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세귀환록-20화 (20/203)

# 20

현세귀환록

020. 축제(4)

생활력이 강한 유선은 피팅 모델 알바나 잡지사 알바, 서빙 알바 등 아르바이트를 많이 해서 이것이 일종의 텃세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유선은 언제나 웃는 얼굴로 그 텃세에 대항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텃세 역시 사라진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선은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해서 사회생활을 잘 모르기에 이런 상황이 낯설기만 했고 그럴수록 자신에게 잘 대해주는 유선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네 명이 모여 써니데이가 만들어진 지는 6개월도 채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아직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부분도 많았다. 때문에 서로서로 비슷한 처지의 둘씩이 각각 더 친해졌다.

시간이 지나면 서로 다 친해질 것이라고 유선은 생각하긴 했지만 사람의 앞일은 모르는 것이었다.

은선에게 대학은 신기한 곳이었다. 데뷔 준비를 하느라 대학교에 못 간 은선은 대학에 진학한 친구들을 만나러 서울 시내의 몇몇 대학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은선은 대학의 분위기에 취했었다. 특히 고교 시절의 억눌린 무언가가 대학에 와서 드디어 분출되어 터져 나온 자유로움 같은 것들이 느껴지는 소규모 공연 등을 볼 때면 몸에 소름이 돋는 희열감을 느끼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똑똑하다는 학생이 오는 인재들이 온다는 한국대는 어떨까? 여기도 홍대처럼 버스킹 같은 걸 할까? 저번에 영운대에서 봤던 마임은 정말 감탄스러웠는데…….’

유선과 은선은 우선 이따가 그녀들이 노래할 대운동장의 메인 무대를 먼저 확인했다. 대운동장에 설치되어 있는 무대에는 학생 밴드가 열정적으로 공연을 하고 있었다. 공부만 하는 한국대 대학생이라고 폄하하기엔 연주의 수준이나 관객들의 공연 관람 매너가 여타 대학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써니데이는 아직 신인 아이돌이다 보니 알아보는 사람이 없어서 편하게 공연을 관람했다. 물론 일반인이라기엔 우월한 외모에 간혹 전화번호를 물어보는 학생들이 있긴 했지만 이런 경우가 자주 있었는지 굳이 연예인임을 밝히지 않고 좋은 얼굴로 돌려보냈다.

잠시 후 학생 밴드의 공연이 끝나자 준비된 순서인지 댄스동아리의 댄스 시연이 있었다. 최신 유행하는 아이돌의 노래에 맞춘 안무부터 시작해서 신나는 댄스 팝송에 맞춘 창작 안무까지, 축제를 위해 준비한 학생들의 열정이 돋보였다.

한참 동안 댄스 공연을 보던 유선이 은선에게 말했다.

“은선아, 공연은 그만 보고 캠퍼스 구경해 보자. 나도 한국대는 처음 온 거라 캠퍼스 구경해 보고 싶었거든.”

“네, 언니.”

유선과 은선은 대운동장의 메인 무대를 떠나 캠퍼스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건물 사이사이 공터마다 과에서 주최하는 과 주점이 많이 있었고, 건물 한편에는 메인 무대에 오르지 못했던 소규모 동아리들의 공연이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었다.

산을 등지고 들어섰던 한국대학교는 산 아래쪽 토지 가격의 상승에 따라 많은 대학이 그렇듯 산을 깎아 건물을 확장해 나갔는데 지금은 어느샌가 산의 초입을 넘어선 곳까지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유선과 은선은 산의 능선을 따라 점점 올라가고 있었는데 여기저기 볼거리도 많았고 이벤트도 많아 심심해하지 않게 캠퍼스를 구경할 수 있었다.

한참을 구경하다 보니 길은 잘 닦아져 있지만 인적이 그리 많지 않은 곳까지 다다랐다.

“은선아, 여기서 돌아서 반대쪽으로 내려가자. 위쪽으로는 더 이상 별거 없어 보여.”

“언니, 이 길 따라 조금만 가면 건물 하나 더 나올 텐데 그거까지만 구경해요. 아까 인문대 구경 갔을 때 멀리서 그 건물을 봤는데 얼핏 보니 모양이 그리스 시대 신전이랑 비슷해 보이던데, 궁금해서요.”

