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세귀환록-12화 (12/203)

# 12

현세귀환록

012. 개강총회(1)

강민과 유리엘이 학교를 다닌 지도 보름이 지났다.

더 이상 처음처럼 주위의 모든 시선이 집중되는 정도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흰색 페라리는 여전히 사람의 시선을 모았고, 유리엘의 미모 역시 그냥 스쳐 지나가기에는 너무 대단하였기에 많은 사람의 이목을 끄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강민이나 유리엘 모두 사람들의 시선을 받았던 경험이 너무도 많았기에 몇십 명 남짓의 시선쯤이야 약간의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었다.

오늘도 수업을 마치고 주차장으로 가고 있을 때였다.

“저기…….”

흰색 팔, 군청색 몸통의 전형적인 야구점퍼를 입은 앳되어 보이는 남학생 하나가 쭈뼛거리며 강민과 유리엘을 불러세웠다.

“무슨 일이지?”

웬만한 복학생보다 나이가 많았던 강민은 자연스럽게 반말을 하였고, 강민의 분위기에 남학생은 반말을 어색해하지 않으며 존댓말로 대꾸했다.

“민이 형, 혹시 이번 개강총회 참석 가능하신가 싶어서요. 유리 누나도요. 신입생 환영회도 겸해서 같이 하는 거라 같이 가셨으면 좋겠어요.”

수업을 같이 듣고 있기에 강민과 유리엘의 이름을 알고 있는 학생은 처음에 쭈뼛거렸던 것과는 달리 넉살 좋게 형, 누나라 부르며 개강총회 참가 의사를 물어왔다.

“이름이 뭐였지?”

“김만석이라고 합니다, 형님.”

“그렇군. 만석아, 유리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어서 참석하기 힘들 것 같다. 그럼.”

강민의 거절에 김만석은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때 유리엘이 말했다.

“민, 한 번 가 보는 건 어때요?”

“괜찮겠어? 굳이 그런 곳에 갈 필요가 있을까?”

“뭐 어때요? 호호.”

사람들의 마나에서 풍기는 기운에 따라 감정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는 강민과 유리엘은 남자들은 욕정에 찬 눈빛으로, 여자들은 질투에 찬 시선을 유리엘을 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필요하다면 그런 자리에 있는 것을 마다할 유리엘이 아니었지만, 강민은 굳이 유리엘이 그런 자리에서 그런 시선을 받을 필요가 있나 생각했다. 그래서 미리 강민 쪽에서 거절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유리엘은 강민이 고향에 왔는데 너무 일상과 동떨어진 생활을 하는 것이 다소 안타까웠다. 때문에 개강총회에 가자는 권유를 했다.

잠시 눈빛을 교환한 둘은 서로의 마음을 이해했는지 이내 결정을 내려 김만석에게 말했다.

“유리가 저렇게 말하니 개총에 가도록 하지. 시간과 장소가 어떻게 돼?”

“아, 감사합니다. 형, 누나. 선배들이 형이랑 누나 보고 싶다고 꼭 모셔오라 했거든요. 시간은 이번 주 금요일 6시고, 장소는 학교 앞 넉터, 아, 넉넉한 터라는 술집입니다. 보통 우리 학교 학생들은 거길 넉터라고 많이 부른다고 해요. 헤헷.”

“그래, 그럼 거기서 보자.”

“네, 감사합니다. 민이 형.”

김만석은 넉살 좋게 웃으며 고개를 꾸뻑 숙이고는 뒤에서 기다리는 일행에게로 갔고 일행에게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섭외에 성공했다는 것을 알렸다.

금요일이 되어 강민과 유리엘이 넉터에 도착했을 때는 학과에서 이미 주점 전체를 전세 냈는지 100명이 넘는 경영학과 학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강민과 유리엘이 주점 문을 들어서는 순간, 아니나 다를까 시끌시끌하던 술집이 일순 조용해졌다.

그 순간 스포츠머리의 남학생이 간이 무대 위에 서서 마이크를 잡았다.

“와우, 드디어 우리 과의 비공식 여왕님이 오셨습니다. 다들 박수~”

짝짝짝짝, 휘익~!

요란한 박수 소리와 휘파람 소리가 어우러져서 유리엘을 환영했다.

저 멀리 김만석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듯 손을 들어 강민에게 신호를 보냈고 강민과 유리엘이 자리를 잡자 아까의 그 스포츠머리 학생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이제 올 사람은 웬만큼 왔고, 시간도 되었으니 2016년 1학기 개강총회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자, 다들 박수와 환호 부탁드립니다!”

