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세귀환록-34화 (34/203)

# 34

현세귀환록

034. 총회(3)

그때 강서영의 휴대폰이 징징대며 진동을 울렸다. 강서영이 휴대폰을 바라보니 저장은 되어 있지 않았지만 익숙한 번호가 보였다.

“하~ 또 전화 왔네.”

“서영아, 누군데 그래?”

강서영의 보기 드문 모습에 유리엘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 별거 아니에요. 전 남친 어머니예요. 헤어지라고 할 때는 언제고 우리 오빠 소식 들었는지 다시 만나면 안 되겠냐고 계속 전화 오네요. 어른을 그냥 차단하기가 좀 그래서 몇 번 받았는데 이젠 그냥 차단해야겠어요. 더 이상 이상한 소리 듣고 싶지 않아요.”

“그래, 왜 그런 전화를 받고 있어. 바로 차단해 버려.”

“네, 언니. 그래야겠어요.”

옆에서 가만히 유리엘과 강서영의 대화를 듣고 상황을 파악한 백지호는 눈을 빛내더니 강서영에게 제안했다.

“서영아 내가 해결해 줄까? 차단해서 전화 안 받으면 혹시 학교나 집으로 찾아올 수도 있잖아. 뭐 경호원은 있겠지만 일단 마주치면 기분 안 좋을 거잖아.”

“아, 그 아주머니라면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근데 선배가 어떻게 해결해 주신다는 거예요?”

“선배 아니고 오빠라고 오빠. 하하. 휴대폰 줘봐.”

한수찬의 모친 김영희는 한번 전 화를 들면 안내 메시지가 나올 때까지 계속 끊지 않았기에 아직까지도 강서영의 전화가 울리고 있었다.

강서영의 전화기를 건네받은 백지호는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서영이니?

김영희는 이제 아예 말을 놓고 강서영을 불렀다. 본인 딴에는 친근감의 표현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강서영은 끝난 인연을 억지로 붙잡으려 하는 김영희에게 더 큰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김영희의 응답에 백지호는 곧바로 대답했다.

“서영이 남자 친구입니다. 서영이한테 이야기 들었는데 더 이상 이런 전화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백지호의 말에 강서영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는데, 백지호는 강서영을 바라보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남자 친구? 야! 너 누구야? 서영이는 우리 수찬이 여자친구야! 당장 서영이 바꿔!

“아주머니 흥분하신 것 같은데, 계속 이렇게 전화하시면 저희 회사 변호사를 통해서 법적으로 대응할 수도 있습니다.”

-사내변호사? 네가 누구길래 사내변호사 운운하는 거야?!

“제 할아버지가 백산그룹을 운영하고 계시죠.”

-백산? 백산이건 흑산이건 서영이나 바꿔! 아, 그 백산그룹?! 거, 거짓말하지 마! 배, 배, 백산은 무, 무슨…….

김영희는 당황했는지 말도 더듬으며 말했다.

“거짓말인지 아닌지는 계속 전화 해 보시면 아시게 될 겁니다. 농담 아닙니다. 저 백산그룹의 후계자 백지호의 이름을 걸고 꼭 법적으로 처벌받게 해드릴 겁니다. 아마 못 믿으시겠죠? 제가 그룹 본사 비서실에 이 이야기 꼭 해놓을 테니 그쪽으로 전화해서 확인해 보십시오.”

-저, 저기 미안해요……. 아, 앞으로는 저, 전화 안 할게요. 그, 그만 끊어요.

백지호의 단호한 말에 김영희는 긴가민가했지만 만에 하나 백산그룹의 손자일까 싶어서 당황하며 전화를 끊었다.

백지호는 아직 모르고 있지만 한수찬 아버지가 운영하는 회사가 백산그룹 계열사의 하청 업체였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백지호가 악의적인 대응을 한다면 그야말로 밥줄이 끊길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김영희는 법보다 그것이 더 무서웠던 것이었다.

김영희와의 통화를 끝낸 백지호는 강서영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그러곤 무언가 말을 하려는 강서영에게 잠시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그러고는 자신의 휴대폰으로 그룹 비서실에 전화를 걸었다.

“실장님, 지호예요. 부탁 하나만 드릴게요. 혹시 어떤 아주머니한테 전화 와서 제 여자친구가 강서영이 맞냐고 하면 맞다고 해주세요.”

-네? 여자 친구 생기신 겁니까? 그리고 일반인에게 공개해도 되는 사항입니까?

“진짜 사귀는 건 아니구요. 이 친구가 좀 곤란한 상황이라 도와주려고 그럽니다.”

-아, 네. 그러시군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부회장님이나 회장님께서는 아시는 내용입니까?

