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세귀환록-15화 (15/203)

# 15

현세귀환록

015. 접근(2)

말을 마침과 동시에 험상궂게 생긴 남자가 최현호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최현호는 자연스럽게 그것을 피하며 오른손으로 남자의 옆구리를 가격했고 남자는 옆의 테이블을 쓰러뜨리며 나뒹굴었다.

이어 달려드는 세 남자도 차례로 주먹을 휘둘렀으나 최현호는 당황하지 않고 물 흐르듯 그것을 피해내며 복부를 가격해 남자들을 날려 버렸다.

그 탓에 가게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한데 복부 한두 대 맞고 그렇게 날아가는 점도 이상했고, 남자들이 순서대로 덤벼드는 모습도 이상했다.

애초에 학생들이 자주 오는 술집에 정장 차림의 남자 네 명이 있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잔뜩 얼어 있는 김만석 일행은 이상함을 느낄 수도 없을 만큼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으, 윽…….”

“이제 그만 꺼져. 사람 봐가면서 덤벼들라고.”

남자 넷은 한두 대 맞은 것에 비해 상당히 끙끙거리며 바닥을 뒹굴었는데 최현호의 꺼지라는 말에는 순식간에 일어나서 사라졌다.

“죄송합니다. 가게를 소란스럽게 했네요. 약소하지만 청소비에 보태쓰시기 바랍니다.”

최현호는 가게 주인에게 100만 원짜리 수표 두 장을 내밀며 마무리까지 했다.

김만석과 그 친구들은 넋이 나간 듯 최현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특히 우지은의 눈은 그야말로 하트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최현호에게 푹 빠진 듯했다.

마무리까지 마친 최현호는 강민 일행에게 다가왔다.

“괜찮으신가요?”

그 말에 정신을 차린 김만석은 우지은의 눈을 보고 아차 하는 표정으로 최현호에게 말했다.

“누구시죠?”

“아, 아까 상경대 앞에서 유리 씨께 인사드렸던 SG엔터의 최현호입니다. 잠깐 술 한잔하려고 왔는데 곤란을 겪고 계신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나서게 되었네요. 소란 피워서 죄송합니다.”

도와준 최현호가 오히려 정중하게 사과까지 하자 우지은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에요. 그쪽 아니었으면 저희 큰일 날 뻔했어요. 그렇죠?”

동의를 구하는 듯 일행을 둘러본 우지은은 손유정의 끄덕거리는 고개에 힘을 얻었는지 다시 최현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혼자 오셨어요?”

“아, 그게 아까 일이 벌어질 것 같아서 오늘은 그만 들어가라고 했어. 아, 말 놓아도 되지? 신입생 같은데, 나도 한국대학교 다녀.”

“아, 네. 우지은이라고 합니다.”

허술한 대답이었지만 이미 최현호에게 반한 우지은은 그 대답과는 관계없이 얼굴이 빨개지며 최현호에게 꾸벅 인사를 하였고, 김만석은 이를 못마땅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근데 그 사람 참 의리 없네요. 선배가 곤란한 일을 겪을 수도 있는데 그냥 가버리다니. 괜찮으시면 저희랑 같이 한잔해요. 괜찮죠?”

마지막은 앉아 있는 일행들을 향한 질문이었다. 김만석은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자신들을 구해준 최현호를 막을 명분이 없는지 나서지 못하였고, 손유정 또한 찬성하는 분위기라 자연스럽게 합석을 하였다.

이런저런 허점이 보였지만 아직 순진한 대학 신입생들은 여전히 그런 허점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다만 강민과 유리엘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시종일관 약간의 비웃음을 띤 얼굴로 그 모습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민, 여기서도 이런 연극을 하는가요?]

[글쎄, 여기서는 나도 처음 보는데.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얼마든지 있을법한 일이지 뭐. 근데 참 어설프네. 이런 연극 여러 번 봤는데 이리 어설픈 건 처음이야. 합도 안 맞고, 리얼리티도 떨어지고. 저거 맞고 쓰러지는 녀석이 어디 있겠어? 피 한 방울 안 났는데 말이야. 허 참.]

[호호호. 그러게요. 근데 여기 애들은 완전 넘어간 것 같은 걸요? 그리고 저 녀석의 눈을 보니 심상치가 않네요.]

강민과 유리엘은 최현호 눈 깊숙이 숨겨져 있는 색욕을 볼 수 있었다. 그 욕망의 주된 타겟은 유리엘인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아예 없애버리긴 좀 그렇고 그 짓만 다시 못 하도록 할까?]

