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현세귀환록
006. 가족(1)
“……그때 내가 사라졌던 건 내 의지가 아니었어. 그곳은 돌아올 수 없는 곳이었지……. 그리고 살아남기는 더 힘든 곳이었고…….
강민은 문득 카이우스의 고문이 떠올랐다. 영혼의 힘, 영력을 시험한다는 명목하에 인간으로서, 아니, 신이라도 해도 이겨낼 수 없는 그 고문이, 수천 년간의 그 고문이 강민의 머릿속을 잠시 스쳐 지나갔다.
“어디 납치라도 된 거였어? 오빠가 왜? 좀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면 안 돼?”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일 거야. 그냥 사정이 있었다고 오빠를 이해해 주면 안 되겠니? 오빠도 무척이나 돌아오고 싶었지만 돌아올 수 없었단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오빠가 알려줄 테니 당분간 좀 참아주렴…….”
강민이 강서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처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강민은 실종과 귀환에 대해서 얼마든지 꾸며서 설명할 수 있었다.
하다못해 납치된 후 새우잡이 배에 팔려갔다는 시나리오로도 충분히 한미애와 강서영이 납득할 만한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강민은 그러지 않았다.
어찌 됐든 마나 기반의 이면의 세계가 실존하고, 강민에게는 거기서 얻은 힘이 있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지금, 가족을 [보호]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 언젠가 강민의 힘은 드러날 것이고, 결국은 어떤 방식으로든 설명을 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을 기다려준 가족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았다.
강민의 분위기와 목소리에 한미애와 강서영은 더 이상 실종에 대해서 물어볼 수가 없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한미애는 다시 강민에게 물었다.
“그럼 저 아가씨는 누구시니? 예사 분은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아까 결혼했다고 했니?”
“그래, 오빠. 저 연예인 뺨치게 생긴 언니는 누구야?”
“유리 때문에 내가 그 지옥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어. 유리는 내 영혼의 반려자야. 유리가 없었다면 난 결코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야.”
한미애는 아들의 생명의 은인이자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주었다는 사실을 듣고는 유리엘을 보는 눈이 호의적으로 변했다.
“그럼 결혼도?”
“네, 어머니. 결혼식 같은 건 하지 않았지만 분명 유리는 제 친구이자 연인이고 아내이지요.”
강민이 유리엘의 손을 잡으며 분명하게 말했다. 유리엘도 강민의 손을 따스하게 감싸면서 예의 그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아가씨, 김유리라고 했던가?”
“네, 어머님. 그냥 유리라고 부르세요.”
“그건 차차 그러기로 하고. 우리 민이의 말이 다 사실인가요?”
강민의 옆에 가만히 앉아 강민의 말에 미소를 띠고 있는 것만으로도 다 알 수 있었지만 한미애는 다시금 확인했다.
“네, 민의 말은 다 사실입니다. 우리는 영혼의 반려자이지요.”
“유리 씨는 우리 민이를 어떻게 만나게 된 거죠?”
“민은 제가 민을 구했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민이 절 구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유리엘의 말에 잠깐 갸웃거리던 한미애는 둘 사이가 깊은 관계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한미애는 둘 사이를 인정하고 한국 어머니들의 통상적인 질문을 시작했다.
“유리 씨는 혹시 양친이 계시는가요?”
유리엘은 잠시 슬픈 표정을 하더니 대답했다.
“아니요. 오래전에, 아주 오래전에 돌아가셨지요.”
“아, 그래요. 제가 괜한 것을 물었네요.”
“아니에요, 궁금하신 건 얼마든지 물어보세요.”
한동안 한미애와 강서영의 질문 공세에 시달렸지만 유리엘은 아름다운 미소를 잃지 않고 이계와 관련된 질문을 제외한 나머지 질문에는 충실하게 답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서로 간에 궁금한 점을 이야기하다 보니 강민이 들어올 때만 해도 밝았던 하늘이 어느샌가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에구머니나. 일 나가야 할 시간인데.”
“엄마, 오늘은 쉬면 안 돼? 10년 만에 오빠가 돌아왔는데 오늘까지 일 가야겠어?”
“그래도 미리 말한 게 아니라……. 지금 말하면 반장이 길길이 날뛸 텐데…….”