“아니에요, 굳이 말씀드릴 사안은 아닌 것 같네요.”

-알겠습니다. 별도 보고는 올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실장님.”

백지호가 백산의 비서실장과 통화까지 끝내자 강서영은 고마움을 머금은 눈빛으로 감사의 인사를 하였다.

“선배, 아, 아니, 오빠 고마워요. 이렇게까지 했으니 그 아주머니한테 더 이상 연락 안 오겠네요. 헤헷.”

“그래? 근데 고맙다면서 맨입으로 넘어갈 거야?”

“네?”

“고마우면 밥 사, 하하.”

“헐, 무슨 재벌 3세가 일반인에게 밥을 사라고 해요. 선배 좀 너무하네요, 흥.”

“그렇게 되나? 근데 서영이 너도 일반인? 일반인이라는 말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여튼 일반인이라 하긴 좀 그렇지 않아? 우리나라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부자 오빠를 두고 있잖아.”

“그, 그건…….”

“혹시…… 민이 형이 용돈 충분히 안 주는 거야?”

“아니에요! 오빠는 저 쓰라고 카드까지…… 앗!”

강서영의 말에 백지호가 싱글거리며 웃는 것을 보고 강서영은 당했다는 표정으로 백지호를 바라보았고 백지호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시선이 있었다. 이아현이었다.

만찬장에 도착하자마자 백지호가 있는 것을 알아차린 이아현은 백지호가 자신을 알아보고 다가와 주길 바랐다.

하지만 백지호는 유리엘, 강서영과 이야기를 한다고 주위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이아현이 만찬장에 들어온 지 한참이 지났음에도 백지호는 아직까지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그리 멀지 않은 가까운 거리라 백지호가 잠시 고개만 돌려 주위를 살폈다면 자신이 있는 것을 충분히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강서영과의 대화에 집중한 백지호는 그러지 않았다.

이아현은 그동안 숨겨뒀던 질투심이 불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뭐야? 저 김유리인가 하는 여자는 KM그룹 강민 회장의 부인이라고 했잖아. 그런데 또 저 여자야? 오빠가 유부녀인 걸 알고도 계속 그러진 않을 텐데…….’

처음에는 유리엘과 함께 있는 백지호의 모습에 이아현은 백지호가 유리엘을 알고도 포기하지 못한 줄 알았다. 하지만 한참 동안 그들의 모습을 살펴보던 이아현은 그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음, 아냐. 저 여자가 아니네. 이번엔 강서영인가 하는 애구나…….’

일전에 조사를 통해서 강민의 가족 관계를 먼저 알고 있었던 이아현은 강서영의 얼굴 역시 알고 있었다.

좋아하는 남자에 대한 여자의 촉은 대단한 것이었다. 백지호가 강서영을 생각하는 것은 아직 좋아한다는 단계까지도 가기 전의 단순 호감의 단계였지만 이아현은 백지호의 관심이 강서영에 있다는 것을 단번에 눈치챘다.

그들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더 이상 볼 수 없었던 이아현은 자존심을 잠시 접고 먼저 백지호에게 크게 인사하며 다가갔다.

“오빠! 먼저 와 있었네?”

“아, 아현아. 너도 온 거야? 너 이런 자리 잘 안 나왔잖아.”

“맞아, 근데 이번엔 다들 가족 동반으로 많이 온다고 해서 나도 할아버지께 말씀드렸지. 호호호.”

사실 이아현은 백지호가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온 것이지만 그렇게까지 말하기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이아현과 잠시 인사를 나눈 백지호는 유리엘과 강서영에게 이아현을 소개했다.

“다들 처음 보죠? 무슨 그룹 손자 손녀 이렇게 소개하는 건 개인적으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일단 다들 그렇게 소개하니…….”

백지호는 소개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자리가 자리인지라 어쩔 수 없었다.

“여기는 SKY그룹의 손녀 이아현 양이구요. 이쪽은 이번에 이슈가 된 KM그룹의 사모님 김유리 님과 회장님 동생 강서영 양이야.”

“안녕하세요, 이아현입니다.”

유리엘은 한쪽 옆에서 자신의 일행을 바라보며 감정의 기복을 일으키던 이아현의 존재를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 인사를 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김유리예요.”

“안녕하세요, 강서영이라고 합니다.”

부드럽게 목례만 하는 유리엘과 달리 강서영은 고개를 푹 숙이며 인사를 했고, 백지호는 그런 모습에 웃음기 띤 목소리로 말했다.

“서영아, 다들 비슷한 또래인데 그렇게까지 고개 안 숙여도 돼. 하하하.”

“그, 그래도…….”

백지호가 강서영을 부드럽게 바라보며 대화를 하는 것을 느낀 이아현은 그 분위기를 끊으며 백지호에게 말을 걸었다.

