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현세귀환록
001. 귀환(1)
2005년 7월 금강산 비로봉 인근
꽈가강-!!
하늘에서 억수 같은 비가 내리고 있었고 종종 번개마저 번쩍거렸다.
번개에 이어 들려오는 천둥소리는 치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울창한 나무숲 사이 직경 20미터가량의 공터가 있었는데 공터의 중앙 허공에서 칼로 자른 듯한 균열이 발생했다.
이윽고 공간이 찢어지며 터질 듯이 공간의 균열에서 바람이 튀어나갔고 주위의 나무들도 태풍을 맞은 듯 휘청거렸다.
어느샌가 남녀의 두 인영이 균열 앞에 나타났고 그중 남자가 손을 휘둘러 균열을 지웠다.
두 남녀는 중세시대에서나 볼만한 옷을 차려입고 있었다.
남자는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의 동양인으로 보였고, 얼핏 보아도 180센티미터가 훌쩍 넘어 보였다. 그리고 그가 차려입은 중세 유럽풍의 흰 셔츠 밑으로는 탄탄한 근육이 비쳤다.
마찬가지로 검은 머리, 검은 눈의 여자는 약간 서구적인 느낌이 나는 동양인으로 170센티미터가 넘는 장신의 매우 아름다운 미녀였는데, 몸을 감싸는 은색 로브를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볼륨감을 숨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특이한 점은 옷차림이 아니었다.
그들은 온몸에 전기에 통하고 있는 듯 번쩍번쩍 스파크가 튀면서 격렬하게 불타고 있었던 것이다.
“으윽, 마나 반발이 장난이 아닌데요? 전 차원의 마나랑 이곳의 마나가 상성이 상당히 안 좋은가 봐요, 민.”
민이라고 불린 남자가 잠시 사방을 둘러보다가 대답했다.
“일단 주위에 위험 요소는 없는 것 같아, 유리엘. 우선 이 마나 반발부터 해결하고 이 차원에 대해 알아보자고.”
강민은 손을 들어 바닥을 슬쩍 내리쳤다. 그러자 소리도 없이 직경 5미터 정도의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엄청난 깊이의 구덩이가 파였다. 마치 갑자기 그 공간이 지워진 듯했다.
둘은 깃털이 내려앉는 듯 강민이 판 구덩이로 내려갔고 바닥에 도착하자 유리엘이 복잡한 수인을 맺었다.
유리엘이 수인과 함께 나지막이 읊조리자 둘 주위로 반투명의 둥근 막이 생겼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어.”
강민이 유리엘에게 말을 하며 다시금 손을 흔들자 깊은 구덩이가 다시 메워졌다.
투명한 막이 은은하게 빛나는 매립된 공간에서 강민과 유리엘은 마주 본 상태로 눈을 감은 채 가부좌를 틀고 앉아 내부로 침잠해 들어갔다.
그리고 10년이 흘렀다.
* * *
2015년 7월 금강산 비로봉 인근
동해 바다 멀리 불타는 듯한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금강산에 울창하게 우거진 숲 사이로 내리쬐는 그 빛은 신비로움을 넘어 어쩐지 경건하게 보이기도 했다.
그 빛이 내리쬐는 한 부분이 갑자기 꿈틀거리더니 굉음과 함께 터져 나가며 두 명의 사람이 나타났다.
10년 전에 스스로 매몰되었던 강민과 유리엘이었다. 다시 나타난 그들에겐 전과 같은 스파크는 없었다.
민은 전보다 훨씬 편안해 보이는 표정으로 유리엘에게 말했다.
“유리엘, 어느 정도 회복된 것 같아? 여기 마나는 처음인데도 너무 익숙해서 이상하게 예상했던 시간보다 훨씬 적게 든 것 같아.”
“그렇죠? 민, 저도 이 정도 마나 반발을 볼 때 최소 20년 정도는 회복해야 간신히 신체 정도만 재구성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의외였어요.”
“그러게 말이야. 마나 능력은 어느 정도 회복했어?”
“일단 마법은 예전 경지의 20%가량 회복했고, 무공도 30%나 회복해서 광검 정도는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예전의 경지에 비하면 25% 정도랄까요? 민은 어때요?”
“음……. 난 예전의 30% 정도의 수준인가?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만 무검까지도 가능할 것 같아. 아무래도 유리엘은 마법까지 신경 써야 하니 조금 더 걸리는 것 같아.”
강민은 손을 쥐락펴락하면서 유리엘에게 이야기를 했고, 그녀도 신체의 마나를 돌리며 몸 상태를 점검하면서 대답했다.