잠깐 고민하는 듯했던 한미애는 이내 마음을 먹은 듯 말했다.
“에휴, 그래도 십 년 만에 아들이 돌아온 날인데, 욕을 먹더라도 전화해서 쉰다고 해야겠어! 아프다고 해야겠네. 몸이 안 좋다는데 하루 봐주겠지.“
“어머니, 무슨 일인가요?”
“작은 식품 공장에서 일하고 있어. 아, 아들은 걱정하지 마. 서영이가 과외 알바도 해서 그렇게 어렵게 살고 있진 않아.”
한미애가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음에도 그녀의 거친 손을 바라본 강민은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과연 내가 여기 남아 있었다면 어머니와 서영이가 이렇게 살고 있었을까?’
모를 일이다. 지금이야 강민이 세상을 아래로 보는 무력과 금력을 가지고 있지만 만일 망한 집안의 고학생으로 살았다면 얼마나 더 잘 살 수 있었을까?
이를 알면서도 어머니의 고생에 기분이 착잡해지는 것까지는 막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 일은 그만하셔도 됩니다. 그리고 내일 제가 우리가 살 집을 알아볼 테니 같이 가요.”
“일을 그만하라고? 집은 또 무슨 이야기니?”
“어머니, 저 돈 많으니까 이제 아무런 걱정하지 마세요.”
“돈? 네가 무슨…… 아, 이것도 네가 실종된 것과 관련된 거니?”
“네, 어머니.”
“……민아, 지금은 네 말을 듣고 기다릴게. 하지만 언젠가는 말해줘야 해. 엄마는 널 믿는다.”
“네, 언젠가 모든 것을 알려드릴 수 있는 날이 올 거예요.”
물론 그때도 차원 이동과 영혼 고문 같은 이야기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이능의 세계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어느 정도의 설명은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오빠 돈 많아? 집을 사라고 할 정도면 좀 있는 것 같은데. 아, 그럼 이제 그놈들한테 시달리는 일은 없겠다. 에휴.”
“그놈들?”
“있어, 조폭 같은 놈들. 여기가 무슨 재개발 지구다 뭐다 해서 아파트 올릴 거라 주민들을 내쫓으려 한대.”
대충 감이 왔다. 다른 차원에서도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힘이 있는 자들이, 돈이 있는 자들이 더 많은 돈과 힘을 쥐기 위해서 약한 사람, 없는 사람을 쥐어 짜내는 일. 몇백, 몇천 번을 보았던 일이었다.
“석 달 전부터 심해지고 있는데 이젠 밤길 다니기가 무섭다니까? 얼마 전엔 저 아랫집에선 강도를 당했다는 말도 있고, 저 위에 아가씨는 험한 일까지 당할 뻔했는데 지나가던 청년이 도와줘서 살았다고 하더라구.”
강서영이 한껏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갔다.
“사람들은 쉬쉬하는데 어쩌면 그 조폭들이 주민들 몰아내려고 벌인 일이 아닌가 하는 말도 있어. 경찰한테도 연락했는데 형식적으로 순찰만 두어 번 더 돌더니 지금은 또 감감무소식이야.”
“그래, 이제 민이 너도 왔으니 우리가 더 이상 이 동네에 있을 이유가 없겠구나. 그간 모은 돈은 얼마 안 되지만 민이 네 도움 없이도 시내에 반지하 방 정도는 구할 수 있을 거야.”
“아니에요, 어머니. 돈은 신경 쓰지 마시고 가고 싶은 데서, 살고 싶은 데서 살면 돼요.”
“오빠, 얼마나 있길래 그렇게 말하는 거야? 엄마가 갤러리아팰리스 같은 데 말하면 어쩌려고.”
갤러리아팰리스는 서울에서 비싸다고 이름난 아파트 중 하나로 80평형대가 50억이 넘는 시세에 팔렸다는 기사도 났었다.
물론 진짜 상류층의 거주지는 이런 돈이 우습게 느껴질 만큼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이겠지만, 강서영은 알 수 없었기에 일반인의 시각에서 가장 비싸다는 아파트의 이름을 말했다.
“어머니께서 그곳에서 살고 싶다 하시면 그리로 가자.”
“뭐라고? 대체 얼마나 돈이 많길래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거긴 50억이 넘는다구, 50억!”
