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
현세귀환록
013. 개총(2)
“그럼 이번에는 우리 과의 비공식 여왕! 김유리 학우의 장기자랑을 보겠습니다. 예정된 순서가 아니라 김유리 학우가 당황하신 것 같으니 다들 박수로 환영해 줍시다!”
과대 진기정의 말에 학생들은 엄청난 환호와 함께 유리엘의 이름을 목소리 높여 외쳤다.
“김유리! 김유리! 김유리! 김유리!”
유리엘은 처음엔 손사래를 쳤지만 계속되는 환호에 강민을 바라보았다.
강민은 유리엘에게 맡긴다는 눈짓을 하며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기에 유리엘은 기분 좋게 일어나 무대에 올랐다.
“신입생이시니 먼저 간단한, 아니, 자세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작년부터 김유리 학우를 궁금해하는 학우분이 많았거든요. 혹시 본인 별명을 알고 계시나요?”
유리엘은 부끄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역시 알고 계시는군요. 우리 과의 비공식, 아니, 이제 공식이 될 것 같네요. 우리 과 여왕님인 중도 여신 김유리 학우의 소개와 장기자랑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반갑습니다. 이번에 신입생으로 입학한 16학번 김유리입니다. 공부하고는 관계없이 외국에서 10년간 지내는 바람에 공부할 시기를 좀 놓쳐서 현재 28살의 나이에 신입생으로 입학하게 되었네요. 여러분들이 보기에는 아줌마나 다름없으려나요? 호호호.”
“아니에요!”
유리엘의 말에 학생들은 천부당만부당하다는 듯 큰소리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유리엘은 보여주는 분위기와 표정에 따라서 10대 후반의 귀엽고 새초롬한 이미지에서 30대의 뇌쇄적이고 농염한 이미지까지 넘나드는 마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28살이라는 나이를 밝혔음에도 20대 초반 청년들의 눈에 비친 하트는 사라지지 않았다.
“아, 그리고 저기 앉아 있는 민과는 오랜 연인 사이니 더 이상 편지 같은 거 안 주셔도 됩니다. 민, 손 좀 들어봐요”
강민이 쑥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들자 주위에서 귀여운 야유가 쏟아져 나왔다.
“에이,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갑니까?”
그리고 여러 곳에서 골키퍼 운운하는 식상한 멘트도 동시다발적으로 나왔다.
“여하튼, 아마 여기 있는 대부분 학우보다 저랑 민의 나이가 많을 듯하니 편하게 부를게요. 여러분들도 우리 너무 어려워 마시고 편하게 대해 주세요. 잘 부탁합니다.”
유리엘이 가슴에 살짝 손을 올리고 고개를 숙였고 학생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치며 호응했다.
“장기자랑은, 음……. 간단하게 노래 한 곡 하고 내려갈게요.”
그대 내 곁에 안겨서 영원히 함께 있어요. 우리가 함께하는 날이 끝없이 이어질 수 있도록.
유리엘은 얼마 전 유행했던 이수현의 ‘그대 내 곁에’라는 선곡했다. 그녀가 노래를 부르는 순간 기대하지 않고 있던 모두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일반인이 부르는 거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의 노래 실력에 그에 걸맞은 너무나도 고운 음색이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노래가 끝남과 동시에 열화와 같은 환호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와, 대박이다, 진짜. 내가 이수현 콘서트에서 라이브로 저 노래 들었는데 이수현보다 낫네, 나아.”
“야, 내 팔 봐봐. 지금 팔에 소름 돋았어. 이렇게 허접한 무대 시설에서 저렇게 노래를 부르다니…….”
다들 감탄을 금치 못하고 옆 사람과 노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고 유리엘은 마이크를 내려놓고 자리로 들어갔다.
유리엘의 노래를 끝으로 다른 장기자랑은 없었고 다른 공식적인 행사 또한 종료된 것 같았다.
이에 과대와 학생회는 테이블을 돌면서 분위기를 주도하며 총회의 분위기가 가라앉지 않도록 했다.
9시가 지나자 공식적인 개강총회는 마친다는 과대의 언급이 있었고, 그렇게 넉터에서의 행사가 모두 끝났다.
