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
현세귀환록
010. 대학(2)
하반기 개강과 함께 각 과는 개강총회를 열었는데 자유전공학부의 개강총회는 매년 특별하게 열려왔다.
자유전공학부의 학생 대부분이 재벌 2세나 3세라는 어마어마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대학교는 국립대 중에서 가장 먼저 기부금 입학을 제도화한 학교였다.
사립대 중에서도 기부금 입학을 시행한 학교가 있었는데 여론은 좋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학벌주의가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돈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학벌이 대물림되는 것은 국민들의 공분을 사기에 당연했다.
그렇기에 국립대에서는 언감생심 생각도 못 하고 있던 사항이었다. 하지만 한국대의 전 총장은 생각이 달랐다.
어차피 소수의 재벌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부를 독점하고 대물림한다. 한국의 대학교들이 기부금 입학을 막는다 할지라도 그들의 학벌이 대물림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한국에서 불가능한 일이라면 기부금 입학이 쉬운 외국 대학교를 택하여 학력을 대물림한다. 오히려 일종의 국부 유출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한국대 전 총장은 차세대 리더 입학전형과 ‘자유 전공 학부’라는 것을 만들었다. 차세대 리더 전형으로 입학한 학생은 자유 전공 학부에만 지원할 수 있었고 자유 전공 학부는 정원이 별도로 없었다.
한 해에 몇 명의 기부금 입학생이 생길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교수들은 암묵적으로 자유 전공 학부생에게는 출석을 한 번도 안 하고 과제를 한 번도 안 내도 D-의 학점을 주었다. 즉, F는 절대 주지 않았다는 소리다.
F는 낙제로 재이수를 하지 않으면 학점이 모자라 졸업이 안 되기에, 졸업은 시킨다는 의미에서 암묵적으로 F는 면하게 해줬던 것이다.
한 명의 시간 강사가 정의감에 불타 한 자유 전공 학생에게 F 학점을 주었다가 재임용이 안 되는 사례가 있었기에 그 이후로 F를 주는 교수는 없었다.
처음에 이 제도에 학생도 학부모도 학벌의 대물림이라면서 극 반대했다. 하지만 총장은 뚝심 있게 관철하였고 6년 전 첫 자유 전공 학부가 생긴 이후로 지금까지 6기의 자유 전공 학부생이 입학하였다.
차세대 리더 전형에 지원하려면 최소 50억 원의 기부금을 내야 했는데 지금까지 자유 전공 학부에서 적립한 기부금만 3천억 원이 넘었다.
이 돈을 통해 장학금의 비율을 기존의 20%에서 40%까지 늘리고 비주류 학과의 지원금도 크게 늘렸다.
전 총장은 기부금 입학을 도입했다는 괘씸죄로 결국 재선을 하지 못하고 낙선했지만, 이 제도의 효율을 알게 된 학부모와 학생들은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고 결국 제도는 정착된 것이다.
어차피 재벌은 어떤 식으로든 재산과 학벌을 대물림할 것이고, 자유전공이라는 별도의 정원을 만들었기에 기존의 정원에 영향을 끼치는 부분도 없기에 배는 아플지언정 이전보다 혜택을 많이 받는 실정이었다.
올해는 스타우트 호텔의 연회장을 빌려서 개최했는데 홀에는 30여 명의 남녀 학생이 정장과 드레스를 입고 참석해 있었다.
자유 전공 학부 학생들 스스로도 이곳을 학교보다는 재벌가의 젊은이들이 인맥을 쌓는 일종의 사교장으로 보고 있었기에 이런 옷차림을 한 것이었다.
“잠깐 주목!”
연회용 수트를 입은 훤칠하게 생긴 20대 청년이 좌중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는 현재 자유 전공 학부의 과대표 4학년 유세진이었다.
180센티미터가 넘는 큰 키에 약간 차갑지만 귀공자처럼 생긴 그는 현승 그룹 회장의 손자였다. 재산 순위 2위의 거대 기업인 현승 그룹의 회장이 될지도 모르는 인물이었기에 자연스럽게 과대의 자리에 앉았다.
잠시 좌중을 둘러보던 유세진은 붉은색 이브닝 드레스를 입은 20대 초반의 여성에게 눈길을 주며 말했다.
그녀는 타는 듯한 붉은 색 드레스와 잘 어울리게 붉은 톤의 머리가 웨이브 져 있었고 늘씬한 몸매에 세련되어 보이는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저번 학기에 휴학했던 SKY 그룹의 이아현 양이 귀국했습니다. 모르시는 분들도 있을 테니 간단하게 소개 좀 해주시죠, 아현 양.”
