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세귀환록-14화 (14/203)

# 14

현세귀환록

014. 접근(1)

붉은 톤의 웨이브 진 머리의 여대생 한 명이 TV 드라마에서나 나오던 응접실에 앉아 사진을 넘겨보고 있었다. 이아현이었다.

“이 여자는? 어디서 본 듯한데……. 아! 중도 여신이라던 그 년이네.”

이아현은 어제 개총에서 강민과 유리엘, 백지호 등이 함께 찍힌 사진 여러 장을 보고 있었다.

한 장, 두 장 사진을 볼수록 백지호의 몸짓이나 태도에서 백지호가 유리엘에게 호감이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뭐야. 이날 처음 봤을 텐데 지호 오빠가 이런 모습이라는 거야? 첫눈에 반하기라도 한 거야?”

이아현은 분통을 터뜨리며 거칠게 사진을 넘겼다.

“백지호! 단지 예쁘면 된다 이거야? 귀국한 다음에 나한테 연락 한번 하지도 않았으면서, 딴 년에게 반했다 이거야?”

사실 백지호가 유리엘에게 반한 건 외모가 영향을 미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외모보다는 그 분위기였다.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주는 유리엘에게서 백지호가 본 모습은 어릴 적 돌아가신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모든 걸 감싸 안아주고 포용해 주는 그런 어머니의 모습, 하지만 이아현은 알 수가 없었다.

한참 동안 사진을 노려보던 이아현은 사진 속의 유리엘을 보며 내뱉듯이 말했다.

“네가 넘볼 사람이 아닌 걸 알려줄게. 지호 오빠 옆에서 사라져줘야겠어.”

잠시 생각을 하던 이아현은 한쪽 옆에 서 있는 검은 정장에 선글라스를 쓴 경호원을 불렀다.

“김 과장님, 여기 두 사람 좀 조사해 줘요. 둘 다 한국대 경영학과 학생이니 찾기 힘들진 않을 거예요.”

“어느 수준까지 조사를 원하십니까?”

“최대한으로 해주세요. 둘, 가족과 지인까지, 다.”

“알겠습니다.”

김현일은 이아현의 지시에 다른 경호원에게 눈짓을 보내고 자리를 비웠고 이아현은 여전히 분노에 찬 눈으로 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개총을 한 지도 며칠이 지났다. 그사이 강민과 유리엘은 개총 전보다는 다른 신입생이나 재학생들과 상당히 친해졌다. 과거에는 연예인을 보는 느낌으로 다들 다가서지 못했다면, 개총을 통해서 이제 같은 학생이라는 동질감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지나가던 학생들도, 안면이 있는 학생들은 스스럼없이 인사를 하였고 강민과 유리엘도 어색하지 않게 받아주었다.

특히 그때 같이 테이블에 앉았던 김만석의 일행과 수업도 비슷했기에 자주 뭉쳐 식사하거나 간간이 술도 한잔했다.

김만석과 같이 다니는 신입생은 안경 쓴 눈치 없는 남학생인 안경일과 안경일을 눈치 주는 손유정, 새침데기 같은 우지은까지 세 명이었다.

이런 김만석 일행은 경영학과의 여신이라고 할 수 있는 유리엘이 다른 학생들보다 자신들과 친한 것이 무슨 권력이라도 된 듯 다소 우쭐거렸고, 강민과 유리엘은 그런 모습을 귀엽게 보고 있었다.

오늘도 수업을 마치고 간단히 맥주나 한잔하자는 김만석의 제의에 강민과 유리엘은 거절하지 않고 함께하기로 하였다.

과 건물을 나서고 있는데 BMW Z4 한 대가 과 건물 앞에 정차하더니 세련된 블루블랙의 정장을 입은 청년이 내렸다.

오픈 스포츠카는 언제나 사람들의 시선을 모을 수 있는 차였고 특히 스포츠카와 정장의 언밸런스함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다. 그 청년은 기다렸다는 듯 차에서 내려 일행에게 다가왔다.

“혹시 김유리 씨 아니십니까?”

“네, 맞는데요. 무슨 일이신지?”

유리엘의 대답에 선글라스를 벗은 청년은 익숙한 듯 품속에 손을 넣어 명함을 꺼내어 유리엘에게 건넸다.

명함에는 SG 엔터테인먼트 이사 최현호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명함은 받은 유리엘은 직함만 살펴보더니 다시 명함을 최현호에게 돌려주었다.

“SG 엔터의 최현호 씨군요. 혹시 연예인이 되어볼 생각을 묻는다면 관심 없으니 돌아가 주시기 바랍니다.”

“네?”