그리고 개총에서 마음 맞는 사람을 만났거나 원래 알던 무리의 학생들은 2차를 가기 위해서 삼삼오오 술집을 나섰다.
강민과 유리엘은 같은 자리에 앉아 있던 김만석과 일행이 2차를 권해 그들과 함께 넉터를 벗어나서 자리를 옮기려고 하고 있었다.
그때 다른 테이블에서 일행을 지켜보고 있던 백지호가 일행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민이 형, 유리 누나. 백지호라고 합니다.”
백지호의 인사에 나머지 일행은 약간 어리둥절했지만 김만석은 깜짝 놀라며 같이 인사를 받았다. 신입생들은 백지호의 배경을 잘 모르는 듯했지만 김만석은 선배들에게 뭔가 들은 듯했다.
“아, 아까 총회비를 다 부담한 백지호라 했지? 그런데 무슨 일이지?”
“네, 조금 전 총회에서 유리 누나 노래를 너무 감명 깊게 들어서 제가 여기 일행분들 모시고 한잔 사고 싶어서요. 혹시 괜찮으신가요?”
백지호의 말에 강민은 다른 일행을 둘러보았다. 다른 일행들은 조금 어색한 듯했지만 김만석이 적극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재벌 3세니 한잔 산다는 수준도 일반인이 가는 수준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김만석의 행동에 결국 새침한 우지은과 안경을 낀 안경일도 어깨를 으쓱거리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강민도 알겠다고 대답했다.
김만석의 기대와는 달리 백지호가 데려간 곳은 쿨비어라는, 대학생들이 많이 가는 평범한 호프집이었다. 쿨비어는 다소 시끄러운 분위기였기만 대화가 불가능한 정도는 아니었다. 딱 기분 좋게 마실 수 있는 술집이었다.
일행이 자리를 잡자 백지호는 다시 한번 자기소개를 했다.
“경영학과 10학번 백지호입니다. 저기 만석이, 만석이라고 불러도 되지? 신입생 같은데.”
“네, 네. 선배님.”
“만석이는 분위기 보니 아는 것 같은데, 백산 그룹 회장님이 제 할아버지입니다. 나중에 알고 놀라실까 봐 미리 말씀드리는 거예요. 하하.”
백지호는 1년간 미국에 있으면서 마음을 달리 먹었다.
이아현과의 일이 있기 전까지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나면 어려워했고, 그렇지 않으면 속마음을 감추고 자신을 이용하려고 했던 사람들이 많았기에 백산 그룹의 손자라는 사실을 웬만하면 밝히지 않았었다.
실제로 그 일 이후 많은 친구가 그의 곁을 떠나갔고, 검은 속내를 가진 사람들만이 다가왔었다.
그 후 1년간 마음을 정리한 백지호는 어차피 백산 그룹의 손자라는 모습도 자신의 모습인데 굳이 그것을 숨길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친구들이 떠나간 큰 이유도 배신감이지 않았던가.
진정 친한 친구는 자신의 신분과 모습과 관계없이 자신을 바라봐 줄 것이라 생각했고, 검은 속내를 가진 사람들을 걸러내는 것은 향후 자신이 기업은 운영할 때 밑거름이 될 것이라 생각했기에 이제는 자신의 신분을 굳이 감추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마음보다는 과시를 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유리엘에게 말이다.
강민은 백지호의 두 눈에 어린 열기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열기는 여태껏 많이 보아왔던 음습한 욕정과는 달리 순수한 열망에 가까웠다. 소년의 첫사랑 같은 열망이었다.
[쯧쯧. 유리, 또 멀쩡한 청년 하나 버리는 거 아냐?]
[그래도 이런 눈빛은 오랜만인데요, 민. 귀엽잖아요, 호호]
유리엘 역시 백지호의 눈에 담긴 열망을 느끼고 있었다. 사실 아까 장기자랑 때 노래를 하고 난 다음부터 시종일관 느끼고 있었다.
백지호는 과대를 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평소에도 많은 사람을 이끌어봐서 그런지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주도해 갔다.
예전 학교생활부터 시작해서 미국 여행에서의 이야기, 종종 일반인이 알기 힘든 재벌의 뒷이야기까지 거부감 없게 말하면서 분위기를 주도했는데 시선의 한쪽은 항상 유리엘에게 두고 있었다.