주위의 시선을 받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듯 이아현은 오른손으로는 가슴을 가리고 왼손으로는 치마를 살짝 잡으며 인사를 했다.
“반갑습니다. 이아현이라고 해요. 작년엔 미국에서 공부한다고 휴학했었고 올해 복학했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짝짝짝짝.
이아현의 인사에 주위 사람들이 박수쳤고, 유세진은 다시 자연스럽게 좌중의 시선을 잡으며 말했다.
“2학기에도 건승하시길 바라면서 건배 제의하겠습니다. 건배!”
“건배~!”
좌중은 손에 든 와인 잔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건배를 따라 외쳤다.
이후로는 삼삼오오 친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이야기를 했는데 가장 많이 나오는 이야기가 중도 여신 이야기였다.
감색 수트를 세련되게 입고 있는 김창민에게 검은 연미복을 입은 최현호가 다가와서 이야기를 걸었다.
“창민아, 너 중도 여신 이야기 들었냐?”
“그래, 너도 들었냐? 학교 오니 애들이 다들 그 이야기더라.”
“아, 내가 한번 봤어야 했는데. 연예인 뺨치는 외모라는 게 사실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는데 아쉽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웬만한 연예인은 다 만나봤지 않냐.”
“현호야, 네가 봐서 어쩌려고? 전처럼 약 써서 일 벌이다가 걸리면 이번엔 너네 꼰대도 빼주지 못할걸?”
최현호는 얼마 전 SG 엔터의 신인 여배우와 스캔들이 있었다. 말이 좋아 스캔들이지, 실상은 최현호가 아버지가 운영하는 엔터테인먼트사의 신인 여배우에게 약물을 써서 몹쓸 짓을 하려다 벌어진 일이었다.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난리를 치는 여배우에게 결국 10억 원의 합의금을 주면서 일을 무마했었다.
“야야, 그때 그년이 별종이라서 그래. 다른 계집애들은 내 배경만 알면 알아서 줄 섰다니까? 연예인들도 뒷배경 없는 애들은 먼저 찾아오길래 몇 번 잤는데, 뭐.”
“그년은 백도 없다던데 뭐 그렇게 비싸게 굴어? 결국 판결까지 안 가고 돈 받고 끝냈잖아. 애초에 한 번 자고 말 것이지 왜 빼고 그랬대?”
“이미지 좀 팔리더라도 한 몫 크게 땡기고 싶었겠지, 뭐. 아무튼 웬만한 년들은 내가 꼬시면 다 넘어온다니까? 중도 여신인가 뭔가 하는 그년도 그래 봤자 일반인인데 내가 찍으면 끝이지 뭐. 아, 미리 알았다면 방학 중에라도 학교 좀 나오는 건데. 아쉽네, 아쉬워.“
“야. 남자 친구도 있다더라. 너무 헛물 켜지마.”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냐? 큭큭.”
최현호와 김창민의 목소리는 크진 않았지만 근처에 있는 유세진과 이아현은 들을 수 있었다.
“저런 쓰레기 같은 놈들.”
“뭐, 너도 전에 현호가 여는 산장 파티에 갔다 하지 않았어?”
둘은 친분이 있는 듯 편하게 말을 나눴다.
“산장 파티? 뭐? 난 그런데 안 가! 너도 알잖아. 내가 그런데 갈 것 같아?”
“안 갔으면 그뿐이지 왜 발끈하실까? 흐흥.”
비음 섞인 말투가 섹시한 그녀의 분위기를 더욱 뇌쇄적으로 만들었다.
‘어느 새끼가 말한 거야? 젠장, 알아봐야겠는데.’
사실 유세진은 이아현이 말한 것처럼 최현호의 소개를 통해 산장 파티에 갔다 왔다.
신인 여배우와 연예인 지망생이 낀 광란의 파티였는데 그녀들도 잘하면 재벌 2세를 낚을 수 있다는 생각에 자발적으로 참석한 파티였다.
비밀 파티였고 파티 멤버 모두 파티에 대해서는 함구하기로 했기에 유세진 역시 아무한테도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랬기에 당황한 유세진은 속으로 발설한 범인을 색출해야겠다고 이를 갈았다.
연예계에 발이 넓은 최현호는 종종 이런 파티를 만들었고 간혹 강제로 여자들을 납치해 약을 먹여서 하는 광란의 파티도 있었지만 유세진은 거기까지 가진 않았다.
