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현세귀환록
005. 귀환(5)
한국 본부는 남산타워 지하에 숨겨져 있었다. 남산에 도착하여 헬기에서 내린 일행은 전용 무빙워크를 통해서 본부로 들어갔다.
본부에 들어온 일행은 바로 관련 부서에 들러서 신분증과 회원증을 수령했다.
유니온 멤버 전용 스마트폰도 지급하였는데 스마트폰을 처음 보는 유리엘은 이를 신기해했다.
“이건 작은 컴퓨터나 마찬가지네요. 이 세계의 마나 문명은 모르겠는데 일반 문명 수준은 상당한 수준이네요.”
“그래 봤자 캔딜러 차원의 기술 수준에 비하면 아직 한참 멀었지.”
“캔딜러 차원은 그래도 마나 기반이었잖아요. 마나 없이 이 정도면 대단한 거지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강민과 유리엘에게 관련 절차를 다 처리한 김창수가 돌아왔다.
“이제 절차는 다 끝났습니다. 다만 본부장께서 뵙고 싶어 하시는데 같이 가실 수 있겠습니까?”
“원래 통상적인 절차인가요?”
“C급 이하 능력자의 경우는 그냥 제 선에서 가입하고 끝나지만 B급 능력자부터는 보통 본부장님과 다과 정도는 하시지요. 특히 무소속이라면 유니온 차원에서 포섭하기 위해서라도 꼭 만나 뵙고요.”
“김 과장님은 솔직하시네요.”
“뭐 숨길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허허허.”
강민과 유리엘을 안내한 김창수는 긴 복도 끝 문에 달린 벨을 눌렀다.
안에서 열 수 있는 문인지 벨 소리가 나고 잠시 후 자동으로 문이 열렸다. 그 안에는 다섯 명의 직원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안쪽에는 큰 문이 하나 더 있었는데 문 옆으로 놓인 테이블에는 뒤로 머리를 묶고 안경을 쓴 20대 중반 여성이 업무를 보고 있었다.
“저기, 미스 정?”
“아, 김 과장님. 아! 이분들이신가요?”
“그래, 이분들이시지. 본부장님 계시지?”
“네, 기다리고 계세요.”
“그럼 말씀드려주게나.”
“잠시만요.”
정은미는 테이블에 놓인 인터폰을 통해서 김창수와 일행이 도착했음을 알렸고 인터폰에서는 모시고 들어오라는 응답이 나왔다.
“이리로 오시지요.”
정은미는 익숙하게 일행을 안내했다.
들어온 방 안에는 커다란 책상이 보였고 책상의 뒤쪽으로 우리나라의 지도가 홀로그램으로 떠올라 있었다.
염색할 때가 조금 지났는지 흰머리가 군데군데 보이는 검은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넘긴, 선이 굵게 생긴 보통 체구의 장년이 큰 의자에서 일어나 반갑게 일행을 맞았다.
“반갑습니다. 제가 한국 본부를 맡고 있는 김세훈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강민입니다.”
“김유리예요.”
김세훈 본부장은 보통의 체구에도 한 본부의 장이라는 위치 때문인지 은연중에 풍겨 나오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김유리? 아, 한국 국적 때문에 이름을 바꾸셨다고 했지요? 이리로 앉으시지요. 차는 무엇으로? 커피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괜찮습니다.”
“미스 정, 차 부탁해.”
“알겠습니다. 본부장님”
정은미는 방을 나갔고 일행은 본부장 책상 앞의 손님용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김세훈은 이런 자리가 익숙했는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김세훈 역시 강민이 굳이 언급하려 하지 않는 부분은 파고들어 묻지도 않았다.
정은미가 놓고 간 차를 다 마실 때쯤 김세훈은 본론을 꺼냈다.
“금강선원의 보증으로 오셨지만 아직 아무 소속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네, 일단은 어디에 소속될 마음도 없고요.”
“우리 유니온에서 같이 일해보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금전적인 면이나 일반 세상에 영향을 미친다는 권력에서의 면이나, 다른 단체에 비해서 섭섭하지 않을 대우를 약속드립니다.”
“꽤 노골적이시군요.”
“대화를 해보니 겉치레를 좋아하진 않으신 것 같은데, 아닌가요?”
