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현세귀환록
018. 축제(2)
“여튼 창민이 네가 현호한테 연락 좀 더 해봐. 나도 문자 넣어놓을 테니까. 우리 과 체면도 있으니 내일까지 연락 안 되면 별도로 섭외를 해봐야겠어.”
“네, 형. 일단 저도 전화하고 문자 남겨 볼게요. 근데 그 녀석 요즘 완전히 한의원 찾는데 정신이 팔려서 아마 이번 축제 때 그 녀석 쓸 생각은 포기해야 할 것 같아요.”
“그래, 뭐 어쩔 수 없지. 아무튼 그 녀석 연락되면 나한테도 연락 줘.”
유세진이 힘을 쓰면 최현호 못지않은 연예인 구성도 어렵지 않았다. 재계 2위 현승그룹의 힘은 SG엔터가 아무리 업계 1위라 하더라도 일개 엔터 기획사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회사에 실질적인 힘을 쓸 수 있는 최현호와는 달리, 유세진은 단지 후계자일 뿐이었고 회사에 직함 하나 없었기 때문에 힘을 쓰려면 여러 사람에게 부탁을 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결국 유세진은 최현호의 도움 없이 연예인을 섭외했다.
최현호 외에는 SG엔터에 아는 사람이 없었기에 현승그룹 홍보실을 통해서 몇몇 연예인을 소개받아 동원하였다.
현승그룹과 척을 지고 싶은 연예인은 아무도 없었기에 수월하게 섭외되어, 자유 전공 학부의 체면은 살았으나 최현호가 주최하는 뒤풀이를 기다렸던 학생들은 다소 아쉬워했다.
* * *
한국대학교의 축제는 3일간 진행되었는데 주로 낮 시간대에는 운동경기나 소소한 이벤트가 많았고 오후부터 학내 동아리의 댄스 공연이나 학내 밴드의 음악 공연으로 이어졌다.
저녁이 어스름해지면 섭외를 하였던 가수나 아이돌이 나와서 피날레를 하는 전통적인 방식의 축제였다.
운동경기는 축구, 농구, 족구 등의 경기가 이루어졌는데 축제 3일간 수많은 과와 동아리의 경기를 모두 할 수가 없기에 학기 초부터 리그를 만들어 경기가 이루어졌고, 결승전만 축제 기간에 시행되었다.
경영학과는 구기 쪽에 그리 우수한 인재가 없었는지 축구, 농구, 족구에 학과대표로 나간 팀이 모두 예선에서 떨어졌다.
다만 상과대 연합 축구동아리 ‘펠레’가 결승에 올라가 체육교육학과 팀과 승부를 가르게 되어 어느 정도 체면치레를 했다 할 수 있었다.
김만석은 주전은 아니었지만 ‘펠레’에 가입해 있었기에 혹시 벤치 멤버인 자신이 출전할지도 모른다는 핑계로 강민과 그 일행에게 응원을 해달라고 꼬드겼다. 축제 기간 별다른 일정이 없었던 일행들은 기꺼이 응원하러 나갔다.
“만석아, 너 진짜 나갈 수 있긴 한 거야?”
한낮 땡볕에 그늘도 없는 운동장 응원석에 앉아 있는 것이 불만인지 안경일이 따지듯이 물었다.
“그럼~ 지금 2학년 주전 선배 한 명이 몸살 기운이 있어서 전반만 뛴다 했어. 후반부터 출전 준비하라던 걸?”
“어리바리 만석이가 축구에 소질이 있는지 몰랐네.”
“야, 손유정. 내가 무슨 어리바리냐! 경일이라면 몰라도.”
“뭐래~ 경일이가 너보다 훨씬 빠릿빠릿해. 눈치가 좀 없어서 그렇지…….”
“하하핫, 그래, 맞다. 저 녀석은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어.”
“내가 뭐?”
“근데 너 경일이 커버해 주는 거야? 안 그래도 요즘 둘이 좀 이상한데?”
“이,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발끈하는 게 더 이상해. 안경일 뭐냐? 그 부끄럽다는 표정은? 너네 혹시?”
“아냐!”
“아직은…….”
손유정은 아니라고 말했고, 안경일은 아직이라고 말했다. 둘의 다른 대답에 기회를 잡았다는 듯 김만석은 둘을 몰아붙였다.
“아직? 아직이라고 했지?”
“아, 아니. 말이 헛나왔어.”
“둘이 심상치 않다 했더니, 설마…….”
처음엔 장난처럼 둘을 엮어갔던 김만석이었지만, 둘의 대답이 심상치 않자 왠지 묘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손유정의 얼굴이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것도 심상치 않아 보였고 안경일의 당황하는 듯한 모습을 보니 둘이 사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야, 너네 솔직히 말해봐. 둘이 사귀냐?”
