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김사범, 그리고 헤븐(1)
다단계, 혹은 그보다 더 심한 방향으로 변질된 코인이 아닌 건 다행이었다.
일단 가져온 종이 앞에는 사업계획서라는 글자가 인쇄되어 있었으니까.
“아니 진짜, 오해하지 말고 들어 봐. 여기 투자도 많이 안 받는 곳이야. 지분 나누면 나중에 위험할 수도 있다던가? 아무튼, 읽어 봐. 읽어 보고 결정하자.”
“무슨 개소리를…… 됐어. 밥이나 먹자.”
아주 칼처럼 자르는 김병헌.
아주 바람직한 유부남의 모습이다.
“아 씨, 진짜 그런 거 아닌데. 아, 여기 회사, 너희들도 아는 데야.”
“어딘데?”
그래, 우리도 아는 회사일 수도 있지.
효x르와 메x가 모델인 거기도 일단은 합법적이고, 제품 좋기로 유명한 곳이니까.
하지만 별 기대도 없이 물어본 질문에 아주 핵폭탄급 대답이 돌아왔다.
“헤븐.”
“헤…… 뭐?”
헤븐? 내가 아는 거기?
“헤븐? 회사 이름도 참 후지다. 딱 봐도 너같이 순진한 놈 꼬셔서 한탕 해 먹으려는 수작이야. 야, 김사범. 너 안 말려도 되냐? 네 동생하고 얘하고 사귄다며?”
옆에서 뭐라 뭐라 떠드는 김병헌의 말을 무시하고, 김태연이 내민 사업계획서를 받아 읽기 시작했다.
‘맞네, 발렌 사가. 가제라고 써 있는데……. 그냥 이 이름으로 갔나 보네. 뇌파인식 VR을 통한 가상현실 구현…… 잠깐만, 지금이…….’
내가 게임을 하던 시점은 2030년, 돌아온 게…… 2019년이고, 지금이 2022년이니까…… 8년? 아니, 내가 남들보다 일 년 정도 늦게 시작했으니까 7년 남은 건가?
“넌 이걸 어떻게 알고 투자한 거냐?”
일단, 전후사정을 알아야 한다.
“나? 나는 직접 방문했지. 배팅 연습용 VR은 따로 개인에게는 안 팔더라고. 그래서 찾아갔는데?”
“찾아갔다…….”
“그 와중에 너희랑 같이 훈련하고, 그 기계도 헤븐 거잖아? 그것도 좋아 보여서 좀 친해진 직원한테 물어봤더니 이제 곧 생산 중단한다고 하더라고. 그리고 뭐, 이렇게 된 거지.”
“기계? 아, 그거? 그거 만든 회사가 여기야?”
자기가 지금까지 써먹던 기계가 어느 회사의 제품인지도 모르는 김병헌의 얼빠진 목소리를 무시한 채, 계속해서 김태연에게 물어봤다.
“물어보니까 이걸 개발하느라 안 판다?”
“아니, 안 팔진 않고, 그 기계, 개인마다 세팅 같은 거도 하고 그래야 한다던데? 어쩐지, 잘 안 맞더라니. 아무튼, 그래서 생산 중단되고 좀 더 간단한 걸 팔 거라고 하더라고.”
“흐음…….”
“근데 궁금하잖아? 너도 써 봐서 알지만, 훈련에 꽤 도움이 되는 기계인데, 팔면 잘 팔릴 텐데 안 판다는 게. 그래서 물어봤지. 그랬더니 그 세팅하는 인원들까지 긁어모아서 이걸 개발하고 있다고 해서, 더 캐물어 봤는데…….”
‘발렌 사가.’
내가 발렌 사가를 플레이할 당시에는 이미 헤븐이 세계적인 대기업의 반열에 오를락 말락 하던 상태였기 때문에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는 잘 몰랐다.
