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세귀환록-17화 (17/203)

# 17

현세귀환록

017. 축제(1)

“그 부분은 밝히지 못하였습니다. 나머지 가족 사항으로는 강민의 모친 한미애와 여동생 강서영이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강민의 부친 강철수는 IMF 외환위기 때 사업의 실패로 빚을 갚기 위하여 보험금을 노려 사고사를 위장하여 자살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시절엔 비일비재했던 일이죠.”

“그렇습니다. 그 이후로 강민이 신문 배달을 하면서 살다가 강민이 사라지고 난 후에는 모친 한미애가 작은 식품 공장을 다니며 강서영을 키웠습니다.”

“그 외의 가족은 없어요?”

“한미애나 강철수나 고아 출신이라 다른 친척은 없습니다.”

“그렇군요. 흐음……. 그리고요?”

“이후로 한미애의 행적은 특이사항이 없습니다. 강서영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꽤 공부를 잘했는지 지금은 한국대 불문과에 재학 중입니다. 즉, 강민과 김유리 말고는 다른 가족은 평범합니다.”

“주변 인물에 대해서도 알아보셨나요?”

“네. 가족 말고 다른 특별한 지인으로 보이는 사람은 없는데, 다만 최근 같은 과 신입생인 김만석, 우지은, 안경일, 손유리와 자주 어울리더군요. 사진은 서류에 첨부되어 있습니다.”

강민과 유리엘에 대한 보고를 들은 이아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갑자기 나타난 졸부 정도인 줄 알았는데 뭔가 있다 이거네. 블랙 카드라……. 아무튼 지호 오빠는 이 둘이 부부인 건 알고 있을까? 일단 그 정도만 알려줘도 지호 오빠 성격에 유리라는 여자한테 더 이상 마음 주지는 않을 것 같네. 뭐 그렇다면 경쟁자는 아닌가? 호호.’

일단 이아현은 유리엘이 경쟁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만족했다.

생각을 마친 이아현은 휴대전화를 들어 백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누구십니까?

“뭐야? 오빠 내 번호도 저장 안 해둔 거야?”

-아, 아현이구나. 무슨 일이야? 이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다 아는 수가 있어. 그리고 무슨 일 있어야 전화하는 사이인 거야, 우리가?”

-우리가 무슨 사이인데?

이아현은 억지로 밀어붙였다가 단호하게 거절당한 기억이 있었고, 백지호는 밀어붙인다고 넘어오는 남자가 아니라는 것을 재작년의 사건으로 확실히 깨달았다. 때문에 더 이상 백지호를 압박하지 않았다.

“오빠 동생 사이지, 뭐. 동생이 오빠한테 연락하는 것도 안 돼?”

-아냐, 하하. 그래 오빠 동생 사이 좋지, 하하.

과거 이아현의 고백이 부담스러웠던 백지호는 이아현이 이렇게 순순히 오빠 동생 사이라고 인정하자 다소 마음을 놓았다.

예전엔 자신이 백산 그룹의 손자라는 사실을 말해 버린 이아현에게 약간의 원망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마음이 없었다.

이번에 전화를 한 것도 이아현이 과거의 일을 사과하기 위해서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지만 이아현은 사과할 생각이 없었다. 이아현 스스로는 그것이 잘못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백지호도 도도하고 당당한 이아현의 모습을 생각해 볼 때 사과는 이아현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진짜 무슨 일이야?

“아, 오빠 과에 이번에 엄청 예쁜 ‘유부녀’가 신입생으로 들어왔다면서?”

-유부녀? 누구 말하는 거야?

“작년에 중도 여신이라고 유명하다던데, 오빠 몰라? 이름이 김유리라고 했던가?”

-유리 누나? 유리 누나가 유부녀였어? 그럼 남편은 민이 형인가…….

“오빠도 알고 있네. 그래 강민이라는 사람이 남편이라는 것 같더라고.”

-아, 그래서 민이 형이 그때 그 말을 한 건가…….

백지호의 마지막 말은 이아현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혼잣말에 가까웠다.

‘뭐야? 뭔가 알고 있었다는 눈친데?’

이아현은 백지호의 혼잣말에 백지호가 뭔가 알고 있었다는 듯한 뉘앙스를 느꼈다.

