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
현세귀환록
035. 총회(4)
“강민 회장이신가? 현승의 유현승이라 하네.”
강민에게 존댓말을 쓰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유현승은 자연스럽게 하대를 하며 손을 내밀었다. 이에 강민은 유현승의 손을 쥐어 악수하며 인사를 하였다.
“반갑습니다, KM의 강민이라고 합니다.”
“요즘 강 회장 때문에 우리나라 경제계가 시끌시끌 하구만.”
“그래 봤자 재계 서열 10위 안에도 못 드는 규모입니다. 현승이 아직 시끄럽다 느낄 규모는 아니지 않겠습니까? 앞으로는 모르겠지만.”
“앞으로는 모른다? 허, 강 회장 배포가 대단하구먼.”
“배포랄게 뭐 있겠습니까? 그냥 돈을 놀리는 것보다 움직여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 좋지 않겠습니까?”
“허허. 나라까지 생각한다니 애국자시오, 애국자.”
유현승 회장은 잠시 강민을 바라보다 눈을 빛내며 무언가를 물으려 하였지만, 또 다른 노인의 출현으로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유 회장, 먼저 와 있었구만.”
“백 회장님 오셨습니까?”
비췻빛이 도는 흰색의 도포를 입은 백산그룹의 회장 백무산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었다.
알려진 바로는 백무산 회장이 유현승 회장보다 3살 많다고 했는데, 지금 모습을 보니 백무산 회장은 유현승 회장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유현승 회장은 70대 노인이라 하기엔 건강한 모습이었는데도 백무산 회장은 그보다 더 젊어 보여 60대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강민과 유현승이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 온 백무산은 바로 강민에게 인사를 하였다.
“강 회장, 난 백산의 백무산이요. 이름은 많이 들었소. 우리 지호와도 아는 사이라며? 지호 놈이 강 회장 이야기를 많이 하더군.”
“KM의 강민입니다. 지호가 제 이야기할 게 별로 없었을 텐데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궁금하네요. 혹시 헛소문을 퍼뜨린 거라면 제가 혼내줘야겠습니다.”
“허허허, 아닐세. 좋은 말만 했다네. 이러다가 우리 손주가 강 회장에게 혼쭐이 나겠구만. 허허.”
강민과 한창 대화를 하다 백무산의 등장에 대화의 주도권을 놓친 유현승의 인상이 조금 찌푸려졌다.
항상 이런 식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우리나라 2위의 큰 기업을 갖고 있어도 현승은 2위였다. 1위인 백산 앞에서는 회사도 자신도 이름을 내세우기 힘들었다.
그래서 피땀을 흘려가며 노력하고 노력했지만 백산의 벽은 높았다. 아직도 현승은 만년 2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보는 눈이 많았기에 강민과 백무산의 대화에서 중요한 이야기는 오가지 않았다.
백무산은 대화의 흐름에 유현승도 끼어 넣는 유려한 화술로 대화를 이어갔고, 유현승 역시 내심을 감추고 응하여 대화의 분위기는 좋았다.
어느새 총회의 시간이 되어 사회자가 회원들의 착석을 부탁하였다. 그에 백무산은 강민에게 마지막 말을 던지고 자신의 자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중에 만찬장에서 보세.”
총회는 큰 이슈 없이 진행되었다.
새로이 재계 30위권에 든 KM그룹의 회장단 참가 문제가 잠시 나오기는 했지만, 강민이 아직 신생 기업이라는 이유로 정중히 거부를 표명했고 다들 그에 동의했는지 다른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회장단 회의에서 나온 ‘정부에 요구해야 할 사항’ 몇 가지를 의결하고 총회는 마무리되었다.
* * *
만찬장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자리하고 있었다.
시간 차로 사람들이 들어왔지만 식사를 할 수 있는 원형 테이블과 서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홀이 거리를 두고 분리되어 있어 그리 번잡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총회를 마치고 만찬장에 들어온 강민은 자연스럽게 유리엘을 찾아갔다.
“민, 왔어요?”
“그래, 별일 없었지?”
그때까지 백지호는 유리엘과 강서영의 옆에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강민에게 인사를 했다.
“민이 형, 오랜만이에요.”
“그래, 너도 총회로 오는 줄 알았는데 여기 있었어?”
“할아버지하고 아버지께서 가시는데 저까지 갈 이유가 없지요. 그리고 아직 아무런 직함도 없는 학생인데 거기 가는 건 주제넘기도 하고요.”
백산그룹의 손자가 총회장에 온다고 해도 말리는 사람은 없었을 테지만 백지호는 그건 아직 주제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백무산 일행도 강민이 있는 자리로 다가왔다. 강민 때문이라기보다는 아마 백지호 때문에 이리로 온 것 같았다.
“지호야, 여기 있었냐.”
“네, 할아버지. 아, 여기가 KM그룹의 강민 회장이에요.”