“이번에 4번째인데 매번 비슷한 질문에 비슷한 대답 하는 것도 조금 귀찮네요. 다른 일이라면 모르겠는데 연예인을 제의하시는 거라면 굳이 서로 시간 낭비하실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요.”

“네 번째라뇨?”

“현호 씨도 동영상 보고 오신 것 아닌가요?”

“네, 그건 맞습니다만…….”

사실 유리엘은 이미 3번의 연예인 데뷔 제의를 받았다. 어떻게 알고 온지는 모르겠지만 세 군데 연예 기획사의 캐스팅 담당이 찾아왔다. 그들에게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지만 결국은 자기네 소속사와 계약해서 연예인으로 데뷔하라는 것이었다.

캐스팅 담당과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런 사달이 난 이유는 개총 때의 그 동영상 때문이었다.

누군가 유리엘이 장기자랑에서 노래 부르는 영상을 유투브에 업로드했고 ‘한국대 이수현’이라는 타이틀로 폭발적인 조회 수를 보이며 인터넷상에서 이슈가 된 것이었다.

당연히 인터넷상의 이슈에 민감했던 연예 기획사들이 엄청난 미모에 가창력까지 겸비한 유리엘에게 눈독을 들이며 접근했던 것이고, 그런 곳에 관심이 없는 유리엘에게 거절당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최현호는 조금 다른 케이스였다. 그에게는 유리엘이 데뷔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유리엘을 공략하느냐가 포인트였다.

때문에 자신을 가장 어필할 수 있는 SG엔터의 이사 직함을 내세웠던 것이고, 그 동영상은 자신이 가장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었을 뿐이었다.

사실 최현호는 유리엘의 환심을 사서 공략할 생각만 있었지 데뷔 자체는 크게 생각도 없었다. 다만 동영상을 보니 외모도 받쳐주고 가창력도 되니까 공략 후에 관심이 있다면 아이돌로 데뷔시켜주면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만 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다른 기획사들이 그렇게 적극적으로 유리엘을 영입하려고 했던 것도 몰랐고, 더군다나 유리엘이 그런 제의를 거절할 줄은 더 몰랐기에 지금 최현호는 꽤나 당황하고 있었다.

그간 그가 상대해왔던 많은 젊은 여자는 연예인에 대한 환상이 많았기에 자신의 직함은 상대의 호감을 얻는 프리패스였다. 그렇기에 이런 유리엘의 반응은 최현호의 시나리오에 없는, 충분히 당황스러운 일인 것이었다.

“그, 그래도 잠시 이야기를 좀……. 어떤 기획사와 이야기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저희 SG 엔터는 국내 기획사 중 자타공인의 1위 기획사입니다. 저희 계약 조건을 살펴본다면 충분히 유리 씨 마음에 들 것으로 생각합니다. 잠시 시간 좀 내어주시지요.”

최현호는 당황한 마음을 감추고 자연스럽게 대응했다. 하지만 유리엘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조건은 제가 생각이 있을 때 이야기이고요. 저는 전~혀 연예인에 대한 생각이 없으니 조건은 들을 필요가 없을 것 같네요. 일행이 있으니 그럼 이만.”

말을 마친 유리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일행 쪽으로 걸어갔다.

일행 중 손유정과 안경일은 그런 유리엘을 부럽다는 듯이 바라보았고, 우지은은 세련된 최현호의 모습에 호감이 가는지 연신 얼굴을 흘낏흘낏 훔쳐보았는데 결국 일행들의 재촉에 발을 옮겼다.

강민 일행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서 있던 최현호는 약간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혼잣말을 했다.

“뭐야? 연예인에 관심 자체가 아예 없다는 거야? 별종이네. 공략 포인트를 잘못 잡았어. 다른 쪽으로 생각해 봐야겠는데? 아, 젠장. 첫인상이 중요한데 처음에 아무것도 못 하고 보내면 오히려 마이너스인데 말이야……. 뭔가 다른 조치가 필요하겠어.”

잠깐 생각하던 최현호는 휴대전화를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강 실장님.”

-아, 최 이사님 무슨 일이십니까?

“오늘 배우 네 명 필요한데 괜찮겠습니까?”

-배우라면?

“전에 그 역할이죠. 저번에 손 맞춰본 친구들이 잘하던데 혹시 오늘 가능한가요?”

-아~ 그 배우! 하하하. 또 작업 건수 생긴 겁니까? 크크. 전에 그 친구들 요즘 단역 자리도 없어서 쉬고 있는데 좋아하겠네요.

“그 친구들 된다니 좋군요. 그럼 두 시간 안에 한국대학교 정문으로 좀 보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페이는? 그 친구들이 요즘에 좀 어려워서요.

