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현세귀환록
025. 개입(4)
“그, 그건…….”
“어차피 헤어진 마당이니 굳이 지난 일을 왈가왈부하고 싶진 않은데. 오빠는 혹시나 앞으로 네가 살면서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았으면 해. 오빠가 그동안 가만히 있다가 지금 이렇게 나서는 이유가 여기 있어. 어머니와 네가 세상에서 무시당할 일을 만들기 싫어서야. 여기서 재력을 가진다는 것은 그런 일을 가능하게 해줄 테니 말이야. 그동안은 일상을 지켜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것 같아.”
“오빠…….”
강민의 말에 강서영은 마음속 깊이 따스함을 느꼈다. 강민이 이렇게 나서는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밖에서 무시당한다고 생각했기에 자신이 당당할 수 있는 힘을 주기 위해서 이런 일들을 벌이려고 하는 것이었다.
“일단 이름을 드러내는 문제는 좀 더 생각해봐. 전면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껄끄러우면 유력 기득권층에게만 드러내는 방법도 있으니 유동적으로 생각해 보고. 여튼 아까 오빠가 말한 것들 준비되면 다시 말해줄게. 그리고 앞으로는 좀 제대로 된 놈 만나고.”
말을 마친 강민은 강서영의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서영은 강민의 말을 생각하는지 한참 동안 식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멍하게 있었다.
너무 엄청난 이야기를 연이어 들은 강서영은 한수찬과의 이별의 상처는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강서영에게 말을 마친 강민과 유리엘은 2층 방으로 올라왔다.
“민, 일단 금 일부만 현금화시킬 거죠?”
“그렇지. 다른 귀금속들은 시간이 오래 걸릴 테니 말이야.”
“드워프제 세공품을 꺼내면 다들 놀랄 텐데. 여기서는 단지 크기만 한 다이아몬드조차 값어치를 매길 수 없다고 하니 이 세상에 없는 레인보우 다이아몬드나, 다크니스 오팔 같은 것을 꺼내면 다들 돈을 싸 들고 덤벼들겠어요. 호호.”
“그런 것들은 일일이 찾아서 매수자 구하는 것이 더 번거롭잖아. 이번 기회에 이능 세계의 공무원이라는 유니온의 힘을 한번 봐야지.”
말을 마친 강민이 휴대전화로 김세훈 지부장에게 직접 전화했다. 아무래도 일개 담당인 김창수가 처리하기에는 금액이 너무 크다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강민 씨? 오랜만입니다.
“김 지부장님. 별고 없으셨지요?”
-무슨 일로 전화를 다 주셨습니까?
“다름이 아니라 부탁을 좀 드리고 싶은데요?”
-부탁이라면?
“금 좀 팔고 싶어서요.”
-하하. 일반 귀금속 상가에 팔긴 많은 양인가 보죠? 저희한테 연락을 주시다니 말입니다.
“네, 좀 많지요.”
-많다고 하는 것 보니 백 킬로그램이 넘는 것 같은데 그 정도면 밑에 직원 연결해드리겠습니다. 허허.
“그것보다 많습니다. 그러니 지부장님께 직접 연락드렸죠.”
-허. 그래요? 대체 얼마나 되길래 그러십니까?
“일단, 삼천 톤 정도 팔려고 합니다.”
-삼천 킬로면…… 삼톤 정도인데. 음…….
“삼천 킬로그램이 아니라 삼천 톤입니다.”
-삼천 톤요?
“네, 삼천 톤요. 좀 많지요. 제가 유니온의 ‘역량’을 판단해 볼 수 있는 상황이군요.”
-흡…… 저희 역량이라면…….
“이능계의 공무원과 같다고 호언장담하시더니 이 정도도 처리 못 한다면 실망스럽지요. 삼천 톤의 금이 적은 양은 아닙니다만 처리 못 할 양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 그건 그렇지만…….
3천 톤의 금은 100조 원이 넘는 돈이었기에 한국 지부에서 단독으로 처리하기는 힘들 만한 양일 것이다.
한국 정부의 금 보유량이 100톤이 안 되는 상황에서 3천 톤의 금은 국가적으로도 한 번에 처리하기 힘든 양임에는 분명했다.
