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
현세귀환록
033. 총회(2)
띠리링~ 띠리링~
강민이 휴대폰을 바라보자 휴대폰의 액정에는 백지호의 이름이 나타나 있었다.
강민이 전화를 받자 백지호는 행여 강민의 휴대폰에 자신의 전화번호가 없을 수도 있다 생각하여 이름부터 밝혔다.
-형님, 저 지호입니다. 백지호. 기억하시지요?
“아, 지호구나. 어쩐 일이야?”
-이제 한창 바쁘실까 봐 이제 연락드립니다. 많이 바쁘셨지요?
“뭐 그렇지. 회사 하나 만드는 게 쉬운 건 아니네.”
회사 하나가 아니라 대기업 집단을 하나 만든 것이었으니 쉬울 리가 없었다.
-저는 잘 모르지만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하시는 것을 보니 늘 바쁘시더라고요. 사장이나 회장쯤 되면 한가한 맛이 있어야 할 텐데 말이죠. 하하.
KM그룹 규모의 열 배가 넘는 백산그룹이라면 판단할 일도 훨씬 많았을 테니 바쁘다는 것이 이해가 갔다.
“그렇겠지. 나도 이렇게 바쁜데 말이야.”
-갑자기 그렇게 KM그룹을 만드셔서 정말 놀랐습니다. 재산이 많다는 것은 알았는데 이 정도인지는 몰랐네요.
“그런데 무슨 일이야? 일없이 전화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잖아.”
-하하, 제가 그랬나요? 반성해야겠네요. 여튼 오늘 전화드린 건 혹시 이번에 한경련 총회에 형님이 오시는가 해서요. 오신다면 만찬에도 참석하시는가 해서 전화드렸어요. 한경련에서 연락받으셨지요?
“연락은 받았는데 아직 생각 중이야.”
한국경제인연합회는 우리나라 대부분의 대기업과 중견기업이 포함되어 있는 사업가 연합회로 KM그룹 역시 창립 후에 여기에 가입하여 회원사로 되어 있기에 총회 참석 연락이 왔다.
총회 후 재계 서열 30위권까지 참석하는 만찬이 별도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재계 서열 11위에 자리한 KM그룹에도 당연히 초청장이 왔다. 만찬은 가족 동반 만찬이었다.
-형님, 한번 오세요.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도 많지만 괜찮으신 분도 정말 많으시거든요. 앞으로 형님께서 그룹 경영하시는 데 도움이 많이 될 거예요.
“가족 동반이라던데 너도 오는 거냐?”
-네, 형님. 원래는 총회에 아버지께서 참석하시는데 이번엔 할아버지께서 직접 참석하신다고 하셔서 어쩌다 보니 저까지 덤으로 가게 되었어요. 사실 지금 전화드린 것도 제가 형님과 친분이 있다고 하니 아버지께서 저한테 형님 참석 여부를 확인해 보라 하셔서요. 하하.
“어쩐지, 평소에 전화 안 하는 녀석이 전화했다 생각했다.”
-하하. 형님 앞으로는 자주 전화드릴게요. 그리고 현승에서도 유현승 회장이 직접 온다는 것 같고, 대부분 회장이 직접 오셔서 간만에 규모가 커질 것 같다더라고요. 회장님들께서 다들 오시다 보니 동반 가족도 많아서 만찬 규모 역시 근래 최대인 것 같구요. 제 생각엔 KM그룹 창설 때문에 비공식 회의가 있는 것 같던데 형님도 한번 오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음……. 그래, 알았어. 별일 없으면 참석하도록 하지. 너희 아버지께는 참석한다 말씀드려.”
-그래요? 오랜만에 형님 뵙겠네요.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백지호에게는 생각 중이라 말했지만 어차피 재계의 전면에 나선 이상 한 번쯤은 그런 자리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KM그룹이 좀 더 자리를 잡으면 장태성을 전면에 놓고 자신은 필요한 경우에만 나설 테지만 지금은 아직 강민이라는 존재를 보일 필요가 있었다.
다만 가족 동반 만찬은 정말 생각 중이었는데 이번엔 다른 그룹에서도 가족들이 온다고 하니 일단 강서영과 한미애에게도 말해볼 생각이었다.
