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
현세귀환록
022. 개입(1)
“으아악! 이 자식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이형태는 고통에 중심을 부여잡고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다. 그러곤 분노가 고통을 이겼는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일어나 강민에게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이형태의 주먹은 강민의 손에 빨려들어 갔고 강민이 손을 쥐어 이형태의 오른손을 으스러뜨렸다.
으드득!
“으악! 악!”
이형태는 아마 평생 오른손은 쓸 수 없을 것이다. 뼈가 부러진 게 아니라 으스러졌으니 말이다.
이형태의 손을 으스러뜨린 강민은 잠시 그들에 대한 처분을 생각했다.
사실 저 둘은 이미 성행위를 할 수 없을 것이기에 이런 일을 다시는 못 하게 해달라는 유선의 주문은 달성한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봐선 저 둘은 사회적인 권력이나 재력을 지닌 기득권층임이 분명했다. 이형태는 내던져진 상태에서도 일광회를 운운하지 않았는가. 이 상태로 그냥 내버려 둔다면 필시 보복을 하기 위해서 날뛸 것이다.
그렇다고 보복이 귀찮다는 이유로 죄를 지은 자를 모조리 죽인다는 것도 무리였다.
강민은 기준이 명확한 남자였지만 그 기준대로 일을 처리하면 결국 세상의 기득권 전체와 싸워야 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기득권층과 싸우는 것이 두려운 것은 아니다. 과거에는 실제로 그런 적도 많았고 그들을 멸절시킨 적도 많았다.
하지만 기득권을 처리한 곳에는 다른 기득권층이 생겼고 그들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또다시 부패하는 경우가 많았다. 강민은 그런 그들을 다시 처리했었다.
그런 일이 반복되는 비슷한 흐름에 강민과 유리엘은 지루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차원마다 몇 가지 행동 양식을 결정해서 생활했던 것이 바로 그 이유였다.
그리고 강민은 아직까진 이 차원에서의 행동 양식을 지키고 싶었다. 이번엔 단순한 지루함을 극복하기 위해서가 아닌 가족의 일상을 위해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없었을 때 가족들이 이런 일을 겪었으면 어떠했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만약 강민이 없었다면 가족들은 이런 범죄에 그냥 노출되었을 것이고 범죄자가 기득권층이라면 제대로 된 구제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어차피 강민은 돌아왔고 이제는 가족들이 그런 위험을 겪을 일은 없지만 일상을 지킨다는 생각에 가족들이 더 좋은 세상에 살 수 있는 길을 포기할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면적으로 나서서 기득권층을 척결하고 세상의 개혁까지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강민 주위에서라도 강력범죄에 대해서 근절해 놓는 것이 가족들을 위하는 길일 수도 있었다.
‘어느 정도는 주변 정리를 하고 힘을 보여야 하려나……’
일단 김창민과 이형태의 처리가 우선이었다.
“이걸 배워두길 잘했군.”
강민은 최근에 지나쳐왔던 차원에서 몇 가지 술법을 배웠는데 이번에 써먹을 생각이었다.
지금 강민이 펼치려는 술법은 일종의 금제법으로 스스로 악한 마음을 갖는다면 극심한 두통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작용하는 술법이었다. 삼장법사가 손오공의 머리에 씌웠던 금고아와 같은 술법이랄까.
강민이 둘의 머리를 각각 가리키며 ‘옴’이라는 짧은 진언을 말했다.
강민의 손에서 푸른 기운이 쏘아져 나가더니 둘의 머릿속으로 사라졌다.
“으아악!”
“으악!”
아까 전 중요 부위에서 발생했던 고통은 지금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둘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일을 마친 강민이 유선을 돌아보자 정신을 차린 은선과 껴안고 펑펑 울고 있었다.
“이제 이놈들 나쁜 짓 못 할 겁니다."
“감사합니다. 흐흑…….”
“일단 여기서 나가지요. 어디로 데려다드릴까요?”
“아까 총학생회 건물로 가기로 했어요…….”
“그럼 잠시.”
강민은 유선과 은선을 잡고 걸음을 옮겼는데, 은선과 유선의 입장에서는 마치 순간 이동을 한 듯 순식간에 총학생회 앞으로 도착했다.