[그래도 아직 우리에게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너무 가혹한 일 아닐까요?]

[저 녀석의 눈을 보니 그간 억울하게 당한 여자가 한둘이 아닐 것 같아. 적당히 사회 정의를 실현해 주지 뭐.]

[자신이 왜 그런 일을 당하는지 정도는 알아야 반성의 여지가 있겠죠. 조금 기다려 봐요. 본색을 드러내면 제가 처리할게요.]

[귀찮지 않겠어?]

[귀찮긴요, 후훗. 간만에 이런 일이라 너무 재미있는데요? 저번 차원에선 [군림]을 행동 양식으로 잡았더니 다들 굽신거리기만 해서 이런 재미는 없었잖아요. 차라리 [암중지배]가 나을 만큼요.]

[하긴 마나 문명도 별로 발달하지 않은 곳에서 실력 발휘 몇 번 했더니 다들 신격화해서 좀 그랬긴 했지. 알겠어, 유리의 생각이 그렇다면 잠시 두고 보지 뭐.]

강민과 유리엘이 전음으로 자신의 처분을 저울질하는 것도 모르는 채, 최현호는 능수능란한 화법으로 일행의 주의를 집중시켰다.

지금 최현호는 과거에 박민주를 드림걸즈에 데뷔시킨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연예인의 뒷이야기는 순진한 젊은 학생들에게는 마약보다도 자극적인 이야기였다.

“그렇게 내가 민주를 발굴했다니까. 내가 인문대 수업을 듣지 않았다면 드림걸즈의 박민주는 없었겠지. 인문대 얼짱 박민주만 있었을 테고.”

“와, 그럼 민주 언니는 현호 선배가 직접 키운 거나 마찬가지네요.”

“그렇지, 연습생 출신도 아니어서 내부 반발이 만만치 않았는데 내가 민주의 가능성을 믿고 밀어붙인 거야. 저기 유리씨도 내가 밀어붙이면 반짝 인터넷 스타가 아니라 롱런하는 진짜 스타가 될 수 있어.”

가능성을 믿은 것이 아니라 최현호가 한동안 박민주의 몸에 빠져 밀어붙인 것이었지만 결과가 상당히 좋았기에 큰 뒷말은 없었다.

최현호는 말을 하며 유리엘을 슬쩍 봤지만 유리엘은 여전히 무관심한 표정으로 최현호의 이야기를 흘려듣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민주랑 한 지도 좀 됐네. 조만간 오피스텔로 한번 불러야겠다. 근데 저년은 진짜 철벽이네. 그렇게까지 관심이 없나? 저놈 때문인가? 역시 둘 사이를 갈라놔야 승산이 있겠어.’

최현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이 가는 유리엘은 속으로 웃음을 참고 있는 중이었다.

최현호의 음흉한 생각과는 달리 유리엘에게 최현호는 평범한 일상에 살짝 재미를 주는 가벼운 게임 정도밖에 안 되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최현호는 자신이 2차를 사겠다며 밖으로 나가자 하였다.

김만석은 우지은이 점점 최현호에게 빠지는 것 같아 불안불안했지만 나머지 일행이 찬성하니 어쩔 수 없이 따라나섰다.

1차의 계산도 최현호가 하려 하였지만 아까 주인이 최현호에게 2백만 원을 받은 게 있어서 그런지 술값은 따로 받지 않았다.

최현호는 2차는 좋은 곳으로 가자며 너스레를 떨 때였다.

“우린 이만 빠질게. 컨디션이 별로라서 가 봐야 할 것 같아.”

유리엘이 선수를 치며 빠졌다. 유리엘의 말에 최현호는 표정이 변했다. 최현호의 타깃은 유리엘이었기 때문이었다.

“형, 누나! 같이 가요~ 재미있게 놀고 있었잖아요. 딱 2차까지만 해요.”

“언니가 컨디션이 안 좋다 하잖아. 우리끼리 가자. 현호 선배가 쏜다잖아.”

김만석은 강민과 유리엘을 잡았지만 우지은은 최현호가 계속 유리엘을 의식하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기에 둘을 보내고 2차를 가자고 하였다.

사실 우지은이 최현호에게 빠지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최현호는 180센티미터의 키에 운동도 좀 했는지 몸매도 나쁘지 않았고, 얼굴 또한 가느다란 눈매 덕에 다소 비열한 이미지를 주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잘생긴 편이었다.

