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김사범, 2026시즌(이삭의 수상한 움직임에 대하여)(3)
이삭의 집.
“내 자랑스런 아들, 이삭은 히브리어로 ‘웃음’ 이란 뜻이란다. 붐. 너는 내게 웃음을 되찾아 준 거야.”
“마마, 이삭 혼자서도 잘 했을 거예요. 그저, 전…… 도와준 거죠.”
이삭에겐 계기가 필요했을 뿐이다. 그리고 계기가 주어지자 녀석은 훌륭하게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해냈고.
“오, 내 앞에선 겸손할 필요가 없어. 누가 뭐래도 넌 이삭과 안드레스의 은인이란다.”
“하하, 음. 좋아요. 마마가 그게 편하시다면.”
이제 난 마마의 공식 인증을 받은 ‘이삭의 은인’이다.
‘이제, 이삭을 가지고 놀 시간인가?’
“이삭! 목이 좀 마른데?”
거실에서 주방을 향해 외치자, 이삭의 상냥한 대답이 들려왔다.
“네가 갖다 먹어! 지금 바쁜 거 안 보여?”
“요리는 수리가 하는데 네가 왜 바빠? 나 목마르다고!”
“너!”
쿵쿵대는 소리와 함께 등장한 이삭이 내 손을 잡고 있는 마마를 보며 멈칫거렸다.
“이삭, 가져다주렴. 네 은인이잖니?”
“마마, 그건…….”
“어서.”
“네…….”
역시.
내가 이러려고 이삭을 도왔지.
권력은 달콤하여 마치 꿀과 같다.
“어때, 이 정도면 제법 눈치가 좋지?”
즐거워하는 내 모습을 본 마마의 말에, 난 그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울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수리, 많이 늘었구나! 이젠 제법 맛을 낼 줄 알아.”
“고마워요, 마마.”
이삭이 준비하고, 수리가 만들어 낸 ‘칠레 데 치차론’은 거의 마마의 그것과 비슷한 맛이었다.
그리고 그 맛을 본 마마는 저녁을 먹는 내내, 그리고 저녁을 먹고 난 지금까지 수리를 칭찬하고 있었고.
“야, 나가서 바람이나 쐬자.”
그리고 종놈은 은인에게 감히 독대를 청했다.
* * *
저녁 시간, 주택가의 한산한 거리.
미국의 내수경제가 활성화되면서 덩달아 사정이 나아진 디트로이트의 거리는 예전과 달리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붐.”
“그만. 은인의 이름으로, 이런 분위기의 이런 거리에서 그딴 말투로 말하는 걸 금지한다.”
아, 소름 돋아.
남자 놈의 물기 어린 목소리라니.
내가 전생에 무슨 잘못을 했길래…….
“고맙다. 정말.”
“아 씨…….”
내 반응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자기 할 말을 늘어놓는 이삭.
덕분에 내 손발은 재활이 힘들 정도로 오그라들고 있었다.
“……아무튼,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고마워. 네 행동은 나뿐만 아니라 안드레도 살린, 용기 있는…….”
그나마 다행인 건, 내 도둑질과 수리의 첩보작전이 대의를 위한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다는 걸 이삭이 이해해 줬다는 거다.
“그러니까, 다시 한 번…….”
“닥쳐. 한 번만 더 고맙다고 하면 반으로 접어 버릴 테니까.”
“크크큭, 그래. 알겠다.”
그래도, 좀 뿌듯하긴 하네.
내 작은 움직임이…… 흐흐.
* * *
보스턴, 디트로이트의 원정 숙소.
[……캘리포니아 리그, 플로리다주 리그, 이스턴 리그, 텍사스 리그 같은 경우 경기력 향상 약물 복용자가 작년에 비해 300퍼센트 가까이 늘었으며, 이에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내 작은 움직임이…… 큰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이번 검사에서 쏟아져 나온 복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새로 나온 약물 은폐제, 통칭 ‘EZ’를 같이 복용하고 있는 선수가 대부분이었으며, 국제 반도핑기구는 해당 샘플을 수거하여 분석에 들어갔습니다.]
어, 이건 나도 몰랐던 사실이다.
예전엔 이 무렵부터 슬슬 1군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으니, 바다 건너 이야기엔 신경도 쓰지 않았었고.
[‘EZ’는 스테로이드 계열 PED의 반감기를 획기적으로 줄여 주는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이 약물을 제조한 디자이너를…….]
뭐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마이너리그에서 300명이 넘는 선수들이 불시검사에 걸렸다는 사실이다.
이미 은폐를 위한 약물까지 드러난 상황이니, 앞으로 얼마나 많은 선수들이 걸릴지 모르는 데다가…….
‘아마 메이저리그에도 퍼져 있겠지.’
결국, 여긴 어떤 방식으로든 잘하는 놈이 올라오는 구조니까.
[각 구단은 자신들이 키워 오던 유망주들이…….]
‘잠깐, 이거…… 잘하면?’