“섭섭하지 않게 쳐주겠습니다. 저번이 두당 백이었으니 이번엔 이백 드리겠습니다. 대신 분위기 잘 잡고 합 맞춰서 잘 넘어가야 합니다.”

-하하, 역시 최 이사님 통이 크시네요. 그 친구들도 좋아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신신당부해서 시간 맞춰 보내드리겠습니다. 허허허

어차피 강 실장이 3분의 1은 떼먹을 것을 알고 있지만 최현호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강민과 김만석 일행은 학교 앞 ‘비어 500’이라는 호프집에서 간단하게 맥주를 한잔하고 있었다.

김만석은 새침한 우지은에게 관심이 있는지 과장되게 말을 하며 우지은의 관심을 사려고 하였다.

“글쎄, 내가 아버지랑 낚시를 갔는데 진짜 이만한 숭어를 낚았다니까. 진짜 팔뚝보다 더 컸어!”

“숭어라고? 아까 강에 낚시 갔다고 하지 않았어? 내가 알기로 숭어는 바닷물고기인데?”

김만석의 과장에 우지은이 날카롭게 반박했다.

“뭐? 어, 그, 그게…… 아버지가 숭어라고 해서……. 나도 잘…….”

“야. 김만석, 믿을 만한 말을 해야 내가 믿어주지. 과장도 적당히 해.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그런 거짓말까지 하는 거야.”

김만석과 우지은을 제외한 나머지 네 명은 웃음을 터뜨렸다. 김만석이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지 나머지는 다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우지은은 사람들의 웃음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는데 그때 안경일이 스마트폰을 만지다가 말했다.

“야, 만석아. 숭어는 바닷물고기지만 민물에도 살 수 있고, 먹이를 구하기 위해서 종종 민물로 올라온대.”

“그렇지? 그래 맞아! 우리 아버지가 낚시 경력이 몇 년인데 숭어 하나 구분 못 할까? 지은아 잘 들었지? 내가 거짓말한 게 아니라니까. 진짜 이만한 숭어를 내가 잡았어.”

“흥, 뭐 소 뒷걸음질에 쥐잡기였겠지.”

일행이 이렇게 웃고 떠드는데 호프집 뒤쪽에서 정장을 차려입은 네 남자가 갑자기 시비를 걸어왔다.

“아, 거 좀 조용히 합시다. 뭐가 그리 시끄러워!”

체격이 건장한 남자 넷이 모여 있고 그중 가장 험상궂게 생긴 한 남자가 큰소리로 일행에게 말하자 강민과 유리엘을 제외한 네 명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말이 끝나자마자 네 남자는 동시에 일어나서 일행에게 다가왔다.

“와, 진짜 예쁜데? 웬만한 연예인 뺨 때리겠어?”

유리엘을 보며 한 남자가 느물거리며 말했다.

다른 남자는 술병으로 테이블을 탕탕 치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 탓에 강민의 테이블뿐만 아니라 다른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까지도 긴장하는 것이 보였다.

가게 주인은 말려야 할까 경찰에 신고해야 할까 하는 표정으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얼어 있는 네 명과는 달리 강민과 유리엘은 약간의 비웃음과 함께 그들의 행태를 지켜봤다.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강민과 유리엘은 그들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기색을 확실히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네 남자에게서 그리 악한 기운도 나오지 않았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와중에도 계속 문 쪽을 흘깃거리는 것이, 곧 누군가 가게 안으로 들어올 것 같았다.

우지은의 눈치를 슬쩍 본 김만석이 용기를 내서 대거리했다.

“이, 이게 무슨 짓인가요?”

“무슨 짓? 너희들이 너무 시끄럽게 떠들어서 술을 마실 수가 없잖아! 이게 확!”

머리를 스포츠형으로 짧게 자른 약간 뚱뚱한 남자가 김만석을 때릴 것처럼 손을 들어 올렸다. 그것을 본 손유정과 우지은은 짧게 비명을 질렀다.

그 순간, 아니나 다를까 한 남자가 들어서며 크게 말했다.

“거기까지만 하지!”

최현호였다. 최현호의 외침에 네 남자는 약속이라도 한 듯 손을 멈추고 최현호에게 돌아섰다.

“넌 누구야? 몸 성히 살고 싶으면 참견하지 말고 꺼져.”

아까 그 험상궂게 생긴 남자가 최현호에게 저리 가라는 손짓과 함께 말했다.

“꺼지긴 뭘 꺼져. 너희들이나 소란 피우지 말고 꺼져.”

“뭐라고? 이 새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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