“만석아, 그만하자. 유정이 부끄러워하잖아. 나중에 내가 따로 말해줄게.”
안경일의 말에 손유정은 아무 말 없이 얼굴만 달아올라 있다가 화장실에 간다며 자리를 비웠다.
“진짜 너희 뭐야?”
“아, 짜식. 때가 되면 어련히 말해줄까 봐.”
“뭐야? 진짜 사귀는 거야?”
“썸타고 있어. 사귀는 듯, 안 사귀는 듯, 사귀는 것 같은 사이다.”
“뭔 헛소리냐?”
“고백했는데 시간 좀 달래. 그래서 기다리는 중이야.”
“뭐?! 이 자식 보기와 다른데?”
“뭐가? 내가 보기가 어때서?”
“어떻기는, 공부랑 게임만 하던 범생이 오타쿠 같지.”
“뭐? 이 자식이!”
김만석과 안경일, 손유정이 투닥거리는 것을 귀엽다는 듯 보던 강민과 유리엘은 한쪽 옆에서 어두운 표정으로 앉아 있는 우지은을 보았다.
[지은이는 아직도 저러네.]
[아직 어린아이니까 이것도 실연이라면 실연이겠지요. 그래도 첫 연애를 나쁜 놈하고 해서 남자 혐오증 같은 거 걸리는 것보단 낫겠지요.]
[뭐 그렇긴 하지만.]
우지은은 최현호를 만난 그 날 이후 며칠간 최현호의 연락을 기다렸다. 우지은 스스로는 그 날 최현호도 자신에게 마음이 있었다는 확신을 하고 있었기에 조만간 연락이 올 거라 생각했던 것이었다.
우지은의 확신은 착각은 아니었다. 분명 당시 최현호는 우지은에게 관심이 있었다. 물론 그 관심이 우지은이 생각하는 통상적인 연애로 이어질 것이 아니라 단순히 몸에 있던 관심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최현호가 조건부 성불구자가 된 이후로 최현호의 머릿속에는 우지은의 존재 자체가 없어졌다. 지금도 자신의 성 기능을 되찾기 위해서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있지 않은가.
일주일가량 최현호의 연락을 기다린 우지은은 먼저 용기를 내어 최현호에게 연락을 해봤지만, 당연히 답이 없었다. 두어 차례 더 연락을 해봐도 답이 없자 우지은은 급격한 실의에 빠져들어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였다.
백마 탄 왕자를 만난 공주가 될 것이라는 장밋빛 미래에 빠져들었던 순진한 소녀의 환상 속 사랑이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김만석은 그러한 우지은을 보며 안타까워했고, 오히려 우지은의 기분을 띄워주려고 평소보다도 오버해서 행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도 안경일이랑 투닥거리면서 한쪽 시선은 우지은에게 두고 있었다.
삐익~!
경기가 시작되었다. 상경대 펠레에 비해서 체육교육학과팀은 덩치가 남달랐다. 덩치가 크다고 축구를 잘하는 건 아니지만 몸싸움에 유리한 것은 사실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상경대 선수들이 몸싸움에서 확실히 밀리는 것이 보였다.
“심판, 심판! 저기 저거 반칙 아니에요?”
“반칙이다, 반칙!”
반칙을 외치는 상경대생과.
“반칙은 무슨 반칙! 공부만 한 샌님들이라 살짝만 밀어도 넘어가네, 넘어가.”
“야, 저거 할리우드 액션이야. 오히려 저쪽에 반칙 줘야 하는거 아냐?”
체교과를 응원하는 사범대생들의 목소리가 부딪혔다.
그때 등 번호 21번의 상경대 학생이 공을 잡았는데 드리블이 다른 선수들과는 남달랐다.
하프라인 근처에서 공을 잡았는데 벌써 세 명의 수비수를 제치고 드리블을 해 나갔다.
급하게 달려온 공격수 한 명이 무리하게 백태클까지 했지만 여유 있게 피해내고 달려 나오는 골키퍼의 사각으로 그림 같은 골을 집어넣었다.
“와~ 대박이네, 대박. 역시 상대 메시! 최고다, 최고!”
“진짜 상혁이 없었으면 우리 올라가지도 못했겠다.
“이번 대회 MVP는 단연코 상혁이겠다.”
“당연하지! 매 경기 2골 이상 넣고 있는데 상혁이 말고 누가 받겠냐.”
상경대생들은 저마다 박상혁의 몸놀림에 감탄을 표시했고
“아놔, 또 저 녀석이야. 야, 반칙을 해서라도 좀 막아!”
