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
현세귀환록
032. 총회(1)
하지만 한수찬은 강서영이 강민의 동생인 것을 이 기사를 통해 처음 알았다.
강서영에게 외국에서 오래 살다가 최근에 귀국한 오빠가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오빠의 이름도 몰랐고 무슨 일을 하는지는 더더욱 몰랐었다. 한국대의 학생이었던 것도 기사를 보고 알았다.
강서영과 만날 때는 연애 초반이었으니 가족 관계 등의 호구 조사보다는 둘 사이에 집중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어머니의 반대로 인해 이 전의 연애 때와 마찬가지로 초반에 끝나고 말았으니 더 알아볼 일도 없었다.
그래서 이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다.
‘헉…… 서영이가 KM그룹 강민회장의 동생이라니…….’
한수찬의 모친은 한수찬에게 강서영을 무척 폄하하였다. 아버지는 사업 실패로 인해 세상을 떠났고, 식품공장에 다니는 어머니를 두고 외제 차나 몰고 다니는 생각 없는 아이라 비난하며 강서영과 헤어지기를 종용했다.
한수찬은 강서영의 자세한 집안 상황을 모르고 있었지만 모친의 말을 듣고 강서영을 나쁘게 생각했었다.
한수찬은 한편으로는 강서영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모친의 강력한 요구에 더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모친이 하라는 대로 끌려가 결국엔 헤어지고 말았다.
헤어진 이후에 아쉬운 마음에 몰래 만나자고 연락을 하긴 했지만, 그 역시 모친의 말처럼 강서영이 허영이 넘치는 아이이고, 자신에게 보여준 알뜰한 모습은 가식적인 것이라 결론을 내렸었다.
하지만 기사 내용을 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강서영은 어머니와 단둘이 10여 년의 세월을 어렵게 살아왔고 외국에서 강민이 돌아오면서 형편이 나아진 것이었다.
강서영이 타고 다니던 외제 차도 강민이 자신의 차를 구입하며 한미애와 강서영에게 선물한 것으로 기사에 나와 있었다.
그간 한수찬이 나쁘게 본 강서영의 행동들이 사실이 아니었던 것이었다.
기사를 본 한수찬의 입에서 저절로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내가…… 어머니가…… 잘못 생각했었구나…….”
한수찬은 마마보이가 맞긴 하였으나 심성이 악한 사람은 아니었다. 자신과 자신의 모친이 한 일이 있는데 언감생심 강서영을 다시 잡아보려고 마음을 먹지도 않았다. 물론 잡히지도 않겠지만.
다만 자신과 모친의 무례한 행동에 대해서 사과는 하고 싶었다. 그랬기에 일단 모친에게 전화해 사실을 알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머니.”
-그래, 수찬이구나. 이 시간에 어쩐 일이니?
강서영에게 보였던 냉랭한 모습과는 다르게 부드럽고 온화한 목소리의 모친이었다.
“어머니. 혹시 전에 서영이에 대한 이야기, 누구한테 들으신 거였어요?”
-서영이? 서영이가 누구지? 아, 그때 그 여자애 말이니? 근데 갑자기 그 애는 왜?
“우리가 큰 실수를 한 것 같아서요.”
-무슨 실수 말이니?
“어머니께선 서영이가 집도 어려운데 혼자 외제 차나 몰고 다니는 허영이 넘치는 아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렇지. 그게 왜?
“그게 아니라. 어렵게 살다가 서영이 오빠가 외국에서 돌아오면서 선물 받은 거래요.”
-그래? 그랬구나. 그 오빠가 얼마나 벌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기껏해야 몇억이겠지. 우리 집 사람이 되기에는 한참 부족해요. 이 이야기하려고 전화한 거니?
한수찬은 왠지 모친이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새로운 사실을 들은 목소리나 말투가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다.
“혹시 어머니는 알고 계셨어요?”
-뭘 말이니?
“서영이가 사치를 부리고 다닌 게 아니라 오빠한테 선물 받은 거라는 사실 말이에요.”
-……그래. 뭐 어쨌든 그 집안은 우리 집안과 안 어울려요. 너도 그만 그 애는 잊어라. 나중에 엄마가 좋은 자리 마련해 줄게. 그거 기다려봐.
한수찬의 모친은 짧은 침묵 뒤에 사실을 인정했고, 한수찬은 그 사실에 할 말을 잃었다.
