본 한진문의 기맥은 엉킬 대로 엉켜서 어떻게 마나를 발현하는지조차 의문스러운 상황이었다.

또한 엉킨 기맥으로 마나를 발현한다고 선천진기까지 자주 사용했던 건지, 생명의 불꽃이 언제 꺼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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