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김사범, 2022 시즌(평천하(平天下))(11)
뉴욕으로 향하는 디트로이트 전용기.
“2차전도 무난하게 끝났군요.”
“1차전만 잡으면 2차전이야 쉽다고 생각했으니까. 계획대로 되는걸 보니 다행이군.”
1차전이 끝난 뒤, 양 팀은 2차전 선발로 코리 클루버 - 엔서니 케이를 예고했었고, 모두가 예상했던 대로 경기는 디트로이트의 승리로 끝이 났다.
“그래도 4회 에드윈 디아즈의 등판은 조금 의외였습니다.”
“어차피 내일 하루는 이동일이니까 그런 결정을 내렸겠지. 상대 감독이 미키 아닌가.”
“그렇겠죠. 흠……. 그럼 이제 내일 경기가 문제군요.”
“큰 변화를 주진 않을 거야.”
“라테의 타순을 내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월드시리즈에서 조금…….”
“두 경기에서 3번 출루했으면 괜찮은 거 아닌가? 우리가 언제나 붐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게. 여유가 있는 한, 새로운 얼굴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그래도 기록이…….”
“쉿. 내가 그런 걸 신경 썼으면 지금 붐은 1번 타순에서 전 경기를 뛰었을 거야. 코리와 케이시는 지금까지 3번씩은 등판했을 거고.”
“알겠습니다.”
“원래 좋은 선수야. 이번 시즌에 그 능력을 보여 줬고. 멘탈 케어 중심으로 접근하게. 우리가 루키라 불렀던 다른 선수들처럼 접근하지 말고.”
“네.”
론과 코치들의 전용기의 뒤-바텐더가 없는 바-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 선수들이 있는 객실은 아주 고요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 * *
[포심 패스트볼입니다. 구속이 100마일이 찍혔군요.]
[스윙! 스트라잌! 제이콥 디그롬의 슬라이더가 춤을 춥니다!]
[2-2 피치, 디그롬의 선택은…… 예스! 체인지업! 그의 체인지업이 상대 타자를 무너트립니다!]
[몸쪽…… 투심 패스트볼! 타자가 꼼짝도 못하네요!]
‘신더가드가 왜 메츠의 에이스라 불리지 못하는지 알겠군.’
포심, 투심, 슬라이더, 커브, 체인지업. 5개의 구종을 원하는 곳에 -혹은 그 비슷하게- 던질 수 있는 선발투수.
심지어 구속도 뛰어난 데다 작년까지 5년 연속 200이닝 이상 던졌을 만큼 내구력이 훌륭하다.
‘이번 시즌도 중간에 타구에 맞지만 않았어도 무조건 넘었겠지.’
타구에 갈비뼈를 맞아 한 달간 DL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즌이 끝날 때 기록한 이닝은 175이닝. 방어율은 2.81로 부상 후유증을 걱정하는 기자들의 입을 아주 조용하게 만들었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
건너 자리에서 나처럼 태블릿으로 계속해서 뭔가를 하던 이삭이 다가와 말했다.
“어, 내가 뭉개 버릴 팬케이크를 보고 있었지.”
“아하? 나는 내가 먹을 코리안 파스타의 레시피를 보고 있었는데.”
“이삭, 진지하게 말하는데 내 앞에서 코리안 파스타 이야기는 좀 자제해 줘.”
아주 안 좋은 기억이 떠올라 힘들거든…….
“갑자기 왜 그래? 농담은 네가 먼저 해 놓고. 아무튼, 뭐 좀 건진 거 있어?”
역시나. 이삭도 나와 마찬가지로 디그롬의 피칭 영상을 보고 있었다.
“없어. 하나도. 아, 하나는 있네. 타석에서 지켜본답시고 가만히 있으면 정말 덕아웃에서 가만히 구경만 할 것 같다는 거?”
“그런 폴리 같은 이야기 말고. 생산적인 이야기.”
“익스텐션-마운드에서 릴리스 포인트까지의 거리-이 길어. 아마 타석에서는 조금 더 가깝게 느껴질 거야.”
“덕분에 터널 구간도 길지.”
“릴리스는 낮아. 그런데 패스트볼은 높게 들어오지.”
“커쇼같이?”
“비슷해.”
때 아닌 정보의 캐치볼이 시작됐다.