첫 달 품위 유지비가 들어왔을 테니 강민과 유리엘에게는 20억 원의 현금이 있었다.
게다가 연간 240억 원까지 한도를 사용할 수 있었기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사실 이런 품위 유지비가 없다 하더라도 유리엘의 아공간에 있는 황금을 조금만 꺼내 팔아도 될 일이었다.
“서영아, 걱정하지 말고 오빠 하자는 대로 하자. 나중에, 나중에 오빠가 설명해 줄게.”
“지금 해주면 안 되는 거야? 혹시 나쁜 일로 생긴 돈은 아니지?”
“나쁜 일은 무슨. 다 좋은 일로 번 거야. 걱정 마.”
강서영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강민을 바라보았다.
스스로 판단하기에 옳으면 행하였고 그에 대한 책임도 스스로 지면 되는, 그런 삶을 살아왔던 강민에게 일반적인 선과 악의 구분은 구애받을 대상이 아니었다.
“민아, 엄마는 그런 집까진 필요 없어. 할 수 있다면 예전에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그 집을 다시 찾고 싶구나.”
그 집은 강민의 아버지 강철수가 사업이 어느 정도 성공 궤도에 올랐을 때 구매한 집으로 작은 마당이 딸린 2층짜리 주택이었다.
그곳에서 강민과 강서영도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가족에게 의미가 큰 집이었다.
“네, 저도 어머니께서 특별히 가시고 싶은 곳이 없으시면 그리로 모시려고 했어요. 내일 그 근방 부동산을 찾아가서 알아볼게요.”
“그런데 지금 사는 사람이 팔지 않겠다고 하면 어쩌니?”
“너무 걱정 마세요. 다 잘될 거예요.”
강민은 웃돈을 줘서라도 그 집을 사야겠다는 마음을 먹으며 한미애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미애는 강민의 부드러운 미소에 한풀 걱정이 꺾였지만, 마음속 한편으로는 강민이 밝히지 않는 과거에 대한 생각을 계속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을 겪었길래……. 네가 어디서 무슨 일을 했든, 이제 다시는 우리를 떠나가지 말거라, 내 아들아…….’
그간 아르바이트다 과외다 가난한 고학생의 전형이었던 22살 대학생인 강서영도 신이 나서 외쳤다.
“아싸! 새집이라니! 신난다!”
하지만 강서영도 마음속으로는 행여 강민이 다시 떠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오빠, 이젠 어디 가지 말고 우리 곁에 있어 줘. 우리 그동안 너무 힘들었어. 엄마와 나와 함께 해줘, 오빠…….’
4명이 자기엔 좁은 집이었지만 모두 개의치 않아 했다.
특히 한미애는 유리엘에게 미안해했는데 유리엘은 괜찮다는 미소를 지으며 강민의 옆에 자리했다. 이를 본 한미애는 유리엘을 기꺼워했다.
강민과 유리엘이 잠든 것처럼 보이자 한미애는 딸 서영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대체 네 오빠가 10년 동안 무슨 일을 겪었을까? 무슨 일이길래 말을 하지 않으려는 건지…….”
“글쎄, 혹시 염전 노예나 새우잡이 배 같은데 팔려간 거 아냐? 전에 뉴스 보니까 사람들 막 납치해서 외딴 섬에 팔거나 원양어선에 판다고 하던데…….”
“아니야, 그 많은 돈은 설명이 안 되잖아.”
“아, 혹시 전쟁 용병 같은 건 아니었을까? 전에 영화에서 보니 어린아이들 잡아서 전쟁 용병으로 키운다던데. 그런 용병은 돈도 많이 번대. 오빠가 나이가 차서 이제 보내준 건 아닐까?”
“설마 그런 무서운 일을 했을 리가……. 나중에 네 오빠가 설명해 주겠지……. 어려서부터 강단이 있는 아이였으니 언제고 결심이 서면 알려줄 거야, 아마.”
“그래, 엄마도 너무 물어보지 마. 아까 오빠 보니까 표정이 안 좋더라. 안 좋은 기억이 많았나 봐.”
“그래, 알겠어. 내일도 과외해야 할 텐데 얼른 자.”
“응, 엄마도 잘자.”
한미애와 강서영의 대화를 한참 듣고 있던 강민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떠나지 않을게요. 어머니, 서영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