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김사범, 그리고 폭탄이 떨어진 그곳)(1)
이제 모든 수수께끼가 풀렸다.
서울에 돌아온 당일, 여독도 안 풀린 우리가 왜 밖에서 밥을 먹어야 했는지.
김하별은 왜 그 와중에 조용했는지.
김태연의 그 어색한 웃음이 의미하는 게 뭐였는지.
‘그러니까, 일주일 만에 내 아이와 조카가 생긴 거네?’
일단 김태연이 아버지를 잘 설득할 수 있다면 말이지.
“아버님, 아니 장인어른.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처음부터 가볍게 만난 게 아니라…….”
“조용히.”
내가 지금 아버지의 입장이 아니라 완벽히 이해할 순 없지만……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기분이시겠지.
하지만 하별이는 이미 성인이고,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질 수 있는 나이다.
뭐, 둘이 가볍게 만난 것도 아니고. 거기다가 김태연이면…… 하별이를 불행하게 만들진 않을 거다.
“아버지, 일단 진정하시고. 여기, 물이요.”
“크음…….”
“하별이도 다 컸으니까 본인이 책임질 일과 아닌 일을 구별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제 생각엔…….”
“조용히.”
“넵.”
틀렸다.
저렇게 깊은 생각에 잠기신 아버지는 스스로 결정을 내리실 때까지 누구의 말도 듣지 않으신다.
“그나저나…… 아이는…… 아들이니? 아니면…….”
“저번…… 하별이…… 각도법…… 봤어요.”
“……어머! 정말?”
그 와중에 어머니는 수리에게 바싹 붙어 뭔가를 속삭이고 계셨다.
‘그래도 엄마 딸인데…… 김하별 서운하겠네.’
“……진짜? 딸? 어머!”
‘딸이라고?’
“딸이라고?”
누군가 뒤통수를 쾅! 하고 친 느낌.
“그러니까, 딸이라는 거야?”
“자기! 아직 확실한 건 아니야. 그리고 좀 조용히…… 제발!”
“딸? 딸이라니. 딸?”
그러니까, 수리를 닮아 작은 얼굴에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막…… 핑크색 옷을 입는 그런 생명체가 자라고 있다는 거지?
흥분과 기쁨의 순간도 잠시, 대각선 방향에 앉아있는 김태연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오자 갑자기 분노가 차올랐다.
“후우…… 어쩌겠어. 그래, 몇 주…….”
“아버지. 저 녀석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응?”
“이런 일에 아버지 손을 더럽힐 순 없죠. 제가 친구기도 하고, 하별이 오빠기도 하니까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아니, 사범아.”
“죽이진 않을게요. 그래도 제 조카, 든든한 바람막이는 있어야죠.”
“오빠!”
‘허. 지금 뭘 잘했다고 남자 편을 들어?’
이래서 딸자식 키워 놔 봤자…….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지. 세상 모든 아버지들의 딸을 노리는 저 시꺼먼 놈들이 문제야.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눈앞에서 없애 버리는 거고.
“우리 이야기 좀 할까, 제부?”
* * *
“괜찮냐?”
“괜찮다.”
대답을 하려 입을 여는 순간 왼쪽 구레나룻 부분이 사르르 아파오기 시작했다.
“일부러 그런 거야. 분위기가 그래서.”
“표정은 아니던데. 완전 빡쳤더만.”
아오…….
“하별이 걔는 임산부라는 애가 무슨 힘이…….”
“더 안 맞은 걸 다행으로 알아라.”
다 큰 동생에게 머리채가 잡혀 본 사람이 흔하진 않을 거다.
심지어 구레나룻을.
“계획적인 거냐? 큰 그림?”
“아니, 비계획, 아니, 반쯤 계획.”
“왜 갑자기? 어차피 시간이 문제였지 결혼은 했을 텐데.”
내 물음에 슬쩍 웃으며 대답하는 김태연.
“나, 이번에 미국 갈 거다.”
“뭐?”
“포스팅 신청할 거라고. 구단하고 이야기도 끝났고.”
“아, 벌써 7시즌이 지났나?”
“그렇지. 여긴 너무 작아.”
김태연에게 한국 프로야구가 작은 건 맞다.
프로에서 보낸 7시즌 중 200안타를 세 번 기록했고, 그중 한 시즌은 3할 9푼 2리라는 고타율을 기록했으니까.
그러면서도 매 시즌 10~15개 홈런과 30~40개 정도의 도루도 기록했었고.
“야, 근데 너. 그 정도 하고 와도 메이저에선 똑딱이 역할밖엔 못해.”
“나도 알지.”
“그래도 온다고? 여기서 짱 먹고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텐데. FA 되면 최대연봉도 꿈은 아닐 거고.”
“꿈이잖냐. 나도 너희들처럼 세계 최고 리그 소속이란 타이틀을 달고 뛰고 싶거든.”
꿈이라. 막상 오면 그런 소리 못 할 텐데. 자존심도 많이 버려야 할 테고.
