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세귀환록-29화 (29/203)

# 29

현세귀환록

029. 회사(2)

강민의 말에 따르면 직함은 전략기획실장이라 하지만 실제 역할은 CEO나 다름없었다.

더 이상 죽어버려서 없어졌다고 생각했던 일에 대한 열정이 장태성의 마음 깊은 곳에서 다시금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 정도 규모라면 내가 전성기 때의 태성그룹 시가총액보다도 큰 금액이다. 그리고 이게 초기 자금이라고 하니 얼마의 자금이 더 투입될지 감도 안 오는군. 어쩌면 현승과도 붙어볼 만할지도……. 아냐, 현승과는 아직 상대가 안 되겠지. 그래도…….’

장태성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새로이 타오르는 열기를 담은 눈으로 강민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시겠지만, 저는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인해서 모든 걸 잃었던 사람입니다. 이런 저 때문에 망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으십니까?”

“저는 다른 사람의 의견이 아니라 제 판단을 믿습니다. 그리고 제 판단은 장태성 씨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말하는군요. 그리고 장태성 씨의 실패는 무리한 사업 확장에 이유가 있다기보다 의도적인 기업 죽이기에 당한 것에 가까웠다고 하더군요. 컨소시엄에서 태성건설만 의도적으로 기성금을 지연시키고, 기성 검사에도 유독 까다로워 지연되는 자금을 메우다 결국 돌아오는 어음을 막지 못하고 부도 처리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 그걸 어떻게…….”

장태성은 그런 사실은 공개적으로 말한 적이 없었다. 전후가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결국은 자기 자신의 잘못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공개적으로 말한다 할지라도 역으로 언론 플레이을 당해 더 큰 비난을 받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사실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강민은 그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유니온 태성그룹의 김상민 과장님이 철저하게 조사를 해주셨더군요.”

“아, 김상민 과장…….”

이번 기회가 있다는 것도 김상민 과장이 알려준 것이었다.

사실 김상민과 장태성은 과거 짧은 인연으로 닿아 있을 뿐이었다. 큰 인연이라 하기도 힘든 관계였음에도 항상 장태성의 실각을 아쉬워했던 그가 이렇게 도움을 준 것이었다.

“그럼 장태성 씨. 아, 앞으로는 장 실장님이라 부르겠습니다. 장 실장님이 오늘 선별한 사람들에게 개별적으로 연락을 취해서 조직을 구성하시면 되겠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장태성은 강민이 내민 손을 힘차게 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들과 비슷한 나이대인 강민이었지만 장태성이 오랜 사회 경험을 해온 동안 나이 어린 사람에게 고개 숙인 적이 한두 번이겠는가. 고용주가 자신보다 어리다는 이유로 자존심을 내세우는 것은 아마추어적인 실수다.

모든 면접 과정이 끝나고 김상민 과장이 들어와서 강민에게 말을 걸었다.

“강 대표님, 이렇게 많이 합격을 시키십니까? 제가 듣기에는 서너 명의 사람이 필요하다고 들은 것 같은데요. 아, 구입한 빌딩의 크기를 생각하면 이 인원도 적겠군요. 허허.”

“괜찮은 사람들을 구해주셨는데 내칠 수가 있나요. 작게 시작하려던 걸 좀 더 크게 한다 생각하시면 됩니다. 사무실은 언제부터 쓸 수 있지요?”

“다음 주 정도면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인테리어를 생각해 보았을 때 제대로 쓰시려면 한 달 정도는 필요할 겁니다.”

“어차피 지금은 한두 층 정도만 쓸 테니 나머지 층은 천천히 공사하도록 하지요. 사용 가능해지면 장태성 씨에게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저희 회사의 컨트롤 타워가 될 분이니 앞으로 그쪽과 협의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그간 고생 많으셨는데 잘됐네요, 허허. 감사합니다, 강 대표님.”

“아닙니다, 제가 오히려 감사드려야지요. 그리고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건 제가 감사하다는 뜻으로 드리는 성의입니다.”

