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
현세귀환록
019. 축제(3)
유니온이 능력자 세계에서 공무원급의 직장이라고는 하지만, 세계에는 많은 이능 단체가 있었고 서로 힘 싸움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큰일의 경우에는 유니온 총본부 차원에서 지원을 해주긴 하나 일반적으로 사안이 발생하면 해당 국가의 본부에서 일을 처리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런 상황에서 강한 동료와 함께한다는 것은 다른 단체와의 힘 싸움에서 좀 더 좋은 포지션을 차지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렇기에 김창수는 지금 별다른 소속이 없는 강민이 더욱 아쉬웠다.
결국 경기는 상과대 펠레의 2:1 승리로 끝났다. 2골 다 박상혁이 만든 골이었는데 두 번째 골은 그림과 같은 바이시클 킥이었다.
[저 녀석 순진한 건지 영리한 건지…….]
[무슨 소리예요, 민?]
[저렇게 바람을 다룰 수 있을 정도면 그냥 대충 찬 다음에 바람을 이용해서 골을 넣을 수도 있잖아.]
[그것도 그렇네요. 하긴, 경기하는 걸 보면 능력을 쓰지만 스스로에게만 사용하지 상대방을 방해하는 식의 능력 발휘는 없네요.]
[속임수가 아니라 스스로 능력으로 이겼다는 자위를 하고 싶었던 걸까? 그렇다면 순진한 생각일 테고…….]
[사물이나 타인에게 능력을 사용해서 다른 사람이 이상하게 여길 여지를 하나도 주지 않으려 한다면 영리한 것이겠지요.]
[뭐 유니온에서 알아서 잘하겠지.]
강민은 더 이상 박상혁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애초에 크게 관심을 갖고 지켜본 것도 아니었고, 게다가 아무런 인연도 없었기에 유니온에게 연락해 준 것만으로도 박상혁에겐 큰 호의를 베푼 것이었다. 물론 박상혁이 그것을 호의로 느낄지는 별개지만.
상과대 펠레의 우승에 상대생들은 다 같이 기뻐했다. 김만석도 후반 30여 분을 뛰었다. 수비수로 들어간 김만석은 상대 팀의 기습적인 공격을 두어 차례 막는 수훈을 세웠기에 우쭐거리며 일행에게 다가왔다.
“봤지? 봤지?”
“봤다, 자식아. 생각보다 잘 뛰는데?”
“지은아 너도 봤어?”
김만석은 우지은의 눈치를 살피며 우지은에게만 다시 물어봤다.
“그래, 잘하더라.”
“그치? 그치? 선배들이 이렇게, 이렇게 덤벼드는 걸 내가 샤샥 피하면서 태클을 걸었잖냐~ 하하하.”
영혼 없는 대답이었지만 김만석은 우지은의 반응에 기뻤는지 아까 경기 때의 모습을 과장해서 흉내 냈다.
“풋, 그만해 만석아. 주위에서 다 쳐다보잖아.”
우지은이 웃었다는 사실에 고무된 김만석은 몸놀림을 더욱 우스꽝스럽게 했다. 덕분에 우지은은 오랜만에 크게 웃으며 그런 김만석을 말렸다.
경기장이 정리된 후 축구부 뒤풀이가 있었지만 김만석은 뒤풀이를 빠지고 강민 일행에게 왔다.
“만석아, 축구부 뒤풀이 안 가도 돼?”
손유정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 뭐. 일이 있다고 했어.”
상과대 펠레는 전문적으로 운동하는 운동부가 아니라 단지 대학의 단대 동아리에 불과했기에 엘리트 체육인들과 같은 군기는 없었다.
그러나 어느 집단에서든 큰일을 치르고 뒤풀이를 하는데 빠지면 찍히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다못해 조기축구회조차도 대회 후 뒤풀이를 빠지면 안 좋은 말이 나오지 않는가. 더군다나 신입생이 빠지는 건 동아리에서 좋게 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김만석은 우울해하던 우지은이 정말 오랜만에 자신의 행동에 웃음을 보이자 동아리 뒤풀이에서 빠지는 무리수를 두면서도 그녀가 계속 웃도록 해주고 싶었다.
아직은 일방적 짝사랑이었지만 김만석은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적극적으로 우지은의 기분을 풀어주려 노력했다.
“민이 형, 그럼 우리 과 주점에 가 보는 게 어때요? 아직 G&B나 김승현 오려면 시간도 좀 남았는데.”
“만석아, 걔네 말고 여자 아이돌도 온다 하지 않았어? 써니 뭐라던데.”
“써니데이가 온다더라.”