“오면 힘들 거다.”
“리슨 케어풀리 자식아. 내가 그 정도를 생각 못 했을 거 같냐? 그래도 꿈이라고 할 정도인데?”
“뭐…….”
갑자기 김태연의 예전 모습이 떠올랐다.
2군을 전전하던 나와 다르게 데뷔 첫해부터 -지금처럼- 1군에 자리 잡은 녀석은 내가 돌아오기 전까지 그 자리를 지켜내고 있었다.
‘연봉도 내 20배쯤은 됐었고.’
그땐 이 녀석이 있는 자리가 내 꿈이었는데.
“마침 잘됐어. 하별이가 말하고 나서 담배도 끊었고, 곧 애도 생길 거고. 이 기회에 제대로 해봐야지. 야구.”
“담배?”
여기선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만…….
“조금씩 폈어. 그거 없으면 대화가 안 통하는 선배들이 있거든. 아무튼, 이젠 안 펴.”
“잘했네. 미국 가면 괴로워서 어차피 다시 물 테니까 지금이라도 끊어 둬라.”
“미친……. 악담을 해라. 야, 근데 너 헤븐에서 분기마다 보내는 보고서, 읽고는 있냐?”
보고서? 아, 그거.
“아니. 알아서 하겠지.”
“하여튼 귀찮은 건……. 그거 때문에 말 좀 전해 달라더라. 잘 진행되고 있다고.”
“그건 알지.”
개발이 잘 진행되는지 아닌지는 내가 그 사람들보다 더 잘 알 거다.
‘상태창.’
[이름 : 4번 타자
칭Δ : 힘▣ ▣▣9인
직업 : 전사
스♡
힘 : 999+(현재 적용 : 999)
민× : 10
지능 : ℥℆
%구 : 13
스킬
Δ안(펼치기)
↭↭↭↭99번^ 스▣(펼치기)
기분 나× 선생님(펼치Γ)
×킬 묶음(펼치기)]
보자, 저번보다 늘긴 늘었네.
아주 잘 진행되고 있어.
“근데 너, 도대체 얼마를 투자한 거야? 아주 신신당부를 하던데? 꼭 조심스럽게, 슬쩍 물어봐 달라고.”
“적당히 많이.”
“그래서 얼만데.”
“내 연봉에서 반 정도?”
“……200억?”
“맞을걸?”
“미친놈. 넌 진짜 미친놈이야.”
미친놈이지.
이대로 가다 보면 5년 후쯤 100배로 벌 수 있는데 이 정도밖에 투자를 안 했으니까.
* * *
본격적인 한국생활이 시작됐다.
수리는 괜찮다고 했지만, 그래도 수리만 두고 몸을 만들겠다며 외국으로 떠날 수는 없으니까.
이미 몸 상태는 더 이상 손댈 곳이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틀이 잡혀 있으니 이번 오프시즌에는 현 상태를 유지하는 데에만 힘을 쏟을 거다.
“안녕하세요, 붐.”
“안녕하세요, 페임.”
물론, 그 와중에 받을 상은 다 받았다.
“역시, 많이 받아 본 사람은 다른데요? 여유가 넘쳐요.”
“이제 슬슬 5개보다 10개가 더 가까워지는 지점인데, 당연하죠.”
“아하하, 맞습니다. 아, 주변엔 가족?”
“네. 맞습니다. 다들 닮았죠?”
“음…… 제 눈엔 똑같아 보이네요. 아, 이건 인종차별적인 의미가 아니라…… 알죠?”
“그럼요. 페임. 이제 말해 주세요. 아까부터 부모님이 너무 떨고 계셔서 멀미가 날 것 같네요.”
정말이다.
나와 수리의 양옆에 앉아 계시는 부모님은 문자 그대로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고 계셨다.
인터뷰 자체가 상을 받아야 할 수 있는 거라고 말해도, 여전히 이 순간에는 긴장되시나보다.
“좋아요. 2026시즌 MVP는…… 붐, 당신입니다.”
“고마워요, 페임.”
“별말씀을. 소감 한마디?”
이미 몇 번이나 합을 맞춰 본 사이답게 적절한 타이밍에 내가 말할 시간을 준 페임.
“일단 이번 시즌에도 제가 제법 잘했던 거 같아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앞으로도 쭉 이런 모습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시즌이 끝나고 나서 정말 큰 선물을 받았는데, 이런 놀라운 선물을 준 아내, 수리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네요.
마지막으로, 제가 이런 활약을 할 수 있게 튼튼하게 낳아 주신 부모님께 이 영광을 바치겠습니다.”
평소보다 조금 긴 소감이었다.
마지막 말은…… 인터뷰가 영어로 진행되지 않았다면 할 수 없었을 것 같다. 괜히 좀 부끄럽잖아.
“아주 가족적인 ‘붐’의 모습이었습니다.”
페임의 마지막 멘트가 끝나고, 인터뷰 연결을 위해 설치한 방송장비들이 거의 다 정리됐을 무렵.