3천 톤의 금은 현재 세계 금 보유량 2위인 독일의 금 보유량과 맞먹는 정도였고 세계 1위의 금 보유국 미국의 금 보유량의 3분의 1이 넘는 양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표면적인 이야기였다.
강민이 유니온에 자신 있게 금 거래를 말한 것은 마나 기반 문명에서는 언제나 금은 가장 활용도 높은 금속이었고 가장 가치 있는 금속이었기 때문이었다.
드물게 마나에서 생성되는 진은이나 진금을 제외하고는 순금이 마나 전도율이 가장 높았기에 마나 기반 장비에는 대부분 금이 들어갔다.
그렇기에 마나 문명이 있는 곳 어디에서든 금은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었고, 많은 양을 한 번에 풀더라도 큰 가치 하락 없이 팔리는 물건이었다.
따라서 이 정도의 금은 유니온이 충분히 소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금의 양이 아니라 단지 돈의 액수만을 따진다면 유니온 전체에서 100조 원은 그렇게 무리가 아니었다.
유니온은 한 해 예산이 1천조 원이 넘는 거대 집단이었다.
전 세계 국가 중 독보적인 1위 국가인 미국의 한 해 예산이 한화로 약 3천 8백조 원인데, 유니온이 그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엄청난 금액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한국의 한 해 예산이 400조가 안 되는 상황이니 그 금액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예산의 10% 정도면 큰 금액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금액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유니온의 소속 멤버나 직원 수에 비할 때 인당 예산은 미국의 몇십 배를 초월하는 금액이었다. 이것만 보아도 유니온의 재력을 알 수 있었다.
강민은 이런 유니온의 예산 상황을 자세히는 알지 못했지만 이면 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집단이 그 정도 역량조차 안 될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안 된다면 그건 조직의 역량이 아니라 개인의 역량이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겠지.’
이 정도도 처리하지 못한다면 유니온에서 한국 지부장이 가지고 있는 힘이 그만큼 약하다는 증거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대량 매수하는 것이니 유니온에서도 리스크가 있겠지요. 현재 킬로그램당 금 시세가 대략 4,800만 원 정도인데 깔끔하게 킬로그램당 4천만 원으로 해드리지요. 삼천 톤이면 120조 원이겠군요. 그렇게 받지는 못하겠지만 만약 바로 매도한다고 단순하게 계산해 봐도 24조가 넘는 수익이니 윗선에서도 반대할 명분은 없을 것입니다. 대신 회수 대금은 원화로 해주시고, 16%나 할인해서 판매하는 거니 한국 정부에 대한 세금 문제나 자금 출처 증빙 문제는 그쪽에서 해결해 주시기 바랍니다. 괜한 문제 일으키긴 싫군요.”
유니온의 능력이라면 세금이나 출처 따위의 사안은 큰 문제 없이 해결하리라 생각했기에 강민은 당연한 요구를 하듯이 김세훈 지부장에게 말했다.
-아, 예…….
“일단은 알아보셔야 할 테니 일주일 정도 시간을 드리지요. 그전에라도 해결이 된다면 연락 주십시오. 제가 그리로 방문하도록 하지요.”
-예, 그러시죠…….
“그리고 능력의 급과 관계없이 믿고 쓸 만한 사람 서너 명 정도가 필요한데 알아봐 주실 수 있겠습니까? 유니온도 어차피 직원이 모자라다 하니 유니온 직원은 안 될 것 같고, 무소속 유니온 멤버 중에서 믿을 만한 사람이 있으면 추천 바랍니다. 전투 능력은 관계없고 업무 능력이 좋은 쪽이면 좋겠네요. 아. 급여는 최고 수준으로 맞춰준다고 해주십시오.”
-사람을 구하신다고요?
“네, 조그만 사업을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강민의 일방적 페이스에 말린 김세훈 지부장은 제대로 된 대꾸도 하지 못하고 전화를 끊고 말았다.
* * *
강민이 말한 일주일이 되기 하루 전이었다. 강민의 휴대전화에 김세훈 지부장의 이름이 떴다.