“알고 있다. 아까 총회장에서 인사를 나눴지.”
“아, 그러셨어요? 그럼 아버지도?”
백지호의 말에 백무산 옆에 서 있던 40대로 보이는 중년인이 한걸음 나서서 이야기했다.
“강 회장님, 아까는 인사를 못 했네요. 백산의 백진일이라고 합니다. 여기 지호의 아비 되지요.”
“아, 반갑습니다. KM의 강민이라고 합니다.”
여태껏 과묵하게 백무산 옆에만 있어 수행원 정도로 생각했던 남성은 놀랍게도 백무산의 아들이자 백지호의 아버지로 현재 백산그룹을 실질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백산의 부회장 백진일이었다.
사실 백지호의 나이를 생각하면 백진일은 50대는 족히 되었을 것이기에,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40대로 보이는 그가 백지호의 아버지라고 생각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여튼 잘되었군. 강 회장, 아까는 사람이 많아서 이야기를 제대로 나누지 못했는데 이야기 좀 해봄세.”
백무산이 아까 총회장에서 못한 이야기를 이어가려고 하였다.
“그러시지요.”
“내 우선 하나만 먼저 물어보고 싶네. 강 회장은 어떤 목적으로 사업을 하는 건가?”
“목적이라……. 백 회장님은 어떤 목적으로 사업을 하시는 겁니까?”
“그래, 나부터 이야기하는 것이 맞겠지. 나는 나라를 돕기 위해서 사업을 한다네. 우리 백산이 힘을 가지면 가질수록 우리 대한민국 역시 힘을 가질 것이야. 그래서 사업을 시작했네.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는 아픈 역사가 있지 않나. 우리가 좀 더 힘이 있었다면 그런 아픈 역사는 없었을 것이야.”
테이블 위의 물을 한 잔 마시며 목을 축인 백무산은 말을 이었다.
“일개 기업인이 국가 운운하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의 힘은 생각보다 크다네. 할 수 있는 일이 많아. 나는 그 힘을 나라를 위해서 쓰고 싶다네.”
그렇게 말을 하는 백무산의 눈빛은 단호하고 분명했다. 그는 다시 강민을 향해 물었다.
“자네는 어떤가? 어떤 목적으로 사업을 하는 건가?”
백무산은 확실한 가치관을 가진 사업가였다. 사업보국의 가치를 갖고 사업을 하는 민족주의자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강민이 뜻을 같이할 수 있는 동지인가 묻는 것이었다. 옆에 있는 장태산은 백무산의 말을 듣고 뱃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하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백무산의 빛나는 눈을 본 강민은 천천히 백무산에게 대답했다.
“백 회장님의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사업보국이라, 정말 좋은 사업관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과는 다르네요.”
“자네 역시 그냥 그런 장사치와 다르지 않은 것인가? 이익이라면 나라가 어떻게 되어도 상관이 없는 그런 장사치 말일세!”
강민의 말에 백무산이 다소 언성을 높이면서 말하자 장태성이 나서서 해명하려 하였다. 하지만 그런 장태성을 강민이 손을 들어 막았다.
“평범하게 살고 싶었던 제가 기업을 하게 된 이유는, 이 사회에서 힘을 갖고 싶어서입니다. 회장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의 힘은 크지요. 그것을 보이면 그만큼 대우를 받고요.”
“그럼 그 힘을 자네 마음대로 휘두르기 위해서 사업을 시작했다는 건가?”
“힘을 마음대로 휘두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런 힘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라고 하는 것이 맞는 말이겠지요. 다만,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저는 회장님처럼 거창한 마음은 아니지만 제 이름을 건 사업에서 제 사리사욕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지탄받을 일은 없을 것입니다.“
장태성은 강민이 세운 KM그룹이 지향하는 바를 자세히 말하고 싶었지만 강민이 저렇게 말하고 있었기에 더 이상 말을 덧붙이기 힘들었다.
백무산과 좀 더 이야기를 나눈 강민은 그의 사상과 사고방식을 다소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가 원하는 사업 방식은 강민의 방식과는 맞지 않는 방식이었다.
강민은 '존경받는 회사’가 되기 위하여 다른 사람에게 지탄받을 행위는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로 인하여 다소 수익성이 떨어지더라도 신경 쓰지 않을 재산이 있었기에 단지 그 목적만 충실히 이행할 생각이었다.
반면 백무산의 생각은 국가에 도움이 되는 행동이라면 다소간의 편법도 용인하며, 국민이나 노동자들이 조금 힘들더라도 그것을 추진해야 한다는 주의였다.
국민이나 노동자들도 국가의 일원이니 국가를 위해서 희생해야 한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좋게 말하면 애국이지만, 개개인의 가치와 권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현재의 트렌드와는 거리가 있는 사상이었다.