“아, 그래, 써니데이. 라인업 보고 검색해 봤는데 다들 쭉쭉빵빵이던데? 히히.”
역시 눈치 없는 안경일은 손유정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도 모르는 채 써니데이 4인조의 외모를 묘사했다.
보통 안경일이 눈치 없이 행동할 때 손유정이 옆구리를 찔러서 주의를 주곤 했는데 그런 손유정이 가만히 있으니 안경일에게 눈치를 줄 사람이 없었다.
오늘 한국대학교에 오기로 한 연예인은 G&B와 김승현, 써니데이까지 총 세팀이었다.
G&B는 데뷔한 지 5년 차 되는 6인조 남자 아이돌로 중견급 정도의 인지도 있는 인기 그룹이었고, 김승현은 감미로운 발라드를 부르는 30대 중반의 가수였다.
마지막으로 써니데이는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인지도는 별로 없지만 최근 음료 CM 하나가 히트 치면서 조금씩 이름을 알리고 있는 4인조 여자 아이돌이었다.
한참 동안 안경일의 말을 듣고 있던 손유정이 결국 얼굴이 붉어진 채 가방으로 안경일의 등을 퍽 하고 치더니 뒤로 뛰어갔다.
“억! 누구야! 어? 유정아!”
안경일은 손유정을 잡으려고 그녀를 쫓아갔고 그런 둘의 뒤통수에 대고 김만석이 소리쳤다.
“과 주점에 먼저 가 있을 테니 사랑싸움 적당히 하고 와~!”
김만석의 말에 다시금 우지은이 큭큭대며 웃었다.
* * *
학생회관 앞에 승합차가 한 대 섰다. 네 명의 여성이 승합차에서 내렸는데 하나같이 비율이 좋았다. 써니데이였다.
연예인들이 자주 타고 다니는 외제 밴도 아니었고, 아직 인지도가 높은 아이돌이 아니었다. 그 탓에 예쁜 외모에 몇몇 학생들은 돌아보긴 했으나 연예인임을 알아보는 학생들은 없었다.
그렇기에 흔한 선글라스 하나 안 쓰고 그냥 차에서 내렸을 것이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로드 매니저가 창문을 열고 써니데이에게 말했다.
“7시부터 시작이니까 세 시간 정도 학생들이 준비해 놓은 대기실에서 기다리다가 가면 될 거야. G&B 애들 8시에 공연 예정되어 있으니 그때 너네 픽업할 차 같이 올 거야 그거 타고 숙소로 돌아가면 돼. 그럼 나중에 보자.”
“네, 수고하셨습니다!”
네 명의 여성은 맞추기라도 한 듯 떠나가는 차를 향해 90도로 인사했다.
써니데이와 G&B는 같은 소속사였는데 그 대우는 천지 차이였다. G&B는 실장급 전담 매니저가 함께하며 전담 코디, 로드 매니저에 보조 매니저까지 두고 있었지만 써니데이는 신인 아이돌이라 전담 로드매니저도 없었다.
써니데이가 소속되어 있는 루엘 엔터테인먼트는 성과에 따른 보상이 확실한 곳이었다. G&B 같은 인기 그룹은 최고의 대우를 받았지만 신인 연예인에 대한 대우는 형편없었다.
써니데이 역시 기숙사 같은 합숙소에 머물고 있었는데 이런 신인 그룹 전체를 총괄하는 매니저가 그 일정을 짜고 로드 매니저 역시 두 세팀의 신인을 함께 이동시켰다.
오늘은 지방행사가 있어 장거리를 가는 다른 팀 때문에 로드 매니저가 써니데이를 시작 시간보다 3시간이나 일찍 한국대학교에 내려주고 이동했다.
써니데이 역시 다른 일정은 없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지만 인기 없는 가수의 설움을 느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에휴, 서러우면 인기 얻어야지. 그렇지, 혜선아?”
“그래요, 언니. 나중에 뜨고 나면 꼭 지금 괄시했던 코디나 매니저 자르고 말 거예요. 흥.”
“네가 무슨 힘으로 그 사람들을 잘라?”
“우리가 뜨기만 하면 못할 게 뭐예요. 그냥 걔네 때문에 스케줄 못하겠다고 우기면 회사에서 안 자르고 배길까요?”
“호호, 하긴 그것도 그렇네.”
승합차가 떠난 뒤 두 여성은 한참을 매니저와 코디의 욕을 했고, 나머지 두 명은 학교가 신기한지 여기저기 둘러보고 있었다.
“유선아, 은선아!”
“네, 언니.”
“그만 어리바리대고 이제 들어가자. 이따 공연할 때까지 좀 쉬어야겠어.”
“네, 지선 언니.”