갑자기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갑자기 왜 그래? 뒤늦게 기뻐?”
내 옆에 있던 수리가 이상하다는 듯 물어보길래, 한참을 웃다 대답했다.
“가족적인 폭탄이래잖아. 웃기지 않아?”
멀뚱히 나만 바라보고 있는 수리.
아무래도, 나만 웃겼나 보다.
* * *
시간이 빠르게 흐르고, 수리와 하별이의 배가 슬쩍 자기주장을 시작할 때쯤, 김태연의 미국 진출 기자회견이 열렸다.
[저는, 정든 한국프로야구를 뒤로하고 메이저리그에 도전하겠습니다.]
“처음부터 확 치고 나오네?”
“요즘엔 저런 게 대세야. 오빠는 잘 모르겠지만.”
“난 한국에서 기자회견을 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냥 좀 보자. 그리고 지금 동영상 촬영 중이니까 조용히 좀 하고!”
[아마 지금 이 방송을 보고 계신 분들이나, 여기 계신 기자분들이 궁금해하실 텐데…… 미리 답하자면 일본이나 다른 나라는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저러면 몸값 낮아질 텐데. 그래도 일본 쪽이 찔러주고 해야 판돈이 오르지.”
“우리도 알거든? 에이전트하고 상의하고 결정한 거야.”
“그 에이전트가 내 에이전트야. 이 양반은 무슨 생각이지?”
국내 에이전시와 해외의 에이전시 중에서 고민하고 있던 김태연에게 나는 짐을 소개해 줬고, 마침 나를 만나기 위해 한국으로 들어와 있던 짐과 악마의 피를 나눈 녀석은 순식간에 짐의 고객이 됐다.
[제 목표는 오직 하나, 메이저리그입니다. 하지만 제 가치에 비해 낮은 금액의 제안이 들어온다면…… 차라리 남는 게 낫겠죠. 물론,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흠…… 왠지 좀 끼어드는 게 창피해서 그냥 보고만 있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궁금해서 못 참겠다.
[나 : 무슨 생각이에요? 저러면 값만 떨어지는 거 아니에요?]
기자회견 때문에 바쁜지, 한참을 기다리고 나서야 온 답장.
[짐 : 이미 거의 정해졌어요. 이건 말 그대로 TV 쇼죠. 아무래도 이슈가 있는 편이 영입하는 구단 입장에서도 좋을 테니까.]
아하.
그러니까 짜고 치는 고스톱이란 말이지?
[나 : 나한테만 말해 줘요, 짐. 어디에요?]
[짐 : 노코멘트. 직업윤리상 유출할 수 없는 내용이라.]
[나 : 리그만이라도?]
“김하별. 너네 남편 어디로 간다고 이야기 들은 거 없냐?”
“없는데? 알아서 하겠지. 난 그냥 살기 좋은 데면 된다고 했어. 나 때문에 어디 가는 거 싫어서.”
아주 이럴 때만 배려심이 폭발하네.
‘지 남자친구 생각하는 거 반만이라도 나한테 했으면…… 아, 했었지. 그래…… 음…….’
내 동생은 배려왕이다.
내가 아주 잘 알지.
위이잉-
때마침 울리는 진동음.
[짐 : AL.]
이거 잘하면…… 시즌 중에 합법적으로 가족끼리 싸울 수도 있겠는데?
* * *
“정말 여기 있을 거야? 그래도 집에 있는 게 좋지 않겠어?”
“여기가 좋아. 하별이하고 어머님하고 수다 떠는 것도 재미있고.”
“그래도…… 아니면 텍사스에 가 있어도 되는데.”
“왜 자꾸 미국으로 보내려고 해?”
“아니 나는…… 그냥 불편할까 봐.”
어디서 봤는데, 아무리 편해도 시댁은 시댁이고 친정은 친정이라더라.
“난 여기가 훨씬 편해. 아빠도 내가 편한 대로 하는 게 좋다고 했고. 그나저나, 슬슬 들어가 봐야 하는 거 아냐? 탑승시간까지 한 시간도 안 남았는데?”
“아직 괜찮아. 조금만 더 있자.”
“수속 밟고 하려면 빡빡하잖아.”
“VIP라운지로 들어가면 얼마 안 걸려. 조금만 더 있자.”
그렇게 우기고 우겨 얻은 시간도 끝나가고, 나는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이후 처음으로 운동을 하기 싫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왔냐?”
“어디서 루키 주제에 하늘 같은 선배에게 말을 놔? 존댓말 안 하냐?”
“지랄은…….”
“긴장되냐?”
“안 돼.”
“일단 훈련 마치고 캠프에 합류하면…… 제이슨 폴리라는 놈이 먼저 다가올 거야.”
“아. 기사에서 봤어. 너랑 친하다며?”
“친하기는 개뿔. 절대 친해지지 마라. 친해지면 너만 힘들어.”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에 새로 합류할 메이저리그 루키, 태연 킴과 함께 미국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