나는 재빨리 핸드폰을 들어 춤신춤왕 대머리 정보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ok. 알아낼 수 있으면 확인해서 알려 줄게요.]
곧 사무국에서 징계를 내릴 거고, 그럼 간단하게 알 수 있겠지만…… 그냥 괜히 궁금해졌다.
내 예상이 맞는지도 궁금했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 우리를 태운 버스가 펜웨이 파크에 다다를 무렵, 마침내 핸드폰이 울렸다.
[NL - 142, AL - 161.
NYY - 9
BOS - 14
.
.
.
LAD - 11
TB - 23
.
.
.]
누군가 급하게 보냈는지, 다소 두서없이 정리된 메시지는 정말 충격적이었다.
‘탬파베이가…… 23명? 그만큼 관리가 소홀한 팀이 아닐 텐데. 이건 누군가 조직적으로 팔지 않는 이상…….’
잘은 몰라도, 분명 어떤 세력이 탬파베이 팜을 아작 내려고 -들키지 않았다면 아주 훌륭하게 성장했겠지만- 작정했나 보다.
그리고.
[DET - 3]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살아남았다.
[안녕하십니까. 오늘 경기, 보스턴 레드삭스와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와 보스턴 레드삭스의 맞대결을 중계해 드리겠습니다. 오늘 경기, 어떻게 예상하시나요?]
[지금 전체적으로 메이저리그의 분위기가 뒤숭숭합니다. 레드삭스 선발진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지금 현재 다윈슨 에르난데스, 제이 그롬, 빌리 그린 선수만 로스터에 남아 있는 상황에서 사건이 터졌단 말이죠?]
[아, 최근 사무국에서 발표한 마이너리그 약물 스캔들 말씀이시죠?]
[네. 맞습니다. 크리스 셰일 선수가 팔꿈치 부상으로 60일 DL에 올라가있는 지금, 레드삭스는 메이저리그 레디 상태인 유망주들을 돌려 가며 버티고 있었는데, 이제 이게 불가능하게 된 거죠. 최근 올라와 좋은 활약을 보여 주던 선수들이 모두 이 스캔들에 포함되어 있거든요.]
[아……. 그래서 다윈슨 에르난데스 선수가 로테이션을 하루 앞당겨 나온 거군요.]
[그렇죠. 레드삭스 입장에서도 지구 선두 다툼에서 밀리지 않으려면 한 경기도 허투루 버릴 수 없을 겁니다.]
‘오늘은 케이시, 내일은 클루버, 그다음엔 헤수스가 나가겠네.’
한 시즌 내내 로테이션을 지키는 선발투수에게 등판 간격은 일종의 루틴과 같다.
그런 로테이션을 자꾸 하루, 이틀씩 밀고 당긴다는 건 팀 입장에서도 선수 입장에서도 썩 좋은 선택은 아니다.
“케이시, 오늘 퍼펙트 할 거야?”
“뭔 헛소리야?”
집중하는 케이시 옆에서 오늘도 깝죽거리고 있는 폴리.
어째 페이스가 떠난 뒤에 더 케이시에게 달라붙는 것 같다.
“네가 퍼펙트 한다고 하면 버스에 가서 좀 자려고. 요즘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피로가 잘 안 풀린다니까?”
만약 내가 케이시였으면, 지금 폴리를 반쯤 죽여 놓고 지옥 갈 거다.
“오늘 공 던지는 선발투수 앞에서 뭔 헛소리야?”
“붐, 근데 맞잖아? 케이시만 잘 던져주면 너도 홈런 하나 치고 쉬면 되잖아.”
“멍청아, 그게 쉽냐?”
“왜? 쉽게 치던데?”
“그건 내가 야구역사에서 단 한 번도 없었던 타자라 그런 거고.”
왜, 맞잖아.
누가 상태창 달고 야구를 했겠어?
“요즘 점점 재수 없지 않아?”
일어나 글러브를 챙기고 있는 케이시를 대신해서, 그 옆자리의 이삭에게 묻는 폴리.
“그렇…… 아니, 붐 정도의 선수면 저런 말을 할 수 있지. 우린 더 분발해야해.”
“야, 이삭. 너…….”
약빨 좋네.
아니, 약빨이란 단어는 쓰면 안 되지.
음…… 은혜빨 좋네?
[일로이 선수의 타구가 좌중간을 완전히 갈라 놨습니다! 그 사이에 홈을 향해 달려 나가고 있는 김사범 선수!]
[분명 간단히 보면 안 될 타자라고 말씀드렸는데요, 일로이 히메네스 선수도 분명히 장타력이 있는 선수입니다!]
[공은 홈으로~ 세잎입니다.]
[아주 중요한 순간에 득점을 올린 김사범 선수입니다. 이제 9회 초, 스코어는 6:3입니다.]
시즌 개막 후 56번째 경기인 지금. 갑자기 익숙한 느낌이 찾아왔다.
2022시즌, 정말 상대할 팀이 없었던 바로 그때, 그 느낌.
‘슬슬 맞아 들어가는 건가?’
