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현세귀환록
002. 귀환(2)
강민은 수만 년의 생을 살아왔다.
최초 웜홀에 빠져서 아케론 대륙에서 생체 실험을 당하며 지내온 수 천 년을 제외하더라도 그는 유리엘과 함께 벌써 2천여 개의 차원을 돌아다니며 수만 년의 생을 살아왔다.
그 삶 속에는 수없이 많은 경험이 있었다. 그 경험들을 되새기며 강민은 지금 상황에서 가장 적합한 대응을 찾고 있었다.
강민의 머릿속 상념은 길었지만 실제 시간은 잠깐이었다.
안광을 번쩍이며 눈을 뜬 강민이 유리엘에게 말했다.
“유리엘, 자메인 차원에서의 일들 기억하지?”
잠시 생각하던 유리엘이 아련한 표정을 짓다가 대답했다.
“자메인 차원……. 기억하죠, 어떻게 그걸 잊겠어요.”
“그래, 잊을 수 없는 일이지. 유리엘, 우리 그때처럼만 행동하자.”
“그때처럼이라면 [적응], [은둔]과 [징벌] 정도 말이죠?”
“거기에다 [보호]까지.”
“[보호]까지. 알겠어요. 민의 뜻대로 해요. 결국은 그들이 원할 때까지죠?
“그래, 원치 않는다면 굳이 고통스럽게 이을 필요는 없지.”
“그렇다면 마스터가 되지 못하면 길어야 2백 년 정도겠군요. 그 후엔 어떻게 할 거예요, 민?”
“그 후엔……. 아마 전과 같이 너와 차원 여행을 하겠지. 너는 영원한 내 영혼의 반려자이니까.”
“그렇죠. 여행이죠, 여행……. 끝나지 않는 우리의 여행, 호홋.”
유리엘이 강민을 보며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강민과 유리엘의 알아듣지 못할 대화가 어느 정도 정리된 것 같이 보이자 승려가 다시금 강민에게 물었다.
“우리말도 하실 수 있는 것 같은데, 어디 소속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소? 아니, 그보다 내가 생명의 은인의 성함조차 듣지 못했구만. 나는 금강선원의 진명이라 하오.”
“아, 진명 스님이시군요. 저는 강민이라 하고 이쪽은 유리엘이라 합니다. 그리고 소속이라……. 우리는 소속이 없습니다, 스님.”
“아니, 그 정도 경지를 그럼 독학을 했단 말이오?! 그리고 강민 시주와 유리엘 시주는 다른 계통의 능력을 사용하는 것 같은데, 같이 독학을 한 것이오?”
“독학이라……. 그렇지요, 독학이라면 독학인 것이지요. 여하튼 우리는 소속이 없습니다.”
“허어, 강민 시주는 우리나라 분인 것 같은데 유리엘 시주는 어느 나라 분이오? 이름을 들으니 우리나라 분 같지는 않은데…….”
“호호, 저는 언제나 민과 같은 편이지요.”
“아……. 이런 능력자들이 우리나라에 있었다니! 나라의 홍복이오, 홍복! 이럴 것이 아니라 우리 금강선원에 들러서 자세한 이야기를 하면 어떻겠소?”
“그렇게 하시지요, 스님.”
강민은 지금 당장에라도 가족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우선 현실을 파악해야 가족의 삶을 지킬 수 있을 거라 판단해 진명의 말을 거절하지 않았다.
강민과 유리엘은 많은 차원을 다니는 과정에서 많은 동료와 적이 생겼었다.
강한 힘을 가진 사람에게는 언제나 힘을 이용하려는 사람, 힘을 두려워하는 사람, 힘을 나눠달라는 사람, 힘을 뺏으려는 사람 등 수많은 인간 군상이 다가왔다.
차원 이동 초반에는 그러한 인간들을 도우며 한 국가를 건립해 보기도 하고, 적들에게 대응하여 한 나라, 아니 한 문명을 박살 낸 적도 있었다.
지금까지 돌아다닌 차원에서는 강민과 유리엘의 힘에 대적할 만한 상대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랜드 마스터급의 상대는 다수 있었지만 그들조차 경지를 회복한 강민의 일초지적도 되지 못했다.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서 강민과 유리엘은 해당 차원의 문명에 맞추어 일종의 행동 양식을 설정하고 행동했다.
