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세귀환록-23화 (23/203)

# 23

현세귀환록

023. 개입(2)

과거의 강서영이라면 당연히 거절할 테지만 시간적인 여유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마음의 여유도 많이 생겼기에 다시 생각해 보았다.

여유가 생긴 다음 주위를 둘러보니 과거에는 관심이 없어 몰랐지만 친한 친구들은 한두 번쯤 연애 경험이 있었다. 알콩달콩 연애를 하는 모습을 보니 괜히 부러웠고, 연애 자체에 대한 궁금증도 많이 생겼다.

그래서 소개팅에 나갈 마음을 먹었었다. 소개팅을 주선한 것은 불문과 여자와 약학대 남자 커플이었다. 때문에 여자 쪽은 불문과, 남자 쪽은 약학대로 3:3이 맞춰졌다.

소개팅에서는 단연 강서영이 돋보였다. 귀여운 얼굴에 늘씬한 몸매까지, 단번에 남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제서야 강서영을 꼬셔온 친구는 후회를 했지만 이미 늦은 상황이었고, 3:3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과 1:1 자리로 넘어갈 무렵 남자들은 모두 강서영의 선택을 기다렸다.

잘생긴 약대생도 있었지만 그보다 강서영의 눈에 띈 건 숫기 없어 보이는 한수찬이었다.

강서영이 한수찬을 선택한 것에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놀랐다.

강서영은 숫기 없는 그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자신도 모태 솔로로 연애 경험이 없었기에 서로 맞춰가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였다.

미팅 후 서너 번을 더 만났고 숫기 없어 보이는 한수찬이 큰 결심을 했는지 빨개진 얼굴로 사귀자고 고백했고 강서영은 흔쾌히 오케이 했다.

예상대로 한수찬은 연애 경험이 거의 없었다. 두어 번 한 연애도 다 짧게 끝났다고 했다. 자세한 이유는 밝히지 않았고 그냥 성격 차이라는 말만 들었다.

강서영은 무던한 성격의 한수찬이 성격 차이로 헤어졌다는 말을 하니 참 드센 성격의 여자를 만났던 것이라 생각했다.

만난 지 두 달째이지만 약간 소심한 것을 빼면 크게 나쁜 점은 없었고, 오히려 강서영은 첫 연애의 재미를 느껴가고 있었다.

굳이 한 가지 더 나쁜 점을 찾자면 집에서, 특히 모친에게 전화가 많이 온다는 점이었다.

오늘 보기로 한 영화는 최근 인기 있다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 ‘그녀를 부탁해’였다.

과거 영화도 거의 보지 못했던 강서영은 데이트 코스로 영화관을 가는 것을 좋아했고, 한수찬 역시 데이트 코스 같은 건 짜본 적이 없어 주로 영화관 데이트를 많이 했다.

“오빠 영화 어땠어? 난 여주인공 상황이 너무 극적으로 설정된 것 같아서 몰입이 잘 안 되더라구.”

강서영의 말에도 한수찬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답을 하지 않고 골똘히 생각만 하고 있었다.

“오빠?”

“어? 뭐라고 했어? 잠깐 딴생각하느라 못 들었어, 미안. 하하.”

어색한 웃음으로 무마시키려는 한수찬이었다.

“진짜 오빠 무슨 일 있어? 아까 영화 볼 때도 전혀 집중 못 하는 것 같더니.”

“아냐, 아무 일 없어. 서영아 미안한데 오늘은 좀 일찍 들어가 봐야겠어.”

“그래, 오빠. 오늘은 얼른 들어가서 쉬어~”

데이트를 마치기엔 좀 이른 시간이지만 둘은 별말 없이 헤어져 각자의 집으로 갔다.

다른 연인들과 마찬가지로 전화상으로라도 굿 나잇 인사를 나누던 둘이었지만 오늘은 전화도 없었다. 늘 걸려오던 시간에 전화가 오지 않아 강서영이 먼저 전화를 해봤지만 받지도 않았다.

‘이상하네. 오늘 영 기분이 안 좋아 보이던데.’

강서영은 전화를 달라는 문자만 한 통 더 남긴 채 전화를 기다렸다.

하지만 한수찬은 이틀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었다.