유리엘이 이야기할 때는 빨려 들어가듯이 보고 있는 것이 누가 봐도 호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강민은 청년의 순수한 열망이 더 깊어져 스스로를 다치게 하기 전에 끊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음습한 기운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그것이 정도를 벗어나는 순간 [징벌]해 버렸겠지만, 백지호의 눈은 그렇지 않았다.
잠깐 정적이 흐르며 대화가 끊기는 시간이 왔을 때 강민이 말을 꺼냈다.
“지호, 나보다 어리다고 하니 말 편하게 할게.”
“아. 네, 민이 형.”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유리를 좋게 생각하는 것은 알겠지만 유리는 내 여자다.”
강민은 말과 함께 백지호의 눈을 깊게 바라보았다.
백지호는 강민의 말에 부끄러움과 함께 화가 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강민의 깊고 깊은 검은 눈동자가 백지호의 눈을 사로잡았기 때문이었다.
백지호는 강민의 눈에 빨려들어 가는 듯했다. 그곳에는 심연이 존재하는 듯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을까. 백지호는 영혼까지 빨려들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그 순간.
딱!
유리엘이 손을 튕겨 소리를 냈고 강민도 더 이상 백지호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민, 아까도 내가 말했는데. 설마 지호가 딴생각했겠어요? 호호.”
[민, 마나 수련도 안 한 아이한테 너무 심한 거 아녜요?]
[아, 마나 수련도 안 했는데 마나에 대한 저항력이 일반인 같지는 않아서 말이야……. 조금 과했나?]
[설마 질투? 호호호]
[큭…….]
강민이 한 일은 마나의 영향력을 발휘하여 백지호에게 강민을 [인식] 시켜준 것이다.
강민이 유리엘을 강민의 여자라고 천명하며 백지호에게 인식을 남긴 이상, 유리엘에 대한 호감은 남겠지만 정도를 넘어서는 마음을 먹지는 못할 것이다.
악인에게는 이러한 인식은 강력한 연적의 등장만 알려주어 반발감만 키우는 꼴밖에는 안 되겠지만, 백지호와 같은 천성이 선한 사람에게는 임자가 있다는 것을 늘 인식하게 하여 정도 이상의 감정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을 수 있게 하였다.
백지호에게는 길었지만 실제로는 짧은 시간이라 일행이 어색함을 느끼지는 않았다. 다만 강민의 말에 좀 오버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민이 형, 남자는 유리 누나같이 예쁜 여자를 보면 자연스럽게 눈이 돌아간다고요. 설마 임자 있는 몸인데 지호 형이 딴생각이라도 했겠어요? 헤헤.”
“그래요, 민이 오빠. 유리 언니 예쁜 건 알겠는데 그럴수록 유리 언니를 더 믿어야죠. 설마 유리 언니가 다른 사람이 대시한다고 흔들릴 거라 생각하는 거예요?”
“모르지, 백산 그룹 손자면……. 윽!”
안경일이 또 눈치 없이 말을 하자 옆에 앉아 있던 손유정이 옆구리를 찔렀다.
일행들의 너스레에 백지호도 정신을 차린 듯 벌컥벌컥 맥주를 마시더니 말했다.
“민이 형, 유리 누나가 너무 예뻐서 좀 훔쳐봤습니다. 다른 맘이 있는 건 아녜요. 하하하.”
그렇게 말하는 백지호의 눈에는 아까보다 열기가 많이 빠졌기에 강민 또한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예쁘니까 미리미리 단속하는 거다.”
“네? 하하하하.”
‘그 눈빛은 강호 형 못지않았어. 아니 더 깊었던 것 같은데……. 설마 민이 형도 그쪽 사람인 건가?’
백지호는 강민의 눈빛에 놀란 내심을 감추며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 웃고 떠드는 분위기가 되어 모두 즐겁게 이야기를 하는 와중 그런 일행을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그는 몰래몰래 사진까지 찍으며 그들을 지켜봤다.
평소에도 유리엘의 미모에 몰래 사진을 찍는 사람이 많았기에 강민과 유리엘은 사진 찍는 것을 딱히 제재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