그리고 이번 행동 양식은 [적응]과 [은둔], [징벌], 그리고 [보호]였다.
“저기 저 일주문만 지나면 금강선원이요.”
진명이 손짓한 곳에는 고풍스러운 일주문이 하나 서 있었고 유려한 필치로 금강사라 적힌 현판이 달려 있었다.
“금강사?”
“금강사는 우리 금강선원의 외원 격이지. 이리로 따라오시오.”
일주문을 기점으로 평범한 사람은 알아차릴 수 없는 결계가 펼쳐져 있었는데, 강민 일행은 결계가 없는 듯 일주문을 지나쳤다.
“결계가 느껴지지요? 항마수호진이라는 결계인데 악의를 품은 사람을 막는 공능이 있소이다.”
강민이 느끼기에 또 다른 결계가 있는 것 같았지만 진명이 언급하지 않았기에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일주문을 지나 얼기설기 만들어놓은 돌계단을 올라가자 여러 인영이 진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진명 사제! 왜 이제야 오나? 이분들은 누구시고? 자네가 하도 오지 않아 사람을 더 보내려고 하던 참이네.”
“진운 사형, 죄송합니다. C급 마물이라 판단하고 혼자 처리할 수 있다 생각했는데 마지막에 뜻밖의 공격을 받아 하마터면 죽을 뻔했습니다. 다행히 저분들이 나타나 저를 구해주셨지요. 인사드리시지요. 이분들은 강민 시주, 유리엘 시주입니다.”
“아니, 그런 일이 있었는가? 감사합니다, 시주님들. 저는 금강선원의 대제자 진운이라고 합니다. 원주이신 사부님을 대신하여 현재 금강선원의 일을 보고 있지요. 저희 진명을 구해주셔서 다시 한번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 밖에서 이럴 것이 아니라 우선 방으로 드시지요.“
진운은 진명과 함께 강민과 유리엘을 봉래각이라는 현판이 붙은 방으로 안내했다.
“사형, 이분들은 대단한 능력을 갖고 계신데 홀로 그것을 익히셨는지 이능의 세계에 대해서 지식은 별로 없으십니다.”
“아, 그렇군요. 어찌 되었든 저희 진명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희가 안내자 역할이 되어드리겠습니다.”
“안내자라면?”
“홀로 이능을 깨우친 능력자를 이능의 세계로 이끄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지요.”
강민과 유리엘이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진운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짚어냈다.
“일반적으로 무공 능력자나 마법 능력자는 문파나 도제식의 교육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이능의 세계로 진입하지만 에스퍼 같은 초능력자들, 즉 각성형 능력자는 갑작스러운 각성을 통해서 능력을 깨우치기에 사전 교육을 받을 수도, 할 수도 없습니다.”
이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정보에 강민과 유리엘은 눈을 크게 떴다. 진운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서 유니온 소속의 능력자들은 이런 각성형 능력자가 능력을 깨우치게 되면 의무적으로 능력자 세상의 기본적인 정보를 알려주게 되어 있지요. 저도 안내자는 처음이지만 성심성의껏 알려드리겠습니다. 혹시 궁금하신 사항이 있으신지요?“
“진명 스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올림포스나 유니온 같은 이능을 가진 단체가 있다는 것 같은데, 이 부분을 알고 싶습니다.”
“아, 일단 유니온의 창설부터 말씀드리는 것이 이해하시기 편하시겠군요. 유니온은…….”
진운의 설명에 따르면 이 세상에 이능은 예전부터 존재해 왔다. 다만 일반인은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이능력자 역시 서로의 존재를 정확히 아는 것은 아니었고 이능을 가진 다른 단체가 있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러한 이능력자 단체가 수면 위에 떠오른 것은 유니온의 창설과 함께였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에 떨어진 원자폭탄은 이능력자의 세계에도 큰 충격을 주었다.
S급의 능력자가 아니고서야 원자폭탄을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절대의 능력을 발휘하는 S급 능력자도 원자폭탄에 직격당하면 버틸 수 없을지도 몰랐다.