강서영은 그사이 두 차례의 전화와 두 차례의 문자를 더 남겼지만 아무런 답이 없어 무슨 사고가 난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내일까지 연락이 없으면 집으로 찾아가 봐야겠다는 생각도 하였다.

강서영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 날 저녁, 한수찬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오빠 무슨 일 있었어?”

-……수찬이 엄마 되는 사람입니다.

“네? 아, 안녕하세요.”

당황한 강서영은 앞에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꾸벅 인사를 하고 말았다.

-내일 세시에 한국대학 정문 들녘 카페에서 한번 봤으면 하네요.

“아, 네…….”

-그럼 내일 보죠.

한수찬의 어머니는 냉정한 말투로자신의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한수찬이 연락이 안 되는 이유를 묻고 싶었던 강서영은 한수찬 어머니의 일방적인 페이스에 말려서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끊어진 전화를 들고만 있었다.

한수찬의 전화로 전화가 왔기에 한수찬에게 문자를 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 * *

카페 들녘 앞에 선 강서영은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하였다.

옷이 많지는 않았지만 가진 옷 중에서 가장 차분하고 깔끔한 옷을 선택한 강서영은 풋풋하고 귀여운 모습에 누구나 호감을 가질 만한 모습이었다.

약속 시간보다 십오 분 일찍 카페에 도착했는데, 카페의 구석 테이블에 앉아 있는 날카로운 인상의 아주머니가 손을 들어 본인이 한수찬의 어머니임을 알렸다.

아마 한수찬의 휴대폰에서 강서영의 사진을 보고 이미 얼굴을 파악했으리라.

“안녕하세요, 강서영이라고 합니다.”

“앉아요.”

“아, 네.”

아무리 넉살 좋은 사람이라도 자신을 적대하는 분위기가 풀풀 풍기는 사람에게 호의적으로 대하는 것은 힘들다.

강서영은 여태껏 어른을 대하기 힘들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 없었지만 지금 이 자리는 너무도 어렵고 불편했다.

하긴, 호감 가는 인상인 그녀의 인생에서 애초에 적대감을 갖고 그녀를 대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더 드물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의 분위기는 강서영을 더욱 긴장하게 만들었다.

한수찬의 어머니는 이미 커피를 마시고 있었기에 강서영은 커피를 주문하러 가기도 힘들었다.

한수찬의 어머니는 강서영 앞에 음료가 있는지 없는지 관심도 없었기에 강서영이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

“불편한 자리가 될 거 같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본론만 말할게요.”

“네? 네…….”

“우리 수찬이 그만 만나면 좋겠네요.”

한수찬의 어머니의 말에 강서영은 당황했다. 애초에 냉랭한 분위기를 보았을 때 좋은 말이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다짜고짜 헤어지라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네? 왜 그러시는지요? 그리고 오빠가 이틀째 연락이 안 되는데 무슨 이유인지 아시나요?”

“앞으로도 연락 안 될 거니 헛수고하지 말아요. 여튼 충분히 알아들었으리라 생각해요. 이만 가 볼게요.”

“어머님, 어머님 말씀을 따르더라도 이유라도 알고 싶어요.”

“어머님은 무슨 어머님! 구질구질한 집구석 자식이라고 끝까지 구질구질하게 나오네!”

한수찬의 어머니는 차갑게 강서영을 쏘아붙였다.

강서영의 집안까지 비하하는 말을 듣자 강서영은 오히려 긴장에서 벗어나 차분해졌다.

자신이 무슨 잘못을 하였길래 이런 취급을 당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한수찬이 연락을 받지 않아 혹시 한수찬이 어디 아픈 것은 아닌가 걱정했는데 지금 한수찬의 어머니의 말을 들어보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강서영은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한수찬의 어머니에게 말했다.

“이유를 알아야지 헤어진 다음에 혹시나 마주치더라도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지 않겠어요?”

강서영의 단호한 표정에 흠칫한 한수찬의 어머니는 말을 이었다.

“표정 보니 구질구질하게 굴진 않을 것 같네. 그래, 이유를 말해주죠. 둘이 어울리지 않아서 헤어지라는 거예요. 외제 차 타고 다니길래 어디 좀 사는 집 자식인 줄 알았더니, 알아보니 사업 실패한 집 딸이라며? 그쪽 엄마도 공장에서 일했다 잘렸다는 것 같던데 외제 차는 어떻게 샀대?“

“저희 집안이 가난해서 헤어지라는 것인가요? 혹시 수찬 오빠도 알고 있나요?”