* * *
“가족 동반?”
“그래, 어머니는 그런 곳 불편하다고 안 가신다 하더라고. 넌 어때?”
“유리 언니는? 유리 언니는 같이 가?”
“유리는 가족 동반 아니더라도 같이 갈 거야.”
“누가 일심동체 아니랄까 봐, 그렇게 티 내는 거야? 흥.”
“일심동체니까 그렇지, 하하. 여튼 어쩔래?”
“오빠 생각은 어때? 내가 가도 괜찮을 것 같아?”
“이번엔 가족 동반으로 많이 온다 하니까 네 또래도 있을 거야.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혹시 모르지, 괜찮을 사람 만날지도 말이야.”
“뭐야~”
강서영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결국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지만 강민의 말처럼 연애 상대를 찾으러 가려는 것은 아니었다.
안 그래도 요즘 김세나 말고는 친구들도 다들 멀어지고 외롭다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에 비슷한 처지의 또래 친구를 사귈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총회는 남산에 위치하고 있는 그랜드스타 호텔에서 개최되었다.
아직 필요가 없어서 별도의 운전기사를 두지 않고 있는 강민은 유리엘과 강서영을 태우고 스스로 레인지로버를 몰아서 총회장에 도착했다.
발레파킹을 하는 직원에게 차를 내어주고 현관에 올라서니 한경련의 직원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강민 일행에게 서둘러 다가왔다.
“강민 회장님 되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반갑습니다. 한경련의 김경한 과장입니다. 혹시 수행원은 없으신지요? 없으시다면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수행원은…… 아, 저기 오네요.”
장태성 실장이 30대 초반의 젊은 직원과 함께 강민에게 서둘러 걸어왔고, 김경한 과장은 강민 일행과 장태성에게 인사를 하고 다른 사람을 영접하러 자리를 떠났다.
“회장님 오셨습니까.”
“네, 실장님. 여긴 제 동생 강서영입니다. 서영아 이분이 장 실장님이야. 이쪽은 비서실의 이진욱 대리.”
“아,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강서영이라고 합니다.”
강서영은 KM그룹을 세우는 데 많은 도움을 준 장태성 실장에 대해서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실제로 본적은 처음이었기에 공손히 인사하였다. 물론 이진욱 대리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었지만 같이 인사를 하였고 이진욱 대리는 당황하며 급히 같이 고개를 숙였다.
“저도 반갑습니다. 장태성이라고 합니다. 강 회장님의 동생분도 이렇게 미인이신 줄은 제가 미처 알지 못했군요. 허허허.”
장태성도 같이 목례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회장님, 일단 회장님께서는 저와 함께 총회에 참석하시고, 김유리 감사님과 서영 아가씨는 만찬장으로 바로 모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시죠. 어차피 서영이는 만찬 때문에 온 거니 그렇게 하시죠. 유리. 서영이 좀 잘 부탁해.”
“오빠, 내가 뭐 애야? 왜 언니한테 날 부탁해? 흥.”
“민, 내가 서영이 잘 챙길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지금 하는 것 보니 영락없는 아기 같으니까 내가 잘 챙겨야겠어요. 호호.”
“언니~!”
강서영의 귀여운 모습에 일행은 잠시 웃음을 지었다. 이후 강민과 장태성은 총회장으로, 유리엘과 강서영은 이진욱 대리를 따라 만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총회의 시작은 5시부터였고, 만찬의 시작은 6시부터였지만 만찬장에는 벌써 많은 사람이 와서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강서영은 드라마에서나 보던 화려한 파티장의 모습에 잠시 넋을 잃고 두리번거리다 한쪽에서 나지막이 들려오는 대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쟨 뭐야? 쟨 왜 이런 곳 처음 오는 애처럼 어리바리 대지? 여기 재계 30위권 안에만 초청한다 하지 않았어?”
“야, 제가 KM그룹 강민 회장의 동생이래.”
“아, 그래? 어쩐지 촌년 상경한 것처럼 어리바리 대더라.”
목소리는 낮았지만 대화의 내용은 들을 수 있었기에 강서영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유리엘도 그 대화를 들었지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강서영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언니, 언니, 우리 저리로 가요.”