“네, 지부장님. 일주일은 넘기지 않으셨군요. 말씀드렸던 거래에는 문제없는지요?”
-아, 네. 본부의 승인은 받았습니다. 그런데 3천 톤의 금을 어디에서 보관하고 계신가요? 저희가 찾으러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걱정 마시고 공간만 마련해 주십시오. 저희가 그 공간에 채워드리겠습니다.”
-어떻게……?
“그런 것까지 말씀드릴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여튼 거래가 성사된 것 같으니 오늘 중으로 방문하겠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금을 쌓을 공간은 준비해 주세요. 이왕이면 무게를 측정할 방법도 같이 강구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무게 재는 것을 기다리고 싶지 않으니 말이죠.”
-네. 오후 세 시까지 본부로 오시면 되겠습니다. 전용 엘리베이터에 멤버십 카드를 접촉하시면 알아서 본부 응접실로 모실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때 뵙지요.”
강민과 유리엘은 오랜만에 유니온 한국 지부에 모습을 드러냈다.
[민, 예전보다 이능력자의 질과 양이 늘어난 것 같은데요?]
[아마 우리가 금을 어떻게 가져오는지 궁금한 유니온 본부에서 나왔겠지.]
말은 안 했지만 둘은 알고 있었다. 지킬 힘이 없는 재산은 그 아무리 많아도 자신의 재산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을.
과거에도 편히 쉬기 위해 별다른 무력을 보이지 않았던 차원에서는 재력을 보이는 순간 그 재산을 노린 많은 공격이 들어왔다. 결국 재력은 무력과 함께하는 순간만이 자신의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검기 정도는 발현해야 납득하려나요?]
[여태껏 파악한 여기 마나 문명 수준에서 검강까지 보인다면 오히려 두려워하고 공공의 적이 될지도 모르지. 그렇게 된다면 너무 귀찮을 것 같으니 여기서 말하는 S급 수준 정도인 검기까지가 딱 좋을 것 같아.]
응접실로 내려가자 김세훈 지부장이 검은 정장을 입고 흰머리를 정갈하게 뒤로 넘긴 노년의 백인과 함께 강민과 유리엘을 맞았다.
백인 노인은 노인이라 하기엔 정정한 느낌이었는데 풍기는 분위기가 한창때의 장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강민 님, 김유리 님 환영합니다. 오랜만이시네요.”
“네, 지부장님도 잘 계셨나요?”
“별일 없었는데 강민 님 덕분에 요 며칠 바빴네요. 하하하.”
“그래도 생각보다 빨리 연락을 주셨네요.”
“‘역량’을 본다고 하시는데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허허.”
“그런데 여기 이분은?”
“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이분은 유니온의 부총재이신 벤자민 그린 님이십니다.”
한국어를 알고 있는지 벤자민 그린은 김세훈의 소개에 반 발자국 앞으로 나와 말했다.
“반갑습니다. 말로만 듣던 한국 지부의 A+ 랭크 유니온 멤버분들을 만나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역시 한국어를 유창하게 말하며 벤자민은 자신을 소개했다.
“네, 그린 님. 저도 유니온 고위층 인사는 처음 뵙는군요.”
강민은 벤자민 그린의 강대한 마나가 중단전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고 마법 계통의 이능력자임을 알아차렸다.
“허허, 벤자민이라 불러주세요.”
벤자민은 강민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 강민이 그 손을 잡자마자 벤자민의 강대한 마나가 중단전에서 급격히 회전하며 힘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벤자민의 강대한 마나는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벤자민의 마나 발현을 눈치챈 강민이 마나 발현 자체를 막아버렸기 때문이었다.
“어, 어떻게…….”
강민은 어안이 벙벙한지 말을 잇지 못하는 벤자민을 향해서 웃으며 말했다. 마법을 막은 것이 아니라 마나 발현 자체를 막은 것이라 벤자민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연세도 있으신 분이 이런 장난을 치시면 안 되죠. 처음이라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벤자민.”
말을 마친 강민은 순간적으로 강대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화아악-!
강민의 존재감 발현에 유리엘을 제외한 근처의 모든 사람이 두세 발자국씩 뒤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