어머니가 자신을 과보호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신에게 거짓을 말하면서까지 서영이를 떼어 놓았을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어머니가 진심으로 서영이를 허영이 많은 아이라고 생각했기에 자신을 위해서 막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수찬아. 이미 끝난 지 몇 달이나 지난 일 가지고 왜 이제 와서 이런 소리니. 그런 애는 생각하지 말고 엄마가 좋은 자리 구해준다니까.
“어머니, 만약에 그 집안이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하셨던 거라면 정말 실수하신 거예요. 전 사실을 알고 서영이에게 오해에 대한 사과를 하고 싶었는데 어머니가 하신 행동이 오해가 아니라 진짜 그런 마음에서 비롯됐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연락을 하는 것 자체가 실례일 것 같네요.”
-사과는 무슨 사과. 사람에게는 수준이라는 게 있는 거야. 수준이 안 맞는 집안이 만나면 서로가 힘들어져요.
종업원 300명 정도의 작지 않은 회사를 운영하는 한수찬의 집은 실제로 부유층에 속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한수찬의 모친은 계속해서 수준 차이를 강조했다.
“하, 그렇네요. 수준이 맞지 않지요, 분명히……. 나중에 반대가 되는 상황에서도 똑같은 생각을 하시면 좋겠네요. 그렇지 않다면 아마 지금 보내는 이 기사만 보셔도 어머니의 행동을 후회하실 거니 말이에요. 문자로 기사 하나 보낼 테니 읽어보세요.”
-수찬아~!
평소의 한수찬답지 않게 강한 어조로 모친과의 전화를 끊고 아까 기사의 링크를 모친의 휴대폰으로 전송했다. 그런 마음으로 자신과 강서영을 헤어지라고 했다면 분명 그 기사를 보며 후회할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고 어머니가 원하는 대로만 행동하여 좋은 사람을 놓친 자신이 부끄러웠다. KM그룹 회장 동생이 아니라 하더라도 강서영은 정말 좋은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조금 더 알아봤어야 했는데…….’
한수찬은 어머니의 말만 믿고 강서영에게 선입견을 가졌던, 그리고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은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한수찬과 전화를 끊은 한수찬의 어머니 김영희는 한수찬이 보낸 문자를 보았다.
“무슨 일이길래 수찬이가 이렇게 기분이 상해 있지?”
김영희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문자에 있는 링크를 클릭하자 곧바로 아까 한 기사에 연결되었다. 찬찬히 기사를 읽던 김영희는 이내 너무 놀라 휴대폰을 떨어뜨리며 외쳤다.
“뭐? 강서영인가 하는 그 여자애가 KM그룹 회장 동생이라고?!”
다시 휴대폰을 주워 찬찬히 기사를 살펴보던 김영희는 조금 전에 한수찬과의 대화에서 자신이 수준 차이를 운운했던 것도 잊었는지 속으로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다시 잡을 수 있을까? 분명 수찬이를 좋아했는데……. 그래, 아직 수찬이를 좋아할 거야. 그래, 내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수찬이면 일등 신랑감이지, 암~! 전화번호가 어디 있더라…….’
김영희는 염치도 없이 강서영에게 전화할 생각부터 하였다.
이내 전화번호를 찾은 김영희는 자신의 휴대폰으로 강서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점심식사 후 김세나와 수다를 떨고 있던 강서영은 주머니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휴대폰을 보았는데 액정에는 모르는 번호가 떠 있었다.
“누구지?”
“대출 상담 같은 스팸이겠지, 뭐. 신경 쓰지마. 아, 전화 받아서 계속 이러면 오빠한테 말해서 그 회사 사버린다고 해. 키키킥.”
“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말이 안 될 건 뭐냐? 충분히 할 수 있지, 크큭.”
강서영은 김세나의 농담에 웃으면서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그 표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여보세요?”
-서영 학생 맞지?
“네, 그런데 누구시죠?”
-나 수찬이 엄마 되는 사람이야.
“…….”
강서영은 너무 뜻밖의 전화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잠시 멈춰버렸다.
-놀랐지? 다름이 아니고 전에 너무 심하게 말을 한 것 같아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어서 말이야.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강서영은 저도 모르게 딱딱한 목소리가 나왔다. 옆에서는 김세나가 입 모양으로 누구냐고 묻고 있었다.