“오빠, 왜 그간 연락 없었어. 그날 밥 먹고 나서 자주 연락하기로 했었잖아.”

“아, 그랬지. 근데 이것저것 하다 보니 좀 바빠서. 미안, 하하.”

“미안하다 했으니 다음 주말에 밥 사줘.”

“다음 주말? 요즘 하는 일이 있어서 당장 다음 주는 좀 곤란하고, 나중에 일정보고 다시 연락줄게.”

“이번엔 꼭 연락줘야 해~! 아, 맞다. 그런데 요즘엔 운동 잘 안 해? 피트니스 센터도 가입해 놓고 잘 안 나오는 거 같던데.”

“아, 그건 말이지…….”

이아현은 백지호와 친하다는 것을 강조하듯 예전의 이야기를 꺼내며 백지호와의 대화를 이어갔고, 백지호는 이아현의 말을 받아주면서도 유리엘과 강서영의 기분을 살폈다.

초면인 사람이 같이 있는 상황에서 그 사람들이 모르는 옛날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백지호는 대화의 주제를 계속 바꾸려 했지만 이아현은 끊임없이 옛일을 꺼내며 대화를 이어갔다.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었던 백지호는 이아현의 말을 끊고 양해를 구했다.

“아현아, 유리 누나랑 서영이는 오늘 이런 자리가 처음이라서 내가 좀 돌면서 사람들 소개해 주려고 하는데 넌 저기 친구들하고 있는 게 어떻겠니? 보니까 아까부터 너 기다리는 것 같던데.”

이아현이 다가온 뒤부터 한쪽 옆에서 두 명의 여성이 이아현을 기다리고 있던 것을 알아차린 백지호는 자연스럽게 그들을 말하며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오빠 동생으로 지내기로 하긴 했지만, 아직도 자신을 좋아하는 분위기를 풀풀 풍기는 이아현이었다. 백지호로서는 이아현을 대하는 것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전에 호감을 느꼈던 유리엘과 지금 새롭게 호감을 느낀 강서영과 함께 있었기에 그녀들과 더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마음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이아현은 백지호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그녀를 피하려 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기에 자존심상 더 이상 이야기를 끌면서 잡을 수 없었다.

다만 아랫입술을 깨물며 그들이 자리를 옮기는 뒷모습을 노려 볼 뿐이었다.

* * *

“회장님, 이쪽입니다.”

장태성 실장은 강민을 총회장으로 인도하였다. 장태성은 과거 태성그룹의 회장이었을 때 종종 왔던 이 자리에 다시 오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런 장태성의 분위기를 눈치채고 강민이 말했다.

“실장님, 기분이 묘하신가 봅니다.”

“네, 그렇네요. 태성이 그렇게 무너지고 난 뒤로 제가 다시 이 자리에 올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못 했는데 말이죠.”

물론 회장으로 오는 것과 기획실장으로 수행차 오는 것은 천지 차이였지만 KM그룹에서 장태성의 위치는 단순한 기획실장의 범주를 넘어서는 역할이었기에 장태성은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보통 한경련의 총회에는 500여 개의 회원사 중 60% 정도 규모인 300여 회원사 정도가 참여했다. 그중 재계 서열 30위 그룹 이상에 해당하는 회원사 중 추천을 받아 회장단을 구성하는데 이 회장단이 한경련의 핵심이라 할 수 있었다.

오늘도 재계 30위 안의 그룹 회장들을 위하여 별도 좌석이 마련되어 있었고, 장태성은 자연스럽게 그 자지로 강민을 인도하였다.

그곳에는 예닐곱 명이 앉을 수 있는 원형의 테이블이 다섯 개 정도 마련되어 있었는데, 테이블 위에는 간이 명패가 붙어 있어 자리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강민이 자리에 앉자 옆에서 머리가 벗겨진 50대 중년인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KM의 강민 회장이시군요. 반갑습니다. 조그만 유통사를 운영하고 있는 김유철이라고 합니다.”

김유철은 강민의 어머니 한미애와 비슷한 연배였지만 존댓말로 강민에게 인사를 하였다.

김유철의 두루뭉술한 소개에 옆에 서 있던 장태성이 강민에게 나지막이 귓속말을 했다.

“김유철 사장은 재계 서열 40위 정도의 YC 유통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장태성의 말에 강민도 일어나서 인사를 받았다.

“김 사장님, 반갑습니다. KM의 강민이라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몇 차례의 인사를 나누던 중 저 멀리서 정장을 깔끔하게 입은 한 노인이 다가왔다.

노인의 접근에 주위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며 바닷물이 갈라지듯 강민에게 올 수 있는 길을 터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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