100여 명이 박수와 함께 환호를 지르자 금세 시끌시끌해졌다.

“저는 과대를 맡은 13학번 진기정이라고 합니다. 여기 서서 보니 오랜만에 오신 선배님도 계시고, 잘 볼 수 없는 후배님도 계시네요. 우리 과의 전통 아시죠? 개총 때만큼은 다들 먹고 죽자입니다. 협찬해 주시는 빵빵한 선배분들 많으니 돈 걱정 마시고 실컷 즐기면서 노시다가 돌아가면 됩니다. 올 한 해 과 행사에 많이 참석해 주시길 바라고요. 제가 건배 제의하면서 본격적인 개총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제가 ‘경영학과’하면 여러분이 ‘화이팅’ 외쳐 주시면 됩니다. 경영학과!!”

“화이팅!”

진기정의 선창에 학생들이 따라 후창했고 그 이후로 01학번 선배의 축하 인사, 16학번 신입생의 입학 소감, 과내 동아리들의 홍보 등 여러 가지 일정이 진행되었다.

관심이 있는 학생들은 무대 위의 사람들에게 시선을 주기도 하였지만 많은 사람이 무대보다는 주위 사람과 술 마시는 일에 열중하였다.

강민과 유리엘도 주위 분위기에 맞추어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처음에는 강민과 유리엘의 어려워하던 학생들도, 수업에서 안면을 튼 학생을 중심으로 통성명하며 말문을 트고 너도나도 다들 인사를 하며 살갑게 대했다.

“형님, 어디 다른 학교 다니시다 오신 거예요? 28살이면 졸업생 나이인데. 앗.”

통통한 외모에 안경을 낀 학생이 강민에게 물어보자 비슷한 안경을 낀 귀엽게 생긴 여학생이 옆구리를 찌르면서 눈치를 주었다. 그러자 안경 낀 학생은 아차 하는 표정이었다.

“괜찮아, 뭐 비밀도 아니고. 유리랑 나는 외국에서 10년 정도 보내다가 왔어. 그래서 학업을 할 시기가 조금 늦었지.”

이번엔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웃으면 반달 눈이 인상적인 새침해 보이는 여학생이 자연스럽게 유리엘에게 언니라 칭하며 질문을 던졌다.

“유리 언니, 근데 언니랑 오빠 사귀는 사이 맞죠?”

유리엘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민이랑 나는 서로 깊이, 아주 깊이 사랑하는 사이란다, 지은아.”

아까 통성명을 했는지 유리엘은 여학생의 이름까지 말하면서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대답했다.

“언니랑 오빠를 노리는 사람 많던데 다들 헛물켜고 있었네요.”

“노려? 이렇게 붙어 다니는데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나?”

“아, 그게 누가 언니랑 오빠랑 분위기가 비슷해서 친남매라고 말했었거든요.”

“민, 우리보고 친남매래요. 호호호.”

“하하. 하긴, 유리랑 보낸 시간이 있으니 닮아갈 만도 하지. 하하.”

강민은 유리엘의 미소에, 유리엘은 강민의 웃음에 서로 기꺼워하고 있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는데 갑자기 간이 무대에서 과대 진기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은 특별히 이 자리에 지지난번 과대인 백지호 학우가 오셨습니다. 1년간 휴학했다가 올해부터 복학했는데, 특별히! 오늘 개총에 드는 비용 전부를 백지호 학우께서 부담하시기로 했습니다! 학우 여러분은 백지호 학우에게 박수 한번 주시기 바랍니다!”

백지호가 돈을 낸다는 소리에 대다수의 학생이 박수치며 환호했지만 몇몇 학생은 뭔가 불만이 있는지 입을 삐쭉거리며 옆 사람과 소곤거렸다.

“뭐야, 이제 밝혀졌으니 돈 많은 거로 유세라도 떠는 거야?”

“그러게. 그냥 자유 전공 학부나 갈 것이지 왜 우리 과로 왔대.”

소곤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세련되어 보이는 투블럭컷에 오른쪽 귀에 피어싱을 한 학생 하나가 그 둘을 노려보며 말했다.

“야, 자유 전공의 망나니들하고는 달리 지호는 자기 실력으로 우리 학교 온 거야. 그리고 그 일 있기 전에는 돈 많은 거 티 낸 적 한 번도 없었다. 너희들에게 그런 소리 들을 만큼 지호가 잘못한 게 뭐야?”