-그래도 내가 미안해서 밥 한번 사주고 싶은데. 내가 오해한 것도 있는 것 같고 해서 말이야.
“괜찮습니다.”
-아니야. 내가 진짜 밥 한번 사주고 싶어서 그래. 학교에 있으면 내가 지금 가도 될까? 밥 먹었다면 차나 한잔해요, 서영 학생.
“별로 할 말이 없을 것 같습니다. 만날 이유도 없고요. 이만 전화 끊겠습니다.”
-잠깐만, 서영 학생! 만나기 그렇다면 일단 전화로 먼저 이야기할게. 전에는 내가 너무 오해했어. 다시 알아보니 그런 게 아니라며. 그러니까 수찬이랑 다시 만나도 좋아요. 수찬이한테도 그렇게 말할게.
한수찬의 어머니인 것을 알았을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역시 이런 얘기였다.
강서영은 기가 찼다. 이미 마음 정리 다 된 상태에서 다시 만나라니.
헤어짐을 종용할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막무가내인 아주머니라고 강서영은 생각했다.
“아니에요, 아주머님. 그럴 일 없을 것 같네요. 앞으로 이런 전화 안 하셨으면 하네요.”
-아주머니라니, 전처럼 어머니라 불러요. 그리고 그런 말 하지 말고. 오해로 헤어진 건데 다시 잘해 봐요.
“죄송합니다, 전화 끊겠습니다.”
-학생~ 서영 학생~!
김영희의 말에도 강서영은 전화를 끊었다. 강서영의 표정이 굳어진 것을 보고 김세나가 걱정스러운 듯 강서영에게 물었다.
“누군데 전화를 그렇게 받아? 평소 너답지 않게 말이야.”
“수찬 오빠 어머니야.”
“수찬 오빠라면…… 전 남친 아니야?”
“맞아.”
“근데 그 오빠 엄마가 왜 너한테 전화를 해?”
“전에 너한테 말하기 좀 그래서 말 안 했는데, 사실 헤어진 것도 그 아주머니가 우리 집안이 구질구질하다면서 나보고 헤어지라 한 거였거든. 근데 오늘 갑자기 전화하더니 다시 만나라네?”
“뭐야, 뭐야! 그런 거였어? 분명히 너네 오빠 소식 듣고 그러는 거다. 나 100퍼센트 장담해!”
강서영도 어느 정도는 짐작이 갔다. 구질구질한 집안이라며 헤어지길 종용할 때가 언젠데 불과 몇 달 만에 이렇게 바뀔 리가 없었다. 아마 강민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렇겠지…….”
“뭐야? 아직 미련 남았어?”
“아냐! 절대 그런 거. 다만 사람들 시선이 다르구나 싶어서.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돈을 가진다는 것이 이런 거구나 싶어서 말이야. 그래도 네가 있어서 참 다행이야.”
강서영의 넋두리에 김세나는 속으로 조금 찔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세나 역시 강서영의 처지가 바뀐 것을 속으로 부러워하고 한편으로는 질투까지 한 보통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내, 내가 뭘…….”
“아냐, 친한 친구라곤 너밖에 없는데 너마저 멀어진 느낌이었다면 좀 슬펐을 거 같아서…….”
강서영은 호감 가는 인상처럼 편하게 지내는 사람이 많은 편이었다. 학교에서도 강서영은 친구가 많은 아이로 알려져 있었지만 강서영의 상황이 완전히 바뀐 이후로 그런 친구들이 왠지 모를 거리감을 가지고 그녀를 대했다. 강서영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좀 실망하고 있었다.
강민이 전에 복지 기금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선택을 말했던 것이 이해가 갔다.
자신이 아니라 오빠가 저렇게 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멀어지는데 만약 자신이 그 큰돈을 움직였다면 지금으로서는 이겨내기 힘들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김세나는 여전히 전과 같은 모습으로 강서영을 대하였기에 그녀가 김세나에게 느끼는 감정은 남달랐다. 특히 터놓고 속 깊은 이야기를 하는 친구는 김세나가 유일했기 때문에 그 고마움은 더욱 컸다.
강서영의 고마워하는 모습에 김세나는 조금 쑥스러워하면서 속으로 다짐했다.
‘그래, 서영이가 어떤 상황이더라도 서영이는 서영이지. 나마저 거리감 느끼게 하진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