유선과 은선을 내려놓은 강민은 다시 걸음을 옮겨서 사라졌다.
강민이 사라지는 뒷모습에 은선이 불러 세우려 했으나 강민은 그것을 못 들은 양 그냥 사라져 버렸다.
한참 동안이나 강민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던 유선은 꼭 한국대에 다시 와서 강민을 찾아 감사 인사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이내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강민의 얼굴이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사람의 얼굴을 꽤나 잘 기억하는 편인 유선으로서는 생명의 은인이라고 할 수 있는 강민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사실에 스스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매점으로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고 돌아가는 강민의 발걸음은 가볍지만은 않았다.
가족들의 일상 지킨다는 입장과 가족들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든다는 명제에서 어느 쪽에 무게를 둬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렇고 유리엘의 인식 장애 결계는 편리한데? 일반인에게 힘을 쓰면서도 정보 통제에 대해 우려할 필요가 없단 말이야.’
유리엘은 최초 금강산에서 서울로 올 때 헬기에 사용된 인식 장애 결계를 보고 원리를 파악해 강민의 반지에 걸어줬다. 이것은 필요한 경우 간단한 마나 주입만으로 인식 장애 결계를 만들 수 있었다.
이중 구조로 이루어진 결계는 라 반경 30미터까지는 직접 관련자 이외에는 인식을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관련자라 하더라도 강민의 신체에 별도로 인식 장애를 발생시켜 강민이 능력을 발휘하더라도 일반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조치한 것이다.
강민과 유리엘 둘만 지냈던 과거의 차원에서는 필요 없는 조치였다. 그러나 이곳에 와서는 일상에서도 알려지지 않게 능력을 사용할 필요를 느꼈고, 그것의 해결 방안으로 유리엘이 만든 것이었다.
물론 불특정 다수에게 작용하는 방식이라 마나 능력자에게는 통하지 않았지만, 어차피 마나 능력자는 별도로 처리하면 되었기에 문제는 없었다.
한편 축제의 메인 무대 라인업은 급하게 수정되었다. 첫 번째 공연을 담당할 써니데이가 출연하지 못하게 되어 동아리 연합회에서 내세운 락밴드 블루캐슬이 그 대타를 섰다.
성폭행은 미수에 그쳤지만, 아직 어린 여성들이 그런 일을 겪고 곧바로 무대에 설 수는 없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은 써니데이가 아직 인지도 있는 인기 아이돌이 아니었기에 공연 취소에 따른 큰 소란은 없었다. 연예인의 섭외를 맡은 자유전공학부의 체면이 다소 구겨지긴 했지만 그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 * *
축제 기간이 끝난 뒤 며칠 후.
평소와 같이 강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강민과 유리엘은 오랜만에 가족들에게 외식을 권했다.
“오빠, 미안한데 난 선약이 있어. 미안, 헤헷.”
“선약? 그럼 어쩔 수 없지. 그럼 내일은 어때?”
“내일은 괜찮아. 그럼 난 약속이 있어서 나가 볼게. 이따 봐.”
평소에 아끼던 핑크빛 원피스를 입은 강서영은 서투르지만 화장까지 한 예쁜 모습으로 집을 나섰다.
평소와는 다른 강서영의 모습에 강민이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유리엘에게 물었다.
“유리, 서영이 혹시 연애하는 거야?”
“민도 참, 오빠가 되어서 동생한테 관심 좀 두세요. 서영이 저번 달에 소개팅해서 지금 만나는 남자 있어요.”
“뭐? 유리는 어떻게 알았어?”
“서영이가 저한테 상담하더라고요. 오빠보다 새언니가 더 믿음직스러운가 보죠. 호호.”
강민도 가족에게 신경을 쓰고 있었지만, 어리게만 보았던 여동생이 연애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약간 놀랐다.
강서영은 남자인 강민보다 여자인 유리엘에게 좀 더 의지하고 있었다. 이미 유리엘에게 친구 관계, 선후배 관계 등 여러 가지 상담을 했고 만족할 만한 답을 얻었기에 연애문제에 대해서도 유리엘에게 상담을 했었던 것이었다.