강민은 흰 봉투 하나를 꺼내 김상민 과장에게 내밀었다. 미리 준비한 것은 아니었지만, 면접자들의 면면과 그들의 프로필을 정리하여 놓은 서류를 보니 김상민 과장의 노력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제 업무인걸요. 이런 걸 받았다가는 제 입장이 곤란해집니다.”

“아니에요. 제가 지부장님께는 말해놓겠습니다. 이건 제가 개인적으로 드리는 감사의 표시라고요. 꼭 받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 참……. 네, 알겠습니다.”

중요한 고객이 권하는 것을 무조건 안 된다고 하는 것도 회사에 불이익을 줄 수 있으니 무턱대고 계속 거절할 수는 없었다.

봉투의 두께가 얇아 그리 큰돈이 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수표일 수도 있겠지만 아까 흰 봉투를 찾던 것으로 보아 미리 준비했던 것은 아니었으리라.

그렇다면 많아야 백만 원 남짓이라 생각한 김상민 과장은 봉투를 받으려 했다. 카드 결제가 활성화된 요즘 지갑에 몇백만 원씩의 현금을 들고 다니는 사람은 없었으니 말이다.

물론 김상민 과장은 백만 원이라도 컴플라이언스팀에 자진 신고할 생각이었다. 얼마 되지도 않는 돈으로 괜한 오해는 사기 싫었기 때문이다.

결국 강민이 내민 봉투를 받아 든 김상민 과장은 강민에게 감사 인사를 하였다.

“알겠습니다. 제 업무를 처리한 것뿐인데 이렇게 별도로 챙겨주시다니 민망하네요. 아무튼 감사합니다.”

“그럼 고생하셨습니다. 다음에 또 뵙지요.”

강민과 유리엘이 나간 후 김상민 과장은 봉투를 열어보았다. 봉투 속에는 열 장의 흰색 종이가 보였다.

‘아, 수표군. 그럼 딱 백만 원인가? 역시 예상이 정확하네. 아무튼 바로 컨플라이언스팀으로 올라가야겠군. 괜한 구설에 오르기는 싫으니 말이야.’

그런 생각을 하며 수표를 꺼내 확인한 김상민은 그 자리에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10만 원 짜리라 생각했던 수표에 동그라미가 두 개 더 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만 원짜리 수표였다. 그것도 열 장. 그러니까 1억 원이었다.

“헉!”

숫자를 본 김상민은 외마디 신음을 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서둘러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다시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서 수표를 확인했다.

‘10조 원의 회사를 하나 차린다더니…… 통이 엄청나게 크구나. 그럼 대체 지갑에 얼마를 넣고 다닌다는 말이야…….’

수표를 확인한 김상민은 자진 신고를 할까 말까 잠시 망설였다. 연봉이 1억 초반대, 세금을 떼고 나면 1억 원이 조금 안 되는 김상민에게 1억 원은 한 해 수입과 맞먹는 돈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엘리베이터에 타서 컨플라이언스팀이 있는 층의 버튼을 눌렀다.

‘1억 벌자고 회사에서 잘릴 수는 없잖아……. 좀 아깝긴 하지만…….’

* * *

“네, 제가 성의로 드린 거니 그분이 곤란한 일을 겪지 않도록 조치 부탁드립니다.”

건물에서 나온 강민은 아까 김상민에게 말한 대로 김세훈 지부장에게 전화하여 곤란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였다.

일반 회사에서 클라이언트에게 그런 거액을 받으면 그것만큼 문제 되는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강민이 전화를 끊자 유리엘이 강민에게 말을 했다.

“이번에 뽑은 사람들은 좀 낫죠?”

“그래, 어쩌면 처음부터 아예 능력자를 배제하고 단순히 업무 능력이 되는 사람을 추천 받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어.”

“그러게 말이에요. 어차피 이능 집단을 상대하려고 조직을 만드는 것도 아닌데 너무 전투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해요. 그리고 유니온도 눈치는 있나 봐요. 두 번은 같은 방식을 안 쓰니 말이에요.”