“그건 맞지만, 아까 말씀드린 대로 지금은 어디 소속이고 싶지는 않아서요. 그리고 금전적인 면은 상당히 부족하다고 들었는데 아닌가요? 아까 김 과장님이 능력자 세계의 공무원이라 하던데.”
강민의 김세훈 본부장은 김창수를 바라보았고 김창수는 본부장에게 괜히 그런 말을 한다는 눈빛으로 강민을 흘겨보았다.
“공무원이라…… 맞습니다. 그렇죠. 하지만 사회에서의 권력은 유니온을 따라갈 단체가 드물지요. 그런데 돈이 필요하신 겁니까? 그렇다면 월급이 아니라 활동비로 원하시는 금액을 맞춰드릴 수도 있습니다.“
김세훈 본부장은 적극적으로 강민과 유리엘을 영입하려고 하였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아직은 그럴 생각이 없군요.”
“아, ‘아직은’입니까? 알겠습니다. 혹시 향후에라도 생각이 바뀌시면 연락 주시죠. 여기 제 명함입니다.”
김세훈의 명함은 금색의 플라스틱으로 ‘유니온 그룹 한국 지사장 김세훈’이라는 글자와 함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역시 유니온 그룹이 유니온의 일반 사회에서의 이름인가요?”
“네, 뭐 능력자는 다 알고 있고, 일반인도 능력자와 끈이 있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으니 굳이 이름을 바꿀 필요가 없지요. 아시다시피 우리 유니온 그룹은 일반 세계에서도 굴지의 그룹입니다. 취업하신다고 해도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하하하.“
다과를 마친 일행이 밖으로 나가자 원래 자신의 자리인 본부장석에 돌아간 김세훈 본부장은 의자에 등을 기대인 채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눈을 뜨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총장님께는 보고하고, 위원회에는 잠시 보류해야겠군…….”
집까지 안내하겠다는 김창수를 만류하고 본부를 나온 강민은 남산에서 서울 시내를 바라보며 잠시 상념에 잠겼다.
유리엘은 신뢰와 사랑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강민을 바라보며 언제까지나 강민이 움직일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민은 과거 가족과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어렵게 사업을 시작했던 아버지가 승승장구하던 모습, 사업이 잘나가 가족 간의 화목했던 모습, 다 같이 식사를 하며 여행을 갔던 행복했던 모습.
그리고 IMF 외환위기의 직격탄에 맞아 아버지의 사업이 무너져 갔던 모습, 아버지의 죽음에 따른 생명 보험금으로 빚의 굴레에서는 빠져나왔지만 살기 위해서 아등바등했던 처참한 모습.
망각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강민은 모든 일이 어제 일처럼 생생히 떠올랐다.
“민, 기분이 어때요?”
“글쎄, 어제같이 생생하게 떠오르긴 하는데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감정이 마모되었는지 생각처럼 가슴 뛰지는 않네.”
“기억과 실질은 다르니까요. 만나보면 다를 거예요. 가족이라…… 그리운 단어네요.”
“그래, 나도 그립게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만난다니 실감이 안 나.”
능력을 발휘하면 얼마 걸리지 않을 거리이지만 강민은 대중교통을 타고 가기로 하였다.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강민은 상념에 빠져 있었고, 유리엘은 그런 강민을 따뜻한 미소로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지하철과 버스를 탄 사람들만 유리엘의 미모를 보고 몰래몰래 사진을 찍었지만 유리엘은 그런 것 따위에 신경 쓰지 않았다.
강민이 지금 오르고 있는 곳은 좁은 골목을 이리저리 지나쳐서 수많은 계단을 켜켜이 올라가야 하는 소위 말하는 달동네였다.
지금도 하늘에 둥근달이 떠올라 있었고, 달빛은 하늘 아래 가장 가깝다는 이 달동네를 어루만지듯 비추고 있었다.
한참 계단을 올라가자 녹색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져 있는 작은 철문이 하나 있었다.
문 앞에 선 강민은 들어가지 않고 한참 동안 녹슨 철문과 여기저기 움푹 파여 있는 기둥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여기인가요, 민?”
“그래, 여기야.”
이 세계로 돌아오며 가족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많은 생각을 하였지만, 이렇게 한 걸음만 나서면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것에 감회가 새로워져 다시금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마음을 먹은 강민이 문을 열었다.