“아무튼, 근데 이야기를 들어 보니까 회사에 돈이 없대. 원래 개발도 차근차근 해야 하는데 그 필요한 절차를 축소시키거나, 없애면서 거의 우격다짐으로 진행하고 있나 봐. 성공 확률도 적고.”
잠깐,
축소시키거나, 없애는 과정?
설마…….
“뭘 축소시킨 건데?”
“응? 나야 모르지. 거기까지 물어보지도 않았고. 아무튼, 그래서 거기 무슨 팀장 소개받아서 투자한 거야. 지금까지 모은 돈 합쳐서. 내가 볼 땐 이거, 성공가능성이…….”
성공할 거다.
음…… 나비효과? 이런 게 있어서 아닐 수도 있지만, 아마 성공하겠지.
성공하면…… 대박이겠네.
“……그래서 말한 거야. 어차피 한국에서 뛰는 사람들에겐 조금 부담스러운 금액이잖아? 근데 너희는 뭐, 돈도 많고. 이 정도야 감수할 수 있을 거 같아서.”
“됐다, 난 안 할란다. 와이프가 말하길, 안 쓰고 모으는 게 최고의 재테…….”
“그 팀장이란 사람 연락처 줘 봐.”
“어?”
“내가 직접 만나서 설명 듣고 판단하려고. 내가 볼 땐, 이거 가능성 있다.”
일단 만나서, 파고들어야 한다.
내 ‘상태’에 대한 힌트를 얻을 가능성도 있고……. 무엇보다 이건 돈이 되니까.
‘그동안 아깝게 놓친 것들이 몇 개야…….’
돌아오기 전, 나는 야구를 제외하고는 거의 아무것도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그러다 보니 사회 상황? 이런 건 전혀 관심이 없었고.
돌아오고 나서, 조금 여유가 생긴 뒤 취미가 된 웹서핑을 하면서 본, 정말 큰돈을 만질 수 있었던 기회들이 얼마나 아쉬웠는데.
‘돈에 연연하진 않지만, 떼돈을 벌 기회를 놓치는 건 바보지.’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 생략되었다는 몇몇 과정이 궁금해서다.
그 과정 중 내가 돌아온 이유, 혹은 원인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 그럼 나도 할래.”
여기 이 바보는 그냥 내가 한다고 해서 하는 거고.
* * *
다음 날.
“안녕하십니까,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에서 유격수로 뛰고 있는 김사범 입니다.”
아시안게임 개막까지 일주일, 경기까지 10일이 남은 시점에 드디어 한국 대표팀이 모두 모였다.
“다들 알다시피 이번 아시안게임을 위해 내가 인맥을 총 동원해서 아주 고급 브로커를 데려왔다. 박수.”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느낌.
돌아오고 나서 한 번도 뛰지 못해서 딱히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모국어로 대화하는 팀이라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뭔가 소속감이 생기는 기분이다.
‘이래서 예전 선배들이 그렇게 대표팀에 목을 맨 건가?’
그때는 살짝, 아주 살짝 이해가 안 됐던 그들의 사정을 슬쩍 엿본 느낌이다.
그렇게 꽤 열광적인 환영을 받고, 나도 다른 선수들의 자기소개에 열광적으로 반응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흘렀다.
“언제나 그렇듯 일본, 대만 외에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심지어 이번 아시안게임은 위험하다는 인식이 있어…….”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최근 메이저리그 진출을 선언한 대만의 왕쉬커는 아마 우리와의 경기를 쇼케이스 삼아 더 좋은…….”
“일본도 마찬가지, 작년 요미우리의 지명을 거부하고 드래프트 재수를 선언한 아야토 신이치도 최고 153km에 달하는 패스트볼과…….”
음.
잠이 온다.
예전부터 이런 데이터를 즐겨 사용하던 감독님이라 그런지, 꼼꼼하게도 준비하신 거 같다.
아니면 처음으로 대표팀 감독을 맡으시고 조금 긴장하셨던가.