“수찬이가 아니까 내가 수찬이 폰으로 전화해서 이렇게 나왔지. 여튼 구질구질하게 들러붙지 말고 수준에 맞는 사람하고 만나요. 무슨 허영으로 그 수준에서 외제 차까지 몰고 다니는지 모르겠지만 분수에 맞게 살고.”

강서영의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한수찬의 어머니가 어떤 루트로 잘못된 정보를 얻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뒷조사를 했다는 사실 자체가 기분이 나빴다. 게다가 그것을 빌미로 헤어지기를 종용하다니.

하지만 무엇보다 화가 나는 것은 가족들을 비하하는 말이었다. 자세한 상황도 모르면서 가족들을 비하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강서영은 굳이 한수찬 어머니의 말을 정정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지금은 실종되었던 오빠가 돌아와서 경제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말을 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고 하기도 싫었다.

사실 강민이 어느 정도의 경제력이 있는지 강서영은 모르기도 했고, 강민의 경제력에 기댈 생각도 없었기에 더 설명할 생각이 없었다.

한수찬이 연락을 안 하고 한수찬의 어머니가 자리에 나온 것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직은 사랑보다는 좋아한다는 감정으로 만나고 있는 상태에서 강서영의 마음을 싸늘하게 만드는 데 충분했다.

마지막 말을 마친 한수찬의 어머니는 주저 없이 일어나서 가게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강서영은 일어나지 못하고 자리에서 우두커니 앉아 눈물을 흘리며 슬픔과 분노가 섞인,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정을 추스르고 있었다.

* * *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온 강서영은 침대에 엎드리자마자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강서영의 마나가 불안정해진 것을 느낀 강민과 유리엘은 강서영이 방에 들어간 뒤 신경을 집중했다.

이내 강서영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유리엘은 강민이 일어나서 강서영에게 가려는 것을 말리고 스스로가 나서서 강서영의 방문을 두드렸다.

[이런 건 민보다 내가 하는 게 낫겠어요.]

“서영아, 왜 그러니? 들어가 봐도 되니?”

원래 호칭은 아가씨가 맞지만 편하게 지내는 사이였기에 전부터 둘은 그냥 이름을 부르기로 하였다.

“언니…… 지금은 혼자 있고 싶어요…….”

“그래, 알겠어. 나중에 봐. 대신 좀 진정되면 무슨 일인지 말해주렴.”

“네, 언니…….”

거실로 돌아온 유리엘은 강민에게 고개를 저으며 강서영이 지금은 대화할 상태가 아님을 알렸다.

[유리엘, 확인해 보는 게 어때?]

[신체적, 정신적으로 타격을 입은 심각한 일도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까지 해야겠어요? 서영이의 프라이버시잖아요.]

[그래도 서영이 첫 연애인데 괜한 상처로 다른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될까 걱정이 돼서 말이야.]

사실 강서영이 한수찬의 어머니를 만나러 가기 전 유리엘에게 상담차 말했었기에, 강민과 유리엘은 대강 한수찬과 관련된 일인 것을 알았다.

하지만 정확히 무슨 이유인지는 몰랐기에 강민이 확인해 보자고 했던 것이었다.

강민이 확인하자고 한 것은 유리엘이 강서영과 한미애의 보호를 위해 만들어준 팔찌를 통해서였다.

유리엘이 준 팔찌에는 유리엘의 강력한 마법이 새겨져 있었다. 충격에서 보호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수화불침에 산소까지 공급해 주는 쉘터 기능까지 있었다. 만약 일정량 이상의 충격이 가해질 경우에는 집으로 안전하게 텔레포트 시켜주는 기능까지 첨부되어 있는 강력한 보호 마법기였다.

특히 강민과 유리엘이 없는 경우 사건이 발생하는 것에 대비하여 유리엘이 원거리에서도 팔찌 주위를 살필 수 있도록 되어 있었고, 일주일 전의 상황까지 기록되게 되어 있어 사건의 전후마저 알아볼 수 있는 마법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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