결정적으로 SG엔터 사장 아들에 최현호가 잘만 봐준다면 연예인 데뷔까지 되는 상황이니, 우지은이 최현호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위험에서 자신을 구해주지 않았던가? 백마 탄 왕자가 오늘 나타났다 해도 괜찮을 상황이었다.

최현호는 잠시 우지은을 보며 고민했다.

‘쟤는 조금만 더 찌르면 오늘 데리고 갈 수 있겠는데? 뭐 저 정도면 얼굴도 나쁘지 않고, 몸매가…… 좀 가슴이 작긴 해도 뭐. 한 번 정도로는 괜찮지. 귀찮게 달라붙으려나? 아. 근데 쟤랑 하고 나면 유리는 먹기 힘들 것 같은데. 같이 다니니까 금세 이야기하겠지? 하긴, 어차피 유리랑 하고 나면 나중에 쟤는 얼마든지 공략 가능하니까 그때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최현호의 머릿속에는 벌써 연애 시뮬레이션이 돌아가고 있었다.

유리엘은 최현호의 음심이 우지은에게도 향하는 것을 알아채고 바로 조치를 취하려 하다가 다시 자신에게로 초점이 맞춰지자 흥미롭다고 생각하며 강민을 쳐다보았다.

[지은이는 잡은 고기라 이거지. 큭. 아무튼 잘못했다간 지은이가 저놈 수작에 넘어갈 수도 있으니 너무 시간 끌지 마, 유리.]

[저 녀석 분위기 보니까 오늘 중에 다른 일 벌일 것 같은데 그거 보고 끝내죠, 뭐. 호호.]

최현호의 고민이 끝났는지 일행의 시선을 집중시켜 말을 꺼냈다.

“민 씨랑 유리 씨도 간다고 하니 오늘은 이만 끝내지요. 다음번에 좋은 기회 만들어요.”

“아, 선배 너무 아쉬워요.”

“연락처는 다 주고받았으니까 오늘 말고 다음에 연락하면 선배가 술 사줄게. 다음엔 선배 말고 오빠라 불러.”

“네, 오빠. 헤헷.”

우지은에게 여지를 남겨두는 것을 잊지 않는 최현호였다.

“유리 씨는 어디로 가시는지?”

“저희는 잠깐 걷다가 들어갈 생각이에요.”

“유리 씨 그래도 같이 술자리도 했는데, 제가 우리 회사 조건을 설명할 수 있는 시간 잠시만 주실 수 있겠어요? 어디 가자는 것도 아니고 잠시 걸어가면서 설명하면 됩니다.”

“음, 그럼 그렇게 하죠.”

일행을 다 보내고 강민과 유리엘, 최현호는 캠퍼스로 들어가 때아닌 산책을 하였다.

저녁이라 그런지 캠퍼스엔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최현호는 앞서 걸으며 유리엘에게 계약 조건 등을 설명하면서 좀 더 인적이 드문 곳으로 이끌었다.

체대 앞쪽 벤치에 다다르자 최현호는 커피 한잔 사 온다고 강민과 유리엘을 놓고 사라졌다. 10여 분이 지나도 최현호는 돌아오지 않았다.

“여기서 또 뭔 수작을 보이려고 하는 것 같죠?”

“분위기로 봐선 강제로 하려는 건 아닌 것 같고, 또 누군가를 부를 것 같네. 여기로 슬금슬금 다가오는 녀석들이 그 녀석들 같은데.”

“참 창의성 부족하네요. 또 같은 패턴이라니.”

“그러게 말이야.”

강민과 유리엘의 말처럼 조금 지나자 아까 연기했던 네 명의 남자가 다시 나타났다.

“이 녀석들 아까 술집에서 그 연놈들이잖아!”

“그러게!”

뭔가 어색한 연기였지만 강민과 유리엘은 굳이 지적하진 않았다.

“뭐냐?”

“뭐냐라고? 이 새끼가 겁대가리를 상실했나. 확! 여자만 놓고 꺼져. 괜히 여자 앞이라고 허세 부리다 죽는 수가 있어.”

창의력 없는 남자는 아까처럼 김만석을 위협하듯 손을 들었는데 배우로서 성공하기는 글렀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색한 연기였다.

만약 강민이 일반인이었다면 으슥한 곳에서 자신을 위협하는 남자 네 명과 마주친 상황이니 당황하고 겁먹어서 그런 어색한 점을 찾지 못했을 테지만 강민은 보통사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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