그의 생각대로라면 일을 추진함에 있어 설령 회사가 힘들더라도 국가에 도움이 된다면 그것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회사의 존재가 국가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에 회사를 크게 해치는 행위는 하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강민과의 대화를 이어가며 확실히 단순한 장사치와는 다르다는 것을 느낀 백무산은 약간 힘이 빠진 말투로 한 가지 질문을 하였다.
“자네를 오늘 처음 보았지만 자네 눈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네. 자네의 눈빛은 내 형님의 눈빛과 너무 닮았어……. 하나만 더 물어보겠네. 혹시 자네도 순리를 따르는 자인가?”
“순리를 따르는 자가 어떤 사람을 지칭하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순리를 따르지 않습니다. 저는 제자신을 믿고 제가 생각한 바를 행할 뿐입니다.”
대화를 통하여 서로간의 차이를 알게 된 백무산은 다소 실망한 표정으로 만찬장을 떠나갔다. 아마 자신의 이상과는 차이가 있는 강민에 대한 실망이었으리라.
하지만 그를 따르는 백진일은 강민에게 은밀히 명함을 주며 별도로 연락하겠다는 말을 남긴 후 백무산을 따라 만찬장을 벗어났다.
* * *
몇 달 전 폭발 사고가 있은 직후부터 한국대학교 자유 전공 학부가 있던 건물은 몇 개월째 사람의 출입이 극히 적어진 건물이 되었다.
사고 직후 한 달 정도는 사고 원인 조사를 위해서 건물을 폐쇄했었는데, 조사 결과 원인을 알 수 없다고 결론이 났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어떤 문제점도 발견되지 않았고 현재는 수리 또한 끝났지만 그날의 기억 때문인지 자유 전공 학생들도 자유 전공 학부 건물에 잘 출입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건물에서 수업도 없었기에 문제는 없었지만 잘 지어진 건물이 말 그대로 놀고 있어 다른 학생이 본다면 아깝다는 생각을 할 만하였다.
사실 폭발사고로 인한 건물 피해는 큰 것도 아니었다. 연회장 별실 거실의 전면 유리창이 파손되었고, 거실 안의 집기류가 파손된 정도였다.
폭발 사고로 인하여 목숨을 잃는 큰 사고가 일어난 것도 아니지만, 일광저축은행 사주의 아들인 이형태가 오른손을 크게 다쳐서 아직도 회복할 수 없었다는 점이 사고를 크게 인식하게 된 원인이었다.
지금은 깨끗하게 치워진 사고현장에서 검은 정장을 입은 50대 중년인이 흰색 정장을 입은 동년배의 중년인에게 한탄하듯 말을 건넸다.
“이 회장, 정녕 이대로 넘어갈 건가?”
“그럴 수는 없지. 우리 형태는 오른손까지 병신이 되었어! 그것만 해도 속에서 천불이 나. 아직도 머리가 아프다고 바닥을 뒹구는데 이걸 어떻게 그냥 넘어가겠나! 유명하다는 병원은 다 돌아다녀 봤는데 이상은 없다 하고, 지금은 머리 아프다고 벽에 계속 머리를 처박아서 병원에 사지를 결박해 묶고 놓고 있다네.”
“형태는 아직도 그 정도인가? 우리 창민이도 머리 아프다는 이야기를 하긴 하는데 지금은 그 정도까진 아닌데…….”
“창민이 상태는 지금 어떤가?”
이형태의 아버지 이일광이 김창민의 아버지 김도관에게 되물었다.
“창민이도 처음엔 한 시간에 서너 번 정도씩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바닥을 뒹굴었는데 최근엔 많이 나아져서 하루에 서너 번 정도로 많이 줄었다네.”
둘의 대화를 볼 때 김창민은 강민이 건 술법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하며 마음을 고쳐먹고 있는 것 같았지만 이형태는 개선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일광이나 김도관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래? 대체 이유가 뭐지……. 창민이는 별말 없던가?”
“창민이 말로는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더군. 악한 마음을 먹으면 안 된다고. 창민이는 명상 책 같은 걸 많이 보던데, 형태도 그런 책을 한번 보는 게 어떻겠나?”
“마음을 다스려? 악한 마음?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린지. 그리고 그놈이 책 같은 걸 읽을 놈도 아니고……. 최근에는 눈까지 빨갛게 달아올라서 내 그 녀석만 보면 가슴이 미어진다네.”
폭력 조직인 일광회를 이끌고 있는 이일광은 다른 사람들 눈에 피눈물을 나게 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세상은 약육강식의 정글이라고 생각했기에 한 번도 뉘우친 적이 없었다. 약자가 강자에게 먹히는 것은 당연하다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자식이 이유도 모르고 그런 처지가 되자, 이제야 하늘이 벌을 내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아직 개과천선까지 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 당장에라도 그렇게 만든 놈을 찾으면 갈가리 찢어 죽여 버리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