“설마 두 번이나 같은 방식을 쓰려고. 그렇지만 우리에 대한 시선은 계속 두고 있을 거야. 아무튼 이번에 뽑은 사람들은 믿을 만한 사람들 같으니까 당분간 맡겨 놓아도 될 것 같아. 사업한다고 일일이 컨트롤하려면 한도 끝도 없으니 말이야.”

“그래요, 어차피 돈 벌려고 시작한 것도 아니니 말이죠. 호호호.”

둘의 말처럼 강민과 유리엘은 사업을 통해서 돈을 벌 생각은 전혀 없었다. 지금도 넘쳐나는 돈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인데 더 많은 돈을 벌어 어디에 어떻게 쓰겠는가.

이렇게 사업을 하는 이유는 일반 세상에서 힘을 가지기 위해서였다. 그렇기에 사업 전반의 사항을 장태성에게 맡기고 스스로는 대표이사의 직함만 가지려고 했던 것이었다.

만약 강민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분야가 있다면 스스로 나설 테지만 아직까지는 오늘 선발한 사람들이 회사를 알아서 움직여 주기를 바랐다.

* * *

“회장님, 감사님, 1차 중간 결과 보고입니다.”

장태성은 강민과 유리엘에게 각각 두툼한 보고서와 세 장짜리 요약본을 함께 내밀었다.

지금 강민이 앉아 있는 회장실은 여느 대기업의 회장실과 다르지 않았지만 하나 특이하게도 회장실의 책상이 두 개였다.

하나는 대표이사 강민의 직함이 쓰여 있는 강민의 책상이었고 옆에는 유리엘의 책상이었는데 책상 위의 명패에는 상임감사 김유리라고 쓰여 있었다. 즉, 회장과 감사가 한 사무실을 쓰고 있는 것이었다.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처음에 직원들은 이런 조치에 유난스럽다는 말도 있었지만, 바늘 가는 데 실 가듯 늘 함께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오히려 금슬이 좋다며 부러워했다.

여직원들은 재력 있는 강민이 끔찍한 애처가라면서 선망의 대상으로 생각했고, 남직원들은 강민이 유리엘의 미모 때문에 잠시도 떼어놓지 못하는 것이라 뒷담화를 하였다.

어쨌거나 본인 회사를 본인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어쩌랴. 물론 뒤에서는 나라님 욕도 한다고 어느 정도 구설에 오르긴 했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주식회사 KM이 설립된 지 두 달이 지났는데 가시적인 사업의 진척도는 없었다.

다만 조직은 처음에 뽑은 32명에서 각자 10명씩 데리고와 352명이 되었고, 기획, 총무, 재무 등의 스태프 부서를 갖추면서 제대로 된 회사의 형태를 서서히 갖추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수익을 내는 휘하 사업부는 하나도 없고 본사만 달랑 존재하는 비효율적이고 기형적인 조직이었지만 말이다.

실제로 한 달에 인건비와 기타 비용으로만 5백억씩의 적자가 발생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직을 구성하고 부서마다 구상을 세우는 것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강민은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어차피 지금 가진 120조에서 연간 이자만 2조 원 이상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정도 적자는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회장님, 하나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서류를 검토하고 있는 강민에게 장태성이 물었다.

“네, 말씀하세요. 장 실장님.”

“지금 진출할 분야의 사업에 대한 M&A는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직원들이, 특히 사업부의 부장들이 M&A를 시행하는 것을 막는 이유를 궁금해합니다.”

장태성의 물음에 강민이 서류에서 눈을 떼고 장태성을 바라보았다.

“장 실장님, 어차피 설비가 필요한 부분은 M&A를 시행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좋겠지요. 국가적 측면에서 보아도 중복 투자를 하는 것은 비효율적인 문제일 것이니 말입니다.”

강민의 말을 듣는 장태성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강민은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시작부터 M&A로 모든 사업을 시행하려 한다면 제가 굳이 이 회사를 만들 필요가 없었겠지요. 차라리 재계 순위가 좀 되는 지주사를 매입하는 것이 더 빠른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매각하려 하는 곳은 적었겠지만 적대적 M&A를 한다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겠지요.”

강민의 말에 장태성은 저절로 고개를 끄덕였고 강민은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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