써니데이는 지선, 혜선, 유선, 은선으로 이루어진 4인조 여성 아이돌이었다.
사실 지선과 혜선은 본명이 아니었지만 기획사에서 써니들의 날이라는 의미에서 끝 자를 ‘선’으로 만들어 예명을 맞추도록 하였다.
지선과 혜선은 약간 촌스럽게 느껴지는 예명이 불만이었지만 신인 아이돌이 그런 불만을 내비칠 수는 없었다.
지선과 혜선은 연습생으로 생활한 지 각각 5년, 3년이 지난 장기 연습생이었다. 때문에 대학교 모델 출신으로 갑자기 써니데이에 들어온 유선과 길거리 캐스팅으로 들어온 은선에 대해서 일종의 텃세와 자격지심이 있었다.
자신들은 힘들게 연습생 생활을 하여 간신히 잡은 기회를 유선과 은선은 너무 쉽게 얻었다는 생각을 했고, 기획사의 사람들도 둘의 재능을 더 칭찬했기에 텃세의 기저에는 질투심이 깔려 있었다.
“저기, 여기가 총학생회 맞나요?”
나이가 가장 많고 리더를 맡고 있는 지선이 노크 후 총학생회의 문을 열며 말했다.
“누구신지……. 아! 써니데이시군요. 그런데 매니저분은?”
“아직 신인이라 전담 매니저가 없어서 저희끼리 왔습니다.”
“그러시군요. 이쪽으로 오세요. 근데 공연이 7시 시작인데 너무 일찍 오신 거 같아요.”
“그렇죠? 저희가 아직 스케줄이 많지 않아서 조금 일찍 왔습니다. 혹시 앞 타임이 비면 저희가 좀 더 맡아도 돼요.”
“아, 그래 주시겠습니까? 저희야 감사한 일이지요. 하하하.”
축제의 기획을 담당한 학생과 공연시간, 무대 위치 등을 한참 이야기한 지선은 학생이 쉬라며 학생회실 옆 방으로 안내하고 사라지자 영업용 미소를 지우고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
“에휴, 힘들다. 이런 건 매니저가 해야 하는데 내가 이런 일까지 해야 하다니.”
“그래도 언니 정말 잘하시는데요? 저는 절대 언니처럼 말 못 할 거예요.”
“그래요, 언니. 언니가 리더라서 든든해요.”
혜선은 지선의 눈치를 보며 지선의 기분을 띄워줬고 유선도 한마디 거들며 지선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했다.
“지선 언니, 아직 시간 좀 남았는데 은선이랑 학교 구경 좀 해도 돼요?”
“학교가 다 거기서 거기지, 구경은 무슨 구경이야?”
“은선이는 고등학교 졸업 후에 바로 데뷔 준비 한다고 대학도 못 갔잖아요. 그래도 우리나라 최고 대학이라는 한국대에 왔는데 학교라도 구경시켜 주면 좋을 것 같아서요.”
유선은 지선이 어려워서 말도 못 하고 등 뒤에서 쭈뼛거리고 있는 은선을 대신해서 말을 해줬다. 지선과 혜선이 어려워서 말도 잘 못 하는 은선과는 달리 유선은 지선과 혜선의 텃세에도 나름 부드럽게 반응해서 모나지 않게 행동거지를 잘했다.
여동생 같은 은선이 잘 적응하지 못해서 그만두려고 할 때 유선이 잘 설득해서 남았는데, 그 이후로 은선은 유선을 더 많이 따랐고 지선은 그것이 더 못마땅했다.
“그래, 갔다 와. 대신 공연 삼십 분 전까진 와야 해. 그리고 좀 더 앞에 들어갈 수도 있으니 휴대폰에서 손 떼지 말고. 너무 멀리까지 가지 마라.”
“네, 지선 언니. 은선아 가자.”
단발머리의 은선은 지선과 혜선에게 고개를 꾸뻑 숙이고 유선을 따라 나갔다.
건물 밖으로 나온 은선은 유선에게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은선아, 너도 너무 주눅 들지 말고 언니들한테 자연스럽게 말하렴. 왜 그렇게 기가 죽어 있어?”
“응, 언니. 그치만…… 지선 언니는 너무 무서운걸. 특히 지선 언니가 노려볼 때는 무서워서 딸꾹질까지 날 거 같단 말이야. 혜선 언니는 그나마 낫지만 그래도 무서워.”
“은선아. 언니들이 완벽한 무대를 위해서 혼내는 거지 너를 싫어해서가 아니야. 그러니까 너무 주눅 들지 말고 씩씩하게 나가봐.”
“알겠어, 언니. 노력해 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