분명 지금의 팀은 그때의 팀에 비하면 네임밸류가 그다지 대단한 팀이 아니지만…….
‘대신 어리고, 또 어리지.’
또다시, 우린 완성되어 가고 있다.
* * *
한국.
중계 스튜디오.
“김사범 선수가 이끄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즈가 메이저리그 30개 구단 중 가장 먼저 포스트시즌 진출을 확정지었습니다. 어떻게 보시나요?”
질문을 받은 해설위원이 손에 들고 있던 자료를 재빨리 살펴보며 대답했다.
“올 시즌이 시작하기 전, 각종 매체의 전문가들은 디트로이트 타이거즈가 예년처럼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할 거라고 예상했었습니다. 바로 베테랑 선수들을 과감하게 트레이드를 했기 때문인데요, 현재 로스터상에서 베테랑이라 불릴 만한 선수는 투수인 코리 클루버, 단 한 명뿐이죠.”
“생각해 보니 그러네요?”
“하지만 이런 예상이 모두 섣부른 생각이었습니다. 베테랑들을 보낸 대가로 받은 선수들이 아주 쏠쏠한 활약을 보여 주고 있는데요, 특히 화이트삭스에서 온 일로이 히메네즈, 아, 이 선수는 호세 라미레즈 선수의 삼각 트레이드로 합류한 선수입니다.”
해설위원의 말에 맞춰 대형화면에 나타난 일로이 히메네즈의 기록.
“아, 감사합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162경기 모두 출장해서 3할 4푼의 타율, 51개의 홈런, 21개의 도루와 130타점을 기록하면서 단숨에 리그 최고 수준의 좌익수가 됐습니다.”
“네, 그렇군요.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죠?”
“샌디에이고에서 팀의 세 번째 포수로 뛰던 프란시스코 메히아 선수를 데려와 주전 포수로 키워 낸 것도 중요한 포인트였습니다. 아, 마침 나오는데…… 151경기 3할 4푼, 17개의 홈런과 4할 2푼에 달하는 출루율을 보여 줬습니다.”
“과거 디트로이트의 주전 포수였던 페이스 달턴 선수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성적인데요?”
“아하하, 대신 수비적인 면에서는 조금 부족하다는 평가입니다.”
그 외에도 시즌 중반부터 페이스를 올리기 시작한 이삭 페레데스, 여전히 장타력을 뽐내고 있는 크리스틴 스튜어트와 메이저리그 최정상급 마무리가 된 제이슨 폴리에 대한 리뷰가 이어졌다.
“자, 그럼 마지막으로 김사범 선수입니다.”
“여전히 위력적이고, 여전히 대단합니다. 요즘 인터넷에선 김사범 선수를 ‘팔못쓰’, ‘돈발덩’이라고 부른다고 해요.”
“팔못쓰는 알 거 같은데, 돈발덩는 뭔가요?”
“하하, 각각 ‘80홈런도 못치는 쓰레기’, ‘돈 많이 벌더니 발전 없는 덩어리’의 약자입니다. 당연히 우스갯소리겠죠? 이런 별명이 생길 만큼 꾸준한 활약을 보여 주고 있는 김사범 선수입니다.”
“일단 이번 시즌 기록을 보실까요?”
아나운서의 멘트에 맞춰 화려한 이펙트와 함께 나온 김사범의 기록.
“올 시즌 기록이 나왔네요, 162경기, 두 시즌 만에 전 경기 출장을 했고…… 3할 8푼 9리의 타율과 6할 1푼의 출루율 그리고…… 9할 9푼 9리의 장타율을 기록하면서 73홈런 82도루, 182타점을 기록했습니다. 타점은 지난 2024시즌에 이은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습니다.”
“장타율이 9할 9푼 9리, 김사범 선수가 쳐낸 거의 모든 안타가 장타라는 소리네요?”
다소 의도적인 아나운서의 멘트에 해설위원이 재빨리 답했다.
“아하하, 장타율은 10할, 그러니까 1이 최대수가 아닙니다. 각각의 기록에 따라 가중치를 둔 기록이죠. 하지만 올 시즌 김사범 선수의 플레이를 보면 이 아나운서의 말씀이 틀린 말이라고는 할 수 없겠는데요?”
그 후에도 다소 의도적인 편집으로 각 팀의 주요 선수들이 김사범을 칭찬하고, 경외하는 인터뷰 영상들이 이어지면서, 스튜디오의 분위기는 점점 뜨거워져 갔다.
“자, 그럼 마지막으로. 조금 이른 9월, 올 시즌 월드시리즈 향방을 예상해 보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크흠, 내셔널리그는 워싱턴 내셔널스, LA 다저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큰 이변 없이 각 지구 우승을 차지할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전력으로 보면…… 아마 월드시리즈는 워싱턴 혹은 다저스가 올라올 것 같네요.”
“네, 그럼 아메리칸 리그는……?”
“조금 많이 이른 예상이지만, 아마 뉴욕 양키스와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두 팀이 월드시리즈 진출을 놓고 다툴 가능성이 크죠. 아, 물론 이건 예상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