E급 능력자만 하더라도 권총 정도는 피할 수 있었고, C급 능력자만 되어도 대인 무기로는 피해를 줄 수 없었기에, 인간 문명의 발전과 함께 발달한 전쟁 무기에도 이능력자들은 크게 우려하지 않았다.
대물 병기에 맞게 되면 다소 위험하기는 하였지만, 주의만 한다면 C급 이상의 능력자는 그것을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원자폭탄은 이야기가 달랐다. 실제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에 일본의 이능력자 1,000여 명이 잿가루가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세계의 주요 능력자 단체가 연합한 유니온이 창설되었다.
2차 대전의 시작은 강력한 정신계 능력자인 히틀러였다. 그 전쟁의 여파는 일반인에게만 머무르지 않고 이능의 세계에도 영향을 미쳤기에 더 이상 일반인 세계를 이능력자가 마음대로 주물러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또한 이능의 세계 역시 일반인 세계를 기반으로 존재하는 것이었기에 유니온의 주목적은 일반인 세계가 극한으로 치달아 자멸하는 것을 방지하고, 능력자 간의 분쟁이 격화되어 일반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하지만 유니온 창설의 원인이 된 능력자가 일반인을 지배하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제재를 가하기 힘들었다.
유니온의 창설 멤버 자체도 일반인을 지배하고 통제해왔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힘을 가진 이능력자는 일반인 세계를 암중 지배하여 왔고, 때로는 표면에 나서서 통치하기도 하였다.
결국 유니온은 암중 통제에 관해서는 크게 제재하지 못하고, 다만 표면적으로 드러날 만큼 일반인 세계에 큰 영향을 주는 경우만 제재하기로 결의했다.
이를 위해 이능력자의 이능이 일반인에게 드러나는 것을 최대한 막았다.
결국 유니온의 창설 목적은 다소 모순적이게 되었다.
‘일종의 과도기 상황이로군. 외부의 충격이 가해진다면 빠른 시일 내에, 외부의 충격이 없더라도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 결국은 붕괴될 체제군.’
강민은 과거 경험에서 이런 상황을 보았다.
힘을 가진 사람 중에는 힘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깨닫고 은연 자중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힘에 취해서 힘을 과시하려는 사람도 많았다.
전자가 많은 경우에는 힘이 통제되어 일반인이 힘의 존재를 모르게 할 수 있었으나, 후자가 많아지면 결국 일반인은 힘을 가진 자들에게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
결국은 힘에 따른 계급이 생기고 힘이 없는 피지배 계층은 힘을 가진 지배 계층에게 통제당하게 된다.
‘그것이 인간 세상이지. 결국은 약육강식의…….’
현재 유니온의 기준에 따르면 능력자는 F급부터 S급까지 있었다.
F급은 마나를 느끼는 수준만 되어도 얻을 수 있는 등급이고 S급은 오러 소드를 사용한다는 것을 보니 마스터 정도의 힘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그랜드 마스터 수준이면 SSS급이라 하는 것 같지만 현재는 없다고 하니 이 세계의 이능 수준을 짐작할 수 있었다.
‘현재 무력으로도 활동에는 크게 지장이 없겠군.’
그때 유리엘이 진명에게 물었다.
“진명 스님, 그런데 아까 그 지네 모양의 괴물은 뭐죠?”
“아, 그 괴물은 이계의 마물입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웜홀이라는 통로가 있습니다. 그 통로는 차원과 차원을 잇는 일방통행의 통로인데 생성된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 통로를 통해서 우리 세계에 종종 괴물이 나타나고 주로 이능력자들이 그것을 처리해 왔습니다. 대다수의 마물은 이곳의 기에 적응을 못 하는지 불꽃을 튀기면서 자멸하는 경우가 많은데 몇몇 강대한 마물은 상당히 오랜 시간을 버티며 일반인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행히 강대한 마물은 기의 흐름이 풍부한 지역에 주로 발생하기에 주요 웜홀 발생 지점에는 항상 유니온 소속의 이능력자를 가까이에 배치해놓죠. 이곳은 저희 금강선원의 담당 구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