“그러게요. 그래도 이 정도 시간 만에 무위를 이만큼 회복한 거면 예상보다 훨씬 빠른 거죠. 그리고 민이나 저나 몇 년 지나면 금방 예전 경지를 회복할 테니까요. 이 세계의 무력 수준을 알아보고 수련이 필요한지 여부를 판단하죠. 뭐 여태까지 경험을 봤을 때는 이 정도 수준으로도 어려운 일을 겪으리란 생각은 안 들지만 말이에요. 호호호.”
“이번이 몇 번째였지?”
“정확하게 1,983번째 이동이에요.”
“참, 고향 한번 찾아가기가 힘드네. 뭐 무수하게 많다는 차원 속에서 랜덤하게 찾아가는 거니 아직은 초반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뭐, 마찬가지로 끝나지 않을 시간이 있으니까요. 언젠가는 찾아지겠죠.”
“전처럼 우선 움직여서 여기의 문명 수준을 한번 파악해 보고 행동 방식을 결정하자. 마침 저기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것 같으니 우선 저리로 가 보지.”
우측을 바라보며 말을 하던 강민은 말을 마치자마자 휙 사라졌다. 그에 유리엘은 못 말리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곧바로 강민을 따라갔다.
강민이 나타난 곳은 5미터가 넘는 지네 모양의 괴물과 머리를 박박 깎은 30대의 승려가 결투를 하고 있는 장소였다.
지네 괴물은 과거 강민과 유리엘이 처음 왔을 때처럼 온몸이 불타면서 스파크가 튀고 있었기에 한눈에 타 차원에서 온 존재임을 알아챘다.
“저 정도 마나 반발이면 저 녀석도 오래 버티진 못하겠는데요?”
“어차피 마나 반발로 소멸하기 전에 저 승려가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강민과 유리엘은 하늘에 떠 있는 상태로 그들의 결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때문에 지네와 승려는 그들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한 채 결투를 이어갔다.
“민, 저 사람 하나만 봐선 아직 잘 모르겠지만 여기 마나 사용 수준도 아예 무시할 정도는 아닌데요?”
“그러게 말이야. 이센 차원 정도 수준은 되는 것 같은데? 어느 정도 정련된 투로하고 마나 심법이 있는 것 같아.”
“이센 차원보다는 다카르 차원 쪽에 가깝지 않을까요? 저 승려가 차고 있는 팔찌에서 술법의 기운도 있거든요. 그리고 여기저기에서 전자기까지 느껴지는 것으로 봐선 데케인 차원 정도의 기술력도 있는 것 같아요.”
“종합해 보자면 최소 1,492번째 들렸던 코로스 차원 정도의 문명은 가지고 있다는 거네.”
지네 괴물과 승려의 전투는 막바지로 접어들었다.
승려가 마나를 돌려 양손에 빛나는 주먹을 만들어 공격하려 할 때였다.
퓨슉, 퓨슉, 퓨슈슈슈슉-
지네가 갑자기 몸을 들어 올려 가지고 있는 모든 다리를 승려에게 쏘아 냈고 승려는 뜻밖의 공격에 당황해 몸이 굳었다.
“민, 저 사람을 구해주고 여기 정보를 좀 들어보죠?”
유리엘이 말과 함께 손가락을 튕기자 승려의 주위로 반투명한 막이 생겼다.
지네의 다리는 반투명 막에 튕겨 나가 주위의 나무와 돌에 꽂혔다. 다리가 녹아드는 것과 동시에 나무와 돌이 녹는 것으로 보아 강한 독성이나 산성을 띠고 있는 것 같았다.
승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지네의 추가 공격에 대비했다.
그때 강민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140센티미터 정도의 바스타드 소드를 빼 들고 일격에 지네 괴물의 몸을 갈라 버렸다.
“허억! 저 괴물을 한 번에! 껍질의 강도로 봐선 저렇게 잘릴 괴물이 아니었는데…….”
승려는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뭐 저 정도야 별거 아니죠. 아니, 민의 실력은 저 정도로 가늠하기엔 너무 약소하죠, 호호.”
갑자기 옆에서 나타난 유리엘에 승려는 더더욱 놀라며 엉거주춤했다.
‘내 실력으로도 인기척조차 느끼지 못하다니 이 둘은 누구지?’
“괜찮소?”
지네 괴물을 베었는데 체액조차 묻지 않은 깨끗한 검을 허리춤으로 되돌리며 민이 승려에게 물었다.