“……이상이다. 이건 간단한 팀별 리뷰 자료니 모두 가져가서 읽어 볼 수 있도록. 오후부턴 간단히 호흡을 맞춘 뒤 바로 실전에 준하는 훈련을 시작할 테니 그렇게 알고 준비하도록. 그럼.”
마침내 감독님이 나가고, 그제야 편하게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선수들.
“야, 감독님은 어떻게 고등학교 때하고 달라지질 않으셨지?”
“그러게. 아주 똑같으셔.”
“고등학교 때도 저려셨냐?”
“어, 똑같아. 지금 저 모습하고.”
“그러니 그렇게 우승을…….”
오랫동안 앉아 있다 보니 굳어 버린 몸을 슬슬 풀어 주고 있자니 김태연이 말했다.
“야, 가자. 너희 아직 제대로 인사 안 했지? 뭐, 우리 위 선배들이 많이 없긴 한데, 그래도 이렇게 다 모인 자리에서 인사하러 돌아다니면 또 그게…… 알지?”
“아, 어어. 그래, 가자.”
리그 일정도 일정이고, 꽤 쉬운 아시안게임이 될 거라 예상했는지 신인급 선수들이 많이 포함된 대표팀이었지만 그래도 아예 선배들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선배들은 거의 다 어제 합류한 사람들이었고.
“안녕하세요, 김사범입니다.”
“이야, 메이저리거! 80-80! 알지, 내가 그거 하이라이트 보다가 잠을 못 자서 다음 날 경기를 못 뛰었다니까?”
“하하하, 감사합니다.”
“아무튼, 잘 부탁해! 나는 상관없지만 저기 저 녀석들 군 면제가 달린 일이니까.”
“예.”
뭐, 대충 그런 식이었다.
아무래도 내 커리어가 있다 보니 대놓고 삐딱선을 타며 태클을 거는 선배도 없었고.
‘야구장에선 야구 잘하는 놈이 최고니까.’
물론, 돌아오기 전에 날 사람 취급도 안 하던 한 선배, 아니, 놈이 이젠 역으로 내게 굽실거리는 걸 보는 게 좀 역겨운 광경이긴 했지만.
그리고 오후.
마침내 팀 훈련이 시작됐다.
“그래, 오랜만에 한국 사람하고 훈련하니까 어때?”
“아, 감독님. 좋네요. 확실히 의사소통도 그렇고 뭔가 편해요.”
“하하하, 이렇게 있으니 고등학교 때로 돌아간 것 같군. 안 그래?”
“그럼요. 안 그래도 태연이하고…….”
아시안게임이 원래 일정보다 3개월 정도 밀리면서, 야구협회는 계약기간이 끝난 김 감독을 잡는 게 아닌 새로운 감독을 선임하는 강수를 뒀다.
‘그럭저럭’ 강팀이었던 한공고를 맡아 주말리그에서 우승기를 수없이 들어 올린 이정협 감독을.
‘음…… 예전엔 좀 달랐던 거 같은데. 뭐, 나한텐 좋은 일이니까.’
협회의 과감한 결정에 반대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뭐…… 날 키워 낸 감독이라며 언플을 몇 번 날렸더니 조용해졌다.
짐이 말하길, 협회-라고 쓰고 구단주들이라고 읽는-가 나한테 호의적인 제스처를 보내는 거란다. 아시안게임은 별 의미 없지만, 나중에 프리미어나 WBC 같은 세계대회에 나와 주길 바라면서.
“그래, 일단 오늘은 2루수인 명신이와 호흡을 잘 맞춰 봐. 일부러 베테랑을 뽑았으니 조금만 맞춰 보면 될 거야.”
음.
뭐…… 이렇게 대우받는 게 이젠 익숙하면서, 즐겁다. 이런 걸 노린 거겠지. 그 사람들은.
그럼 뭐…….
받은 만큼은 돌려줘야지?