“그래? 알겠어.”

그렇게 다시 걸어가는 길은 2차로 도로 옆의 인도였다. 우거진 나무가 청량한 느낌을 주었고, 산새 소리도 들려서 꼭 등산하는 기분이었다.

멀리서는 학생들의 공연 소리가 아련히 들려오고 있었기에 약간은 몽환적인 느낌으로 기분 좋게 길을 올랐다.

5분여를 걸어가다 보니 아까 은선이 말했던 건물이 보였다.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을 모티브로 했는지 큰 건물을 둘러싼 기둥들이 인상적으로 보였다.

“언니, 여긴 뭐 하는 건물일까요? 모양을 보니 미술대학인가?”

“아니, 아까 미술대는 지나쳐 왔잖아. 국립대이다 보니 건물들이 특색있지는 않은데 여긴 특이하네. 모양은 공연장 같은데 위치로 봐선 아닌 것 같고.”

“한번 들어가 봐요. 언니.”

“그래.”

대학의 건물들은 교수연구동이나 전산 서버가 있는 곳 등 출입제한이 있는 곳을 제외하곤 출입이 자유로웠다. 그렇기에 둘은 이미 여기저기 들어가 구경을 했었다.

건물에 가까이 가자 은은한 음악 소리가 흘러나왔고 입구를 보니 다른 건물들과는 달리 출입카드를 인식하지 않으면 문이 열리지 않도록 보안 장치가 되어 있었다.

“언니, 여긴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인가 봐요.”

“그러네. 은선아, 그만 돌아가자. 아직 반도 구경 못 했으니 나머지 쪽으로 돌아봐야지.”

“네, 언니.”

말을 마친 둘이 돌아가려는 찰나 건물 안에서 사람이 나왔다. 김창민이었다.

건물 입구의 유리문은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있지만, 밖에서 볼 때는 거울로 보이는 형태였다.

유선과 은선은 건물 안에 있는 김창민을 보지 못했지만 김창민은 건물 안에서 둘을 살펴보다 써니데이의 멤버임을 알아차렸다.

써니데이는 김창민이 알고 있을 만큼 유명 그룹은 아니었지만, 오늘 학교에서 공연을 하게 되어 있었기에 알아차린 것이었다.

“저기, 혹시 써니데이 아니신가요?”

유선과 은선은 갑자기 건물의 문이 열리며 사람이 나와 자신들을 알아보자 잠깐 놀랐지만 이내 연예인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했다.

만약 자신들을 알아보지 못했다면 그냥 자리를 피했으면 되었을 것이지만 자신을 알아본 일반인 앞에서 그냥 매몰차게 자리를 피했다가는 괜한 구설수에 오를 수가 있어 어색하지 않게 응답하였다.

“아, 저희가 그렇게 유명하진 않은데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호호”

“아뇨, 써니데이 유명하지요. 그때 그 음료 광고 음악은 정말 산뜻하고 좋던걸요?”

김창민이 라인업을 처음 볼 때 ‘써니데이가 누구야?’ 하며 알아보았던 정보가 이렇게 도움이 되었다.

“감사합니다.”

“근데 여기에는 어떻게?”

“아, 학교 구경을 이리저리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네요. 여긴 문이 잠겨 있어서 들어가면 안 되는 곳 같아서 돌아가려고 했어요.”

“아, 그러시구나. 여긴 자유 전공 학부 건물입니다. 보시다시피 학과생 아니면 출입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은선은 학과생 아니면 출입이 안 된다는 말이 의아했다. 여태껏 방문한 건물은 모두 개방이 되어 있었다. 타과생이 출입할 수 없는 것이라면 이 건물에 수업을 들으러 오는 학생이나 강의를 하는 교수는 어떻게 한다는 건지 다소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유선은 자유 전공 학부라는 이야기를 듣고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최초 한국대에 기부입학을 전제로 한 자유 전공 학부가 개설될 때 여론이 뜨거웠기에 사회 문제에 관심이 있었던 유선은 자유 전공 학부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이다.