대문을 열고 강민이 한 걸음을 내디디려 할 때 한 중년의 여자가 쓰레기봉투를 들고 현관문을 나서고 있었다.
강민과 중년의 여성은 말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누구신지……?”
잠시 낯선 이가 집에 들어온 것에 당황하던 그녀는 강민의 얼굴을 바라보다 경악한 듯 눈을 부릅떴다.
“너, 너…… 너는!”
입은 벙끗대는데 속에서 뭔가 잡아당기기라도 하는지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는 토하듯 뒷말을 내뱉었다.
“민아! 민이 맞지? 민이 맞는 거지?”
“네, 어머니. 돌아왔습니다. 제가 민이 맞습니다.”
“민아, 흐흐흑……. 민아, 그동안 어디 있었던 거냐, 흑흑……. 어디 있었어, 이 녀석아…….”
울음이 터진 그녀는 한달음에 달려와 강민을 껴안았다. 그녀는 울면서 힘겹게 말을 이었다.
“엄마! 무슨 일이야? 무슨 일 있어?”
그때 트레이닝 복을 입은 귀엽게 생긴 젊은 여성 한 명이 무슨 일인가 싶어 마당으로 나왔다. 강민의 여동생 강서영이었다.
한미애가 강민을 껴안고 울고 있는 모습에 잠깐 어리둥절하였다.
“엄마! 왜 그래? 저 사람은 누구고?”
“서영아! 네 오빠야, 오빠. 민이 말이다. 민이…….”
처음엔 울고 있는 엄마의 모습에 낯선 남자를 살필 틈도 없었는데, 엄마의 말에 그 얼굴을 확인해 보니 정말 자신의 오빠 강민이 맞았다.
강서영은 충격을 받은 듯 비척비척 둘에게로 걸어왔다.
“오빠? 오빠 맞아? 정말 오빠야?”
“그래, 서영아. 오빠 맞아.”
“왜 이제 왔어, 왜! 우리가 얼마나 찾았는데!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흑흑.”
“그래…… 나도 보고 싶었어…….”
강민도 말을 잇지 못했다.
기억과 실질이 다르다는 유리엘의 말이 맞았다. 아무리 생생한 기억이라도 기억은 기억일 뿐이었다.
앞에서 느껴지는 목소리와 촉감, 가슴 뜨겁게 느껴지는 감정은, 기억 속에서 그대로 보고 느꼈다고 하더라도 다가오는 떨림의 크기가 달랐다.
한동안 부둥켜안고 울음을 멈추지 못했던 모녀는 강민의 옆에서 따뜻한 미소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유리엘을 볼 수 있었다.
“민아, 이분은 누구신지? 너랑 함께 오신 분 맞지?”
“네, 어머니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랑 평생을 함께할 유리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김유리라고 합니다.”
“어, 어머님? 미, 민아. 평생을 함께한다는 건 결혼을 한 사이라는 말이야?”
“네, 어머니. 먼저 말씀을 드려야 했던 일이지만 제 상황이 그렇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어, 어떻게……. 아니, 이럴 게 아니라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하자꾸나.”
“네, 어머니.”
그들이 들어간 집은 전형적인 판자촌의 작은 쪽방이었다. 방이라 부를 것도 따로 없을 만큼 작은 집이었다. 그 안에 4명이 들어가자 방이 꽉 찬 느낌이 들었다.
“누추하지만 이리로 오세요, 아가씨.”
“유리라고 불러주세요, 어머님.”
“흠흠, 아직 내가 아가씨를 잘 몰라서…….”
말끝을 흐린 한미애는 강민을 바라보며 물었다.
“민아, 대체 어떻게 된 거냐? 10년간 어디에 있었고. 저 아가씨는 어떻게 만난 거야? 이야기 좀 해봐라.”
“그래, 오빠! 나도 궁금해 죽겠어! 우리가 그동안 오빠를 얼마나 찾은 줄 알아? 아빠 그렇게 되시고 난 다음에 오빠까지 없어져 버려서 엄마랑 나는 정말 어찌할 바를 몰랐었다고…….”
말하다 보니 다시 그때의 생각이 났는지 강서영은 말을 끝내지 못하고 울음이 울컥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