* * *
[간단하게 바뀐 아시안게임 야구 일정, 추운 날씨에 걱정하던 선수들 ‘반색’]
[8개국 토너먼트 형식. 단 3번만 이기면 아시안게임 ‘금메달’]
[대진 확정, 1라운드 - 중국, 2라운드(준결승) - (태국 vs 홍콩) 승자, 결승은 일본 유력.]
[김사범, 중국과의 인터뷰에서 화끈한 도발. ‘콜드조건이 5회 15점? 결승까지 15회만 소화하면 된다니 행복하다.’]
[중국 언론, 김사범의 발언에 격노.]
[중국 야구대표 양쉰쉰, ‘김사범은 한국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것 같다. 여기서는 쉽지 않을 것.’]
1라운드, 중국과의 경기 전.
“왜 그랬어?”
“그 자식들이 먼저 열 받게 했잖아.”
인터뷰에 불러놓고 무슨 중국 유명 축구선수를 아냐느니, 자기네 선수 중 랑팡팡인가 뭔가 하는 선수가 잘 던지는데 자신 있냐느니 이딴 질문만 퍼붇는데, 화가 안 나겠냐고.
“아무리 그래도…….”
“그리고 진심으로 말한 거야. 나 힘들다. 빨리 끝내고 빨리 들어가서 쉴 거야.”
팡선선인가 하는 놈, 공 보니까 별로 대단하지도 않더만.
“플레이 볼!”
따악!
“세잎!”
“베이스 온 볼스!”
퍼엉!
“스트라이크! 아웃!”
“그게 어떻게! 후…….”
안타-볼넷-삼진
1회부터 힘들겠네. 안타까워.
빨리 들어가서 쉬게 해 줘야지.
따아아악!
[김사범 선수의 타구가…… 넘어갔네요! 중계카메라가 따라가지도 못할 정도의 타구였습니다!]
[3번 박성호 선수가 존에서 공 두 개쯤 빠진 공에 삼진을 당한 뒤에 나온 홈런이라 더 시원한 기분인데요?]
[중국 선발투수 양쉰쉰, 아직 자기가 홈런을 맞은 줄도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멍하니 마운드에 서 있는 게 멘탈이 아예 흔들린 거 같은데요?]
그냥 존 아래로 커브 비슷한 게 오길래 후려쳤다.
생각보다 안 꺾여서 제대로 앞에서 맞았고, 당연히 홈런.
‘이런 타구 처음 겪어 보나? 왜 저렇게 벙 쪄 있는 거야?’
아무튼 뭐, 일단 3점.
갈 길이 머네. 15점까지.
[야구 대표팀, 중국 격파. 5회 초가 끝났을 때 스코어는 17:0.]
[중국 선발투수 양쉰쉰 ‘그는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았다. 어떤 공이 와도 다 쳐내서 나중에는 던질 공이 없었다.’]
[김사범, 3타수 3안타 3홈런 8타점. ‘양순순? 그 투수도 나름 잘 던졌다. 그냥, 조금 부족했을 뿐이다.’]
내일은 4강전, 그리고 모레 결승이니까…… 빠듯하겠네.
한국에 가서 헤븐도 찾아가야 하고, 그와 동시에 결혼식 관련한 것들도 알아봐야 하니까.
그냥 업체에 다 맡겨 버릴까 했는데 수리의 반대로 무산됐었지. 친한 친구하고 가족들만 부르는데 무슨 돈낭비냐고.
‘아니, 사실 그게 더 싸게 먹힐 텐데. 나 정도 되면 할인도 제법 될 거고.’
귀찮거나 그런 것보다는, 수리가 고생할까 봐 업체를 알아본 거라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결혼식은 내가 아니라 수리가 주인공이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야지.
올 겨울은 정말 바쁠 것 같다.
여기서 이렇게 공놀이 할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야구 대표팀, 2연속 콜드게임으로 결승 진출. 결승 상대는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