“카드 각오하고 백태클 하려면 좀 제대로 하던가!”
“아, 저 녀석 때문에 우리 지는 거 아냐?”
사범대생들은 패배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떨었다.
[상혁이라는 아이, 마나홀이 열렸네요.]
[그러게, 하단 중단을 무시하고 상단만 열린 것 보니 에스퍼 계열인 것 같네.]
[마나 흐름이 거친 것으로 봐선 각성한 지 얼마 되진 않았나 봐요. 에스퍼 계열은 조절 없이 무분별하게 능력을 쓰면 마나홀이 다칠 수도 있을 텐데요.]
[근데 마나 흐름이 거친 것 치고는 상당히 섬세하게 바람을 컨트롤하는데?]
강민과 유리엘의 눈에는 바람의 흐름을 컨트롤하고 있는 상혁이 보였다. 불가능해 보이는 자세에서 턴을 한다든가 슛을 한다든가 하는 것이 모두 바람의 도움을 얻어서 행해지고 있었다.
[그러게요. 기본적으로 바람을 다루는 자질이 있나 보네요. 마치 정령을 부리는 것 같아요.]
[그래. 제대로만 다룬다면 중급 정령사 정도의 역량은 충분히 갖겠는걸? 근데 저 녀석 각성한 후 인도자도 만나지 못한 것 같은데?]
[그쵸? 만약 인도자를 만났다면 저렇게 마음 놓고 능력을 쓰진 않았을 텐데 말이죠.]
[직접 인도하기엔 우리도 잘 알지 못하니, 그냥 김창수 씨한테 연락해 주는 것이 낫겠네.]
사실 강민과 같은 강자는 유니온 측에서도 일반 세계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을 자제해 달라는 ‘권고’나 ‘권유’를 할 뿐이었지만, C급 이하의 능력자에게는 일반 세계에 능력을 과도하게 발휘할 경우 유니온 차원에서 제재한다는 ‘경고’를 한다.
지금 박상혁처럼 이 정도의 능력 발휘라면 문제가 될 것이 없지만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일반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친다면 심할 경우 능력 자체를 금제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좀 더 경기를 지켜보던 강민은 김창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강민 씨, 어쩐 일이십니까? 혹시 유니온에서 일하실 생각이 드신 건가요?
“아닙니다. 각성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 능력자를 봐서 연락드렸습니다.”
-각성형 능력자인가요?
“네.”
-한 번에 각성형인지 알기는 힘드셨을 텐데. 확신하며 말씀하시네요. 허허허.
“알아보는 방법이 있지요.”
-역시 비밀인가요?
“네.”
-허허. 참, 어떤 종류의 이능이던가요?
“바람을 자연스럽게 다루더군요.”
-혹시 등급도 추정이 가능하신지?
“유니온의 등급별 기준을 제가 알지 못하니 확실히 말씀드리긴 힘든데. 마나를 유형화한다는 C급은 안 되는 것 같고 잘만 다듬는다면 D급은 될 수 있겠더군요.”
-아무리 각성형이 등급을 올리기 힘들다지만 시작부터 D급이면 전도유망한데요. 그런데 강민 씨가 인도하실 겁니까?
강민은 잘 다듬으면 D급이라고 했지만 김창수는 D급이라 단정 지으며 말했다. 강민은 굳이 김창수의 말을 정정하지 않았다.
김창수가 전도유망하다고 말했지만 사실 각성형은 각성 후 자신의 첫 등급에서 한 등급도 못 올리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김창수도 각성형 능력자로, 각성한지 10년이 넘었지만 아직 각성 당시의 등급을 갖고 있었다. 다만 마이너스 급에서 플러스 급까지는 능력의 수련에 따라서 올라가는 경우가 많았다.
“각성형이라 제가 인도해 봤자 어차피 기초 정보에 그칠 테니. 유니온 소속 각성형 능력자를 보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그렇지요. 혹시 성향도 분석 가능하신가요?
“성향이라면?”
-금강선원 분들을 보니 별다른 장치 없이도 악인인지 구분하시더라고요.
“아, 그런 성향이라면 확실히 선인 쪽에 가깝겠네요.”
-역시 대단하시네요. 간단한 신상만 확인해 주시면 저희가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한국대학교 경제학과 박상혁이라는 학생이에요.”
-감사합니다. 이 친구는 유니온의 인재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허허.
강민이 같이 일했으면 하는 생각에 김창수는 말을 덧붙였다.
물론 강민이 오면 김창수의 상관으로 올 가능성이 크지만, 힘이 우선시되는 이능의 세계에서 강한 동료가 있다는 것은 큰 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