강서영이 부끄러움에 사람이 많이 없는 자리로 이끌려고 할 때,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리 누나~!”
백지호였다. 백지호는 홀의 왼쪽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유리엘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바로 유리엘과 강서영에게 다가왔다.
“지호구나. 와 있었네?”
“네, 유리 누나. 민이 형이 온다고 해서 누나도 같이 올 거 같아 여기서 미리 기다렸어요. 그런데 이분은?”
“민의 동생이야. 인사하렴.”
“아, 안녕하세요. 강서영이라고 합니다.”
강서영은 아직 아까의 부끄러움이 남아 있는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 백지호에게 인사를 했다. 강서영의 풋풋한 모습에 백지호는 웃으며 같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백지호라고 합니다.”
둘은 처음 보는 사이라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고 약간 어색한 분위기가 보이자 유리엘이 강서영에게 백지호를 소개했다.
“서영아, 지호는 우리나라 1등 회사라는 백산그룹의 손자야. 다다음 후계자라 해야 하나? 호호.”
“누나~! 후계자는 무슨, 할아버지께서 능력이 없으면 회사를 제게 물려주시지 않겠다고 선언까지 하셨는데요, 뭘.”
“그랬니? 몰랐어. 뭐 그래도 그 이름 높은 백산그룹의 손자는 맞잖아.”
“아, 뭐…… 그, 그렇긴 하죠.”
“그러시구나…….”
한국대학교에서 백지호가 백산그룹의 손자라는 건 유명한 이야기였지만 강서영은 당시 생활고 때문에 과외에만 집중하다 보니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렇기에 강서영은 아직 현실감을 갖지 못하고 백지호를 보며 말로만 듣던 재벌 3세구나 라는 생각 정도만 하고 있었다.
“근데 누나 진짜 어떻게 된 거예요? 누나는 알고 있었어요? 민이 형이 그렇게 돈이 많았던 거?”
“당연하지, 우리가 같이 모은 돈인데. 호호호.”
“그래요?”
백지호는 그 말에 더 놀랐고, 강서영 역시 돈을 같이 모았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 이야기라 눈이 동그래져서 유리엘을 바라보았다.
“호호. 민이 어디까지 보여줄지는 모르겠지만 여튼 이제 시작이니까 앞으로 두고 보렴. 백산도 지금 1등이라고 안심하면 안 될 거야.”
“시…… 시작요? 허…… 설마 지금보다 더 많은 돈이 있다는 건가요?”
“그래, 너 계속 까불면 백산그룹도 사버리는 수가 있으니까 조심해. 하하하.”
백산그룹을 산다는 비현실적인 말과 함께 웃는 유리엘의 모습에 농담인 줄 안 백지호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유리엘에게 말했다.
“하하, 누나도 참.”
농담이라 생각한 백지호에게 유리엘은 의미심장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백지호와 유리엘은 그렇게 한참 동안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었고, 강서영은 잘 끼어들지는 못했지만 중간중간 리액션을 하며 처음 듣는 이야기에 고개까지 왔다 갔다 하며 둘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런 강서영의 귀여운 모습에 백지호는 오랜만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예전 유리엘을 처음 보았을 때와는 다른 종류의 두근거림이었다.
“서영이는, 아, 말 놓아도 되지? 학교 후밴데.”
“아, 네. 괜찮아요, 선배.”
“선배는 좀 딱딱한 거 같으니 선배보다는 오빠로 해주지 않을래? 하하하.”
“지호 너 은근 느끼한 데가 있구나, 호호.”
“헐, 느끼해요? 대박~”
백지호는 과장되게 포즈를 취했고 유리엘과 강서영은 그런 백지호의 모습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여튼 서영이는 이런 자리 처음이지?”
“아, 네…….”
강서영은 아직 수줍은 듯 백지호에게 말을 잘하지 못했고 그런 강서영의 모습에 백지호는 더 호감이 갔다.
“그럼 내가 사람들 좀 소개해 줄까?”
백지호의 말에 유리엘이 웃으며 말했다.
“지호야, 나도 이런 자리 처음인데? 호호호.”
“그래요? 누나는 너무 익숙하게 있어서 벌써 이런 자리 많이 다녀보신 줄 알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