‘부유층 자제만의 리그겠지? 하긴, 이제 나도 연예인이니 우리만의 리그에 들어온 건가?’

사실 자유 전공 학부 건물에는 강의가 없었다. 다들 원하는 과에서 원하는 수업을 듣기에 과 건물 내에서 강의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과 건물은 연회장이나 회의장, 그리고 학생별 개인 방이 있을 뿐이었다.

김창민은 170cm 정도의 크지 않은 키에 평범한, 아니, 약간 못생겼다고 할 만한 얼굴이었다. 외모만 보았을 때 호감 가는 인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름 명품 의상을 세련되게 걸치고 있고 패션 감각도 크게 나쁘지 않아서 외모적인 단점을 커버해 주었고, 무엇보다 화술이 능수능란해 대화에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물론 이성으로써는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지만.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저 위 연회장에서 파티를 하는데 잠시 들어와 보시겠어요? 맛있는 음식도 많이 있어요. 하하하.”

김창민은 그녀들이 모르면서 온 것처럼 행동하고 있지만 실은 신인 연예인 둘이 내심 스폰서 같은 걸 기대하고 왔을 것이라 지레 생각했다.

‘아마 현호가 엮어주지 못하니까 돈 급한 년들이 알아서 온 것 같은데. 위에 올라가서 품평 좀 해보자.’

김창민의 인도에 따라 연회장으로 들어가니 10여 명의 남학생이 세련되게 옷을 차려입고 두셋씩 앉아 식사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은은한 클래식 음악이 나와서 분위기 또한 그럴싸해 보였다.

“어때요? 분위기 괜찮죠?”

“아, 네…….”

유선과 은선은 데뷔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기에 이런 상류층의 분위기에는 아직 적응하지 못했다.

김창민이 유선과 은선을 데리고 들어오자 몇몇 남학생이 김창민에게 접근했다.

“창민아, 오늘 준비된 인원인 거야?”

“근데 왜 두 명뿐이야?”

“야, 아니야. 이분들은 오늘 축제 때 공연해 주실 써니데이 분들이야.”

김창민의 소개에도 서너 명의 학생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써니데이? 누구지? 야, 너 들어봤냐?”

“아니, 처음 들어보는데. 무슨 노래 불렀지?”

갸웃거리는 학생들에게 김창민이 말했다.

“야, 그 노래 있잖아. 일양에서 나온 오렌지 주스 광고 음악. 따라라 따라라~ 하면서 하는 거. 기억 안 나? 그 노래 부른 분들이야.”

“아~ 그 노래 부른 가수구나. 근데 여긴 어떻게?”

유선과 은선은 주위에서 쏟아지는 질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방송 때의 인터뷰는 보통 대본이 있었고, 갑작스러운 질문은 지선이 답변했었다. 때문에 지금 이 상황에서 둘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를 만큼 정신없이 대답했다.

둘은 정신이 없었기에 연회장에 남자밖에 없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둘에게 질문이 쏟아지고 있을 때 한 남자가 김창민을 살짝 불러냈다.

“야, 쟤네들은 뭐야? 현호가 없어서 오늘은 그냥 텐프로 애들 불러서 놀기로 한 거 아냐?”

“텐프로 애들 오려면 두 시간 남았잖냐. 쟤들은 과 건물 밖에서 어리바리하게 서 있던 신인 연예인인데, 내 생각엔 우리 과 애들이 스폰해 준다는 말 듣고 찾아온 것 같아.”

“스폰?”

“그래, 그렇지 않고서야 매니저도 없이 둘이서 인적 드문 여기까지 올 이유가 없지. 스폰받고 있는 신인배우나 연습생들 말 듣고 찾아온 것 같다.”

“그래? 근데 둘 뿐이니 어떡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해? 일단 내가 스폰할 생각 있는지 애들한테 물어볼게. 많으면 추첨하던가. 자기들이 찾아올 정도니 대충 시세는 알겠지. 크크큭.”

“그래, 저기 더 어린 쪽이 내 취향인데 나 저기 한 표다.”

“알았어, 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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