피어싱 학생은 말할수록 열이 받는지 목소리가 커졌고, 소곤거렸던 학생은 주위의 시선이 모이면서 주눅 든 표정을 지었다.

피어싱 학생의 목소리가 점점 커질 때 그의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이 있었다.

백지호였다. 백지호는 체크무늬 셔츠와 청바지를 편하게 걸친 옷차림이었는데, 선이 굵은 이목구비에 남자답게 생긴 얼굴이 믿음직해 보이는 스타일이었다.

“재성아, 그만해.”

한재성은 백지호의 말에 분노를 억누르고 벌떡 일어나서 주점을 나갔다.

한재성의 뒷모습을 보던 백지호는 소곤거렸던 학생들에게 말했다.

“내가 백산 그룹의 손자라는 걸 다 아는 마당에 이 정도 성의는 보여야 안 되겠냐. 나쁜 마음 없고 그냥 총회비 아껴서 나중에 학생회 더 잘 운영하라고 보태는 거니 너무 고깝게 보지 말아주라.”

“그, 그래. 미안. 우린 그런 뜻은 아니고…….”

“아냐, 됐다. 뭐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고.”

백지호는 우리나라 제1의 기업인 백산 그룹 총수의 손자였다. 향후 백산 그룹을 물려받을 가능성이 큰 위치인 것이다.

하지만 항상 겸손함과 하늘 밖에 하늘이 있음을 강조한 할아버지의 교육 덕분에 백지호는 자신의 배경을 드러내지 않았고, 스스로의 실력으로 한국대 경영학과에 입학해 학교생활을 하고 있었다.

학교에서도 자신의 배경은 굳이 밝히지 않고 스스로의 실력으로 인정받고 꾸려온 생활이니만큼, 과대표도 하며 열정적으로 학교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그 평온을 깬 것은 이아현이었다.

같은 학교였지만 자유 전공 학부인 이아현은 경영학과인 백지호와 만날 일이 없었고, 설령 학교에서 만났었다 하더라도 야망이 있는 이아현은 백산의 손자임을 밝히지 않은 백지호와는 엮일 일 없이 그냥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재벌 총수의 가족 모임에 나갔다가 백지호를 본 이아현은 그의 외모와 조건, 그리고 성품에 반해 줄기차게 백지호의 관심을 얻고자 하였다. 몇 차례나 고백도 했지만 백지호는 이아현에게 관심이 없었기에 계속해서 거절했었다.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이아현은 결국 경영학과 앞에서 백지호에게 다시 고백하며 백산 그룹의 손자라는 사실을 학생들에게 알렸다. 자신이 별 볼 일 없는 남자에게 들러붙는다는 이야기를 불식시키기 위해서였다.

그 이후로 백지호의 친한 친구들은 백지호에게 배신감을 느꼈고, 별로 친하지 않은 친구들이 백지호에게 들러붙기 시작했다.

사실 별일 아닐 수 있는 일이었다. 이아현은 재벌가의 손자라는 것이 나쁜 것도 아니고 오히려 선망의 대상일 것인데 그것을 밝히는 것이 뭐가 그리 큰 문제일까 생각했다.

하지만 돈이나 권력이 엮이지 않는 순수한 인간관계를 갖고 싶어 했던 백지호였기에 그가 재벌가의 손자로 밝혀진 이후 자신의 배경을 보고 다가오는 많은 사람을 견디기 힘들어했다.

이에 백지호는 마음 정리를 한다고 1년간 미국 여행을 갔다가 올해 한국에 다시 온 것이었다.

분위기가 가라앉는 것처럼 보이자 과대 진기정은 능숙하게 분위기를 이끌었다.

“자자, 이제 우리 개총의 하이라이트 신입생 장기자랑 한번 봅시다.”

장기자랑이라는 소리에 다시 분위기는 불타올랐고 OT에서 어느 정도 언질을 줬는지 몇몇 신입생이 용기 있게 무대로 올라왔다.

요즘 잘나가는 아이돌의 군무를 추는 신입생 무리도 있었고, 가창력을 뽐낼 수 있는 노래를 부르는 신입생도 있었다.

어떤 신입생은 개그를 짜와서 하기도 하였고, 성대모사 같은 개인기를 보이기도 하였다.

한 시간 정도가 지나고 장기자랑이 다 끝나갈 무렵, 과대 진기정이 눈을 빛내더니 마이크를 잡고 유리엘을 지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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