자발적으로 유세진에게 달라붙는 여자들이 너무도 많은데 굳이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그런 향락에 빠지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발끈은 무슨! 억울한 누명이니 그렇지. 근데 아현아, 이제 내 맘 받아줄 때가 되지 않았니? 지호 형은 너 버리고 갔잖아. 이제 그만 잊고 내게 오면 안 돼? 오직 나만 네 곁을 지켜줄 수 있어!”
“야야, 느끼한 말 그만하고 연회나 즐겨. 그리고 지호 오빠가 언제 나 버렸다고 그래? 날 가진 적이 있어야 날 버리지. 그러고 보니 더 열 받네. 아, 나쁜 새끼.”
유세진은 몇 년 전부터 이아현에게 고백을 해왔지만 이아현은 백지호을 좋아하고 있었기에 거절했다.
하지만 백지훈은 이아현의 짝사랑을 알면서도 휴학을 하고 세상을 본다며 여행을 떠나 1년째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이아현도 그 때문에 미국으로 공부한답시고 떠났다가 이제야 돌아온 것이었다.
“여튼 나도 그 중도 여신이라는 애 궁금하긴 하네.”
“사진 봤는데 예쁘긴 예쁘더라.”
유세진은 진짜 친구라기보다는 부하에 가까운 친구에게 말을 해서 유리엘의 사진을 구했는데 하이엔드급의 카메라로 찍은 사진과 동영상을 보고 확실히 예쁘긴 예쁘다는 생각을 했었고 기회가 되면 한번 꼬셔서 넘어뜨려 보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뿐이지. 하룻밤 상대는 몰라도, 내 상대는 SKY 그룹의 아현이 정도는 되어야지.’
“사진 보여줘?”
“사진 있어? 그래 보여줘 봐.”
유세진의 손짓에 벽에 장승처럼 서 있던 남자가 다가와 타블릿 PC를 조작해 유리엘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와우, 진짜 예쁜데? 나보다 나은 것 같아.”
“야, 그냥 좀 예쁜 거지. 너보다는 훨씬 못해.”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네, 유세진. 호호호.”
“누군지 한번 알아봐?”
“됐어, 요즘은 안 보인다며? 이슈되려고 잠깐 학교 온 연예인 지망생 이런 거 아냐? 그러면 언젠가 방송 같은데 나오겠지. 신경 꺼.”
강민과 유리엘은, 아니, 유리엘은 입학도 하기 전에 한국대학교의 노블레스라는 자유 전공 학부의 남녀학생들에게 찍혀 있었다.
그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는 강민과 유리엘은 그간 고등 검정고시는 당연히 합격했고 수능 또한 무사히 치렀다.
둘 다 수능 만점의 점수를 받았는데 수능이 상대적으로 쉬웠는지 두 자릿수의 만점자가 나와서 크게 이슈는 되지 않았다.
다만 한미애가 너무도 기뻐하였고, 강서영이 보기에는 둘 다 공부도 별로 안 했는데도 만점을 받았다며 펄쩍 뛰며 놀라는 소소한 일이 있었다.
둘은 애초에 말한 대로 한국대학교에 지원하였고 그리 큰 고민 없이 경영학과를 선택했다.
“오빠랑 언니는 왜 경영학과에 들어가려고?”
“글쎄? 크게 생각 없이 선택했는데?”
“뭐라고? 과 선택을 뭐 그렇게 해? 본인의 적성을 알아보고 그에 맞게 해야지!”
“음, 그러는 서영이 너는 네 적성에 맞춰서 불문과 간 거야?”
“아, 아니. 그건 아니지만……. 어쨌든 나랑 오빠는 상황이 다르잖아!”
“뭐가?”
“나, 나는 한국대 타이틀이 필요해서 그랬던 거였지만…… 오빠는 아니잖아…….”
이야기가 괜히 강서영이 암울했던 옛날 일을 떠올리게 만든 것 같아서 강민은 곧바로 말을 이었다.
“경영학과는 나중에 회사라도 경영해 볼까 해서 가는 거야.”
“회사? 무슨 회사?”
“아직은 결정 안 했는데, 졸업하고 나중에 하나 사려고. 어머니도 내가 백수로 있는 거 안 좋아하시는 거 같으니 취직을 하든 사업을 하든 해야 할 거 같아서. 취직보단 사업이 편할 거 같지 않니?“
“회, 회사를 편하려고 산다고? 대체 오빠 돈이 얼마나 있는 거야? 전에 집 살 때도 그렇고…….”
“알면 다쳐. 하하하.”
사실 강민은 몇만 년간 차원을 돌며 이것저것 모은 것을 계산해 본 적이 없어 그 스스로도 자신의 재산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