-그런데 이 말 하려고 전화한 거야?

“아, 아니. 오빠 귀국하고 한 번도 못 봤으니 한번 보자고 전화한 건데 갑자기 친구한테 들은 이야기가 생각나서 말이야.”

-한번 보자고?

“그래. 오빠 동생 사이로 보는 거니 부담 갖지 말고!”

-아, 그래. 하하하. 부담 없이 나갈게.

“그럼 이번 주 토요일 7시에 ‘르 마리’에서 봐.”

-그래, 알겠어. 그럼 그때 봐.

‘일단 유리인가 뭔가 하는 년하고 지호 오빠는 엮일 가능성이 없을 것 같고……. 대체 강민이 어떻게 블랙카드를 가지게 된 거지? 뭐 급한 것도 중요한 것도 아니니 차차 알아보든가 하지, 뭐.’

전화를 끊은 이아현은 강민 일은 잊고, 백지호를 다시 만날 생각에 기분이 들떴다.

* * *

이아현은 확실히 하기 위해서 수하라고 해도 괜찮을 친구에게 강민과 유리엘의 결혼 사실을 소문내게 하였다.

소문을 들은 학생들은 처음엔 뒤에서 약간 수군거렸다. 연인 사이와 부부 사이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강민과 유리엘은 결혼 사실을 숨길 생각이 없었고, 소문을 들은 김만석 등이 물어봐도.

“법적으론 혼인신고를 한 부부 사이가 맞아. 다만 졸업 후에 결혼식을 하려고 했으니 단지 말을 하지 않은 것뿐인걸? 부부 사이인데 나중에 결혼식을 또 한다고 하면 이상하잖아. 호호호.”

이런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대응하였기에 주위에서 놀라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하게 되어버렸다.

사실 둘은 수많은 차원을 몇만 년간 돌아다니면서 결혼식을 치른 경험만 백 차례가 넘었다.

둘은 결혼식을 굳이 할 필요는 없다고 했지만 둘을 추종하는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문제였기에 지인을 모은 작은 규모의 결혼식에서부터 제국, 나아가 대륙 주최의 결혼식까지 치른 적이 있었다.

이번 역시 굳이 결혼식을 치르고 싶진 않았지만, 어머니와 동생이 둘의 결혼식을 꼭 보고 싶어 했기에 졸업 후 결혼식을 올리는 것에 동의한 것뿐이었다.

이런 상황이니 결혼했다는 사실을 굳이 드러낼 필요도 없었다.

물론 둘이 이미 부부 사이라는 소식에 마치 인기 여자 연예인이 결혼한 것처럼 여자들은 내심 다행스럽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남자들은 강민에 대한 부러움과 유리엘에 대한 상실감에 한숨을 내쉬었다고 한다.

여튼 결혼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에 남자 친구라 생각했던 강민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선망의 대상이었던 유리엘의 인기는 많이 사그라들었고,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오히려 학생들이 더 편하게 강민과 유리엘을 대하게 되었다는 장점도 있었다.

* * *

중간고사도 끝나고 본격적인 축제 시즌의 막이 올랐다.

원래 한국대학교의 축제는 재미없기로 유명한 축제였지만, 자유 전공 학부가 생기면서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간 한국대학교의 축제가 재미없었던 이유는 다른 학교처럼 가수나 개그맨 등 연예인을 부르는 행사 같은 걸 일절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굳이 학생들의 학생회비를 일회성에 그치는 연예인을 부르는데 쓸 필요가 있냐는 전통 아닌 전통이 있어서였다.

그래서 한국대학교의 축제는 학생들의 체육대회나 주점, 학생 수준의 연극, 노래자랑 등 간단한 이벤트 정도로만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타 대학교 학생이나 일반인은 물론이고 축제에 참여하지 않는 학생들에게까지 호응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자유 전공 학부가 생기며 당시 자유 전공 학부의 과대표가 과 학생들의 부모님께 후원을 요청했고 많은 지원을 받았다.

이로써 학생회비를 사용하지 않고 다른 학교와 마찬가지로 유명 가수의 축하 공연이나, 유명 개그맨의 행사 진행 등이 이루어졌다.