“괘, 괜찮소. 하마터면 죽을 뻔했구려. 정말 고맙소, 정말. 이 정도 파동이면 혼자서 충분하리라 보고 혼자 내려왔는데 큰 낭패를 볼 뻔했구만. 그런데 당신들은 누구요? 옷차림을 보니 무림맹 쪽은 아닌 것 같은데? 아니면 올림포스요? 외모를 보면 중원이나 우리 쪽인 것 같기도 한데……. 당신들 정도의 실력자가 아무 통보도 없이 들어온 것을 보니 유니온 소속은 아닌 것 같소만?”
“올림포스? 유니온?”
유리엘이 갸웃거렸다. 그때 강민이 뭔가 흠칫 놀란 얼굴로 유리엘에게 말했다.
“유리엘, 통역 마법을 거두고 저 사람 말을 들어봐.”
“아직은 말을 배우지 못해서 통역 마법 없이는 힘들 텐데요?”
“내 말대로 해봐, 유리엘.”
유리엘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손가락을 튕겨 통역 마법을 캔슬했다.
“내 말이 안 들리오? 어디 소속인 것이오?”
“아니, 저 말은?”
“그래, 한국어다! 우리가 드디어 찾아온 거야. 하하하.”
한국어는 강민의 고향 언어로, 예전부터 강민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던 유리엘이 강민을 졸라서 배운 후 한동안 사용했었기에 유리엘도 잘 알고 있었다.
“아, 여기가 고향이라 마나가 익숙하게 느껴졌던 건가? 그래서 그토록 심한 마나 반발에도 신체 재구성 시간이 평소의 절반 정도밖에 들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겠네.”
“아, 그런가요? 그럼 저는 왜…… 아, 그동안 민과 영혼이 교류하며 제 영혼에도 이곳의 마나 향기가 남았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럴지도 모르지, 아니, 아마 그게 맞겠지. 아니면 설명할 방도가 없으니 말이야, 하하하. 어차피 보낸 시간이 시간인지라 아는 사람 하나 없을 테지만 그래도 고향에 돌아왔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네.”
강민은 웜홀을 통해 이 차원을 벗어난 지 수만 년이 지났기에 혹시 고향 차원에 돌아온다 할지라도 아는 사람은 고사하고, 문명 자체가 없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한국어를 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아직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였으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저 사람에게 지금 연도를 물어보지 그래요?”
“그럴까? 차원 간의 시간 흐름이라는 게 차이가 크게 나는 것이니 어쩌면 몇백 년밖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강민은 오랜만에 내뱉는 한국어로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 혹시 지금이 몇 년도입니까?”
자신의 물음에 대한 대답 없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한참을 둘이서 이야기하는 모습에 승려는 일단 몸을 추스르고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강민의 물음에, 그리고 그 내용에 약간 당황했다.
“지금은 당연히 2015년도지요. 어디 외진 곳에서 수련을 하셨나 보오.”
“2015년?! 서기 2015년 말입니까?!”
강민은 경악한 표정으로 다시금 승려에게 따지듯이 물어봤다.
“그, 그렇소. 서기 2015년이라오…….”
“2015년이라니……. 그럼 여기로 와서 신체 재구성 한 시간이 10년이니 내가 웜홀에 빠진 후 귀환할 때까지 단 1년도 지나지 않았다는 것인가!”
강민의 외침에 유리엘도 안색이 변하며 충격을 받았다.
“아무리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 해도 우리가 보낸 시간이 수만 년이 넘는데 단 1년도 지나지 않았다니……. 정말 충격적이네요……. 아, 그럼 민의 가족도 아직 살아 있겠네요?”
유리엘이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지금 강민은 가족을 생각하고 있었다.
악룡 카이우스에게 잡혀 수천 년의 실험을 당하는 와중에도, 수만 년의 수련을 받는 와중에도.
강민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고 지나도 결코 잊는 일이 없었다.
망각의 축복에서 해방된 저주를 받은 것이다. 혹자는 망각할 수 없다는 것은 축복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은 분명 저주였다.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나도 그때의 고통을 그대로 느끼고, 그때의 절망을 그대로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강민도 유리엘이 없었다면 스스로를 봉인하여 허무의 공간에 던졌을지도 모른다.
그 스스로는 죽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래된 기억이었다면 수많은 기억 아래 가라앉아 있었겠지만, 의식 아래에 묻어놓았던 기억은 단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때의 감각이, 심지어 웜홀에 들어가기 직전의 그 당혹감마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