어쩌면 강민은 강서영에게 아버지와도 같은 느낌이었기에 연애 같은 상담을 하기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하핫, 참. 나한테 비밀 만든 거야, 유리? 말도 안 해주고 말이야.”
“난 민이 언제 서영이가 연애하는 걸 알아차릴까 내심 궁금했어요. 생각보다 오래 걸렸는데요? 후훗.”
“근데 어떤 녀석이야? 유리가 확인했지?”
“네, 이야기 듣고 한번 확인해 봤는데 마나 성향으로 봐선 그렇게 나쁜 녀석은 아닌 것 같아요. 다만…….”
“다만?”
“마나 색이 좀 흐린 걸로 봐선 강단이 없고 좀 심약하긴 한 것 같아요.”
“그건 그리 문제 될 거 같진 않은데. 근데 뭐하는 녀석이래?”
“하하하, 민도 이럴 때 보면 어김없는 보통 오빠네요.”
“뭐 그렇지…….”
유리엘의 말에 강민이 쑥스러운지 머리를 긁적거렸다.
“같은 한국대학교 학생인데, 약대 3학년인가 그렇다네요. 나이는 26살이라 하고, 저번 달에 친구들이랑 과 미팅 갔다가 만났대요. 남자가 꽤 소심해 보이던데 용케 고백은 했나 봐요. 서영이도 그리 싫지 않은지 오케이했고요. 그래서 저번 달부터 만나기로 했대요.”
“이번이 서영이 첫 연애지? 괜히 상처받는 일 없었으면 좋겠는데…….”
“너무 걱정 말아요. 어차피 사람을 만나다 보면 만났다가 헤어지고 하는 거죠. 그러면서 인간관계를 알아가지 않겠어요?”
“난 유리밖에 없었는데? 이제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
강민이 유리엘을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유리엘은 강민의 영혼이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강민은 그런 남자였다. 한순간도 유리엘에게 진실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진심이지 않은 적이 없었다.
영혼까지 함께 나눈 둘이 서로의 감정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서 유리엘은 더 고마웠다.
잠깐의 침묵 속에서 둘의 감정이 오갔다. 한껏 충만해진 기분으로 유리엘이 말을 했다.
“…… 우리와 같은 사이는 없을 거예요. 과거에도 미래에도, 그 어디에도.”
강서영은 미니쿠퍼를 몰고 약속했던 홍대 앞 프랜차이즈 카페로 갔다. 적당한 곳에 주차를 하고 카페로 들어가니, 카페에는 한수찬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수찬은 170센티미터 중반의 키에 몸도 호리호리한 모범생 이미지의 학생이었다. 약간 긴 머리에 뿔테안경은 별로 놀지 않고 공부만 했던 모범생 이미지를 더 부각시켰다.
“오빠 언제 왔어? 많이 기다렸어?”
“아, 좀 전에 왔어. 괜찮아.”
“근데 표정이 왜 그래?”
“아냐, 내 표정이 어때서?”
“글쎄, 왠지 좀 어두운 것 같아서…….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어?”
“아무 일 없어, 하하. 뭐 마실래?”
“마시기에는 여기 너무 비싼데? 어차피 영화 보러 가기로 했으니까 그냥 바로 영화관 가서 기다리자.”
“으이구, 그렇게 안 아껴도 돼. 여튼 그래, 그럼. 영화관으로 가자.”
강서영은 그간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한 번도 미팅이나 소개팅을 나간 적이 없었다.
귀여운 얼굴에 대시를 받은 적은 꽤 많았지만 여유가 없었기에 다 거절했고, 과외 여왕이라는 별명과 동시에 철벽녀라는 별명도 있었다.
하지만 강서영은 그런 별명에 신경 쓸 여유도 없었다. 학비와 생활비 벌이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강민의 귀환 후 상황은 달라졌다. 과외는 하나만 남기고 다 줄였기에 시간적 여유도 생겼고, 오빠가 든든히 받쳐주고 있으니 마음에 여유도 생겼다.
그런 강서영의 상황을 알아챈 친한 친구가 강서영에게 미팅을 나가자고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