대학물을 먹었다 할지라도 학교나 집에서 공부만 하던 모범생인 학생들이 대부분인 한국대학교였기에 이러한 축제 분위기를 처음 만끽한 학생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기부금 입학으로 들어온 자유 전공 학부의 이미지를 개선하는데도 상당한 도움을 주었기에 이후로 자유 전공 학부의 축제 보조는 일종의 관례처럼 굳어져 갔다.

특히 SG엔터의 사장 아들인 최현호가 입학한 이후로 SG엔터 소속의 유명 연예인들이 싼값에 축제에 와서 분위기를 북돋아 주었기에 올해도 학생들의 기대는 컸다.

“창민아, 현호는 여전히 학교 안 나오니?”

“네, 세진이 형. 학기 초에 잠깐 나왔다가 그 뒤론 아예 안 나오는 거 같더라고요.”

“아, 이 자식은 휴학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학교에 안 나와!”

“뭐 이대로면 올 D- 찍겠죠. 어차피 학점에 신경 쓰는 놈도 아니니 애초에 출석 같은 것 신경 안 썼을 거예요.”

자유 전공 학부의 학생들은 아무리 못해도 F 학점을 주지 않는 것이 거의 관례화되어 있었기에 학점 미달로 졸업을 걱정하는 학생은 없었다.

게다가 그 학점으로 졸업해도 어차피 가업이 있거나 일하지 않고 먹고살 만했기 때문에 취업을 걱정하는 일반 대학생과는 달랐다.

“혹시 또 여자한테 작업 건다고 그러는 거 아냐? 창민이 너도 전혀 소식 들은 거 없어? 그래도 너희 둘은 꽤 친했잖아.”

“가끔 통화는 했는데 학교 올 생각은 전혀 없고 무슨 치료 받는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거 같더라고요.”

“치료? 무슨 치료? 나한텐 별말 없던데?”

현승그룹의 현승종합병원은 국내에서도 알아주는 대형 종합병원으로, 유세진의 전화 한 통이면 충분히 대접받으면서 치료가 가능했기에 자유 전공 학생들은 종종 유세진에게 그런 부탁을 하곤 했다. 그렇기에 유세진은 최현호가 자신에게 연락이 없었던 것이 더 이상했다.

“글쎄요? 저한테도 자세한 이야기는 안 해요. 병원에서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일반 병원은 안 가고 전국에 유명하다는 한의원만 죽어라 찾아다니는 거 같더라고요.”

“한의원?”

“네, 한의원하고 무슨 기 치료인가 그런 거 찾아다닌다 하던데요.”

“이 자식은 어디가 아프길래 그딴 거나 찾는 거야. 아무튼, 그래서 지금 연락 안 돼?”

“저도 축제니까 현호 생각나서 몇 번 전화해 봤는데 안 받더라고요. 아. 연예인들이랑 노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최현호가 축제의 연예인 섭외를 담당한 후부터 한국대학교의 축제 연예인 라인 업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화려해졌다.

SG 엔터 출신의 유명 연예인은 기본적으로 동원하였고, 스케쥴이 없는 비인기 연예인, 심지어 SG 엔터에서 연습생으로 있는 지망생들까지 동원하였기에 학생들의 눈요기가 제대로 되었다.

특히 최현호와 친한 자유 전공의 몇몇 학생들은 유명 연예인보다 연습생이나 인기 없는 연예인을 많이 불러주길 바랐는데, 그것은 축제 후 뒤풀이 때문이었다.

최현호가 가끔 산장 파티를 개최할 때마다 남자나 여자나 참석인원은 한계가 있었고, 이런저런 눈치를 본다고 개최 횟수 자체가 적었다.

하지만 축제 후 뒤풀이는 많은 인원이 모였고 보통 원나잇으로 이어지거나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기에 기대를 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작년에도 축제에서 원나잇은 기본이고 암암리에 스폰 계약도 몇 건이 이루어졌다.

인기 유명 연예인은 이미지도 있고 스케쥴도 바빠 그런 곳에 참석하지 않기에, 자유 전공의 부잣집 도련님들은 축제에 소위 속물 경향을 가진 같은 비인기 연예인이 많이 올수록 좋아했다. 뭐, 강제로 하는 것도 아니니 끼리끼리 모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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