“연속으로 같은 구종을 던지는 경우가 거의 없어. 자신감이지.”
“어. 맞아.”
“그나마 커브가 조금 흔들리는데…… 제길, 흔들려도 이런 무브라니.”
“12-6만큼 치기 힘든 커브는 없지. 패스트볼을 기다리다가 날아오면 타이밍 맞추기가 힘들 거야.”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조금씩 선명해지는 제이콥 디그롬의 모습.
문제는 그 모습이 무슨 마왕 같은 이미지로 그려져 문제지만.
“안 되겠다. 이삭, 네가 실수로 던진 척 배트를 마운드로 던져. 옆구리 쪽으로.”
“좋네. 벤치클리어링이 일어나면 막아 줄 거지?”
“왜 막아? 마운드로 달려 나가서 저 녀석을 집어던져야지.”
“음. 미끼전략. 좋군.”
어느새 시시껄렁한 이야기로 넘어간 우리의 대화.
객실 앞에 부착된 대형 스크린에서는 New York이란 글자가 아주 선명하게 비치고 있었다.
* * *
[시티 필드는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입니다.]
[정규시즌이 아닌 포스트시즌에서 5회 이후에 디트로이트가 뒤쳐진 경기가 22경기 만이니까요. 메츠 팬들이 열광할 만합니다.]
[5회 말, 크리스 아처 선수를 상대로 벼락같은 투런 홈런을 때려낸 피터 알론소 선수도 대단하지만, 그보다 더 대단한 건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의 타선에게 단 1점만 내준 제이콥 디그롬 선수입니다.]
[이삭 페레데스 선수의 볼넷 이후 라테 헤미체 선수의 야수선택, 호세 라미레즈 선수가 아쉽게 삼진으로 물러났지만 김사범 선수가 적시 2루타를 뽑아냈습니다.]
[디트로이트는 5회 초에도 만루를 만들었습니다만, 아쉽게도 적시타를 뽑아내진 못했습니다.]
[자, 뉴욕 메츠가 1점 차이로 앞서나가는 6회 초, 김사범 선수가 나올 예정인데요. 어떤 승부를 할지, 기대가 됩니다.]
“헤이, 라테. 긴장하지 말고. 잘하는 걸 해봐.”
“잘하는 거요?”
“그래. 잘하는 거 있잖아.”
“음…….”
사실, 오늘 마운드 위의 저 투수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라테가 지금까지 해 왔던 것보다 2배는 더 잘해야 한다.
그만큼 오늘 디그롬의 공은 날카롭고, 위력적이니까.
그걸 나도 알고, 이 녀석도 알 테지만……. 그냥 긴장을 풀어 주는 거지.
“말하는 거?”
“그래, 그거 좋네. 타석에 나가서 마구 지껄여 봐. 포수가 이야기를 듣느라 정신이 빠져서 한가운데 패스트볼을 줄 수도 있잖아?”
라테가 물구나무서서 발로 타격하는 걸 잘한다고 대답했어도 내 대답은 똑같았을 거다.
‘그래, 그거. 손으로 안 되면 발로 해야지. 좋은 생각이야. 슬라이딩할 때도 부상 걱정은 안 해도 되겠는데?’
뭐 이런 식으로.
중요한 건 자신감이다.
자신감.
[타석에 라테 헤미체 선수가 들어섭니다.]
[오늘 디그롬 선수의 투구 내용을 보면, 정말 소름이 끼칩니다. 의도적으로 패스트볼 비중을 낮추면서 변화구로 카운트를 유리하게 끌고나가고 있어요.]
[아하, 그렇긴 하군요.]
[그러면서 패스트볼을 적재적소에 던지며 결정구 역할로 바꾼 겁니다. 원래도 패스트볼의 구종가치가 높은 선수인데, 이런 식으로 잘 보여 주지조차 않으니 디트로이트 타자들이 혼란스러워 할 수밖에 없죠.]
슬라이더-커브-슬라이더-체인지업-투심 패스트볼.
내가 바로 전 타석에서 상대한 구질들이다.
오늘이 무슨 날이라도 되는지 자신의 모든 구종들을 총동원해서 존을 공략하는데, 장사 없지.
그렇다고 하나만 골라서 나가기엔 수준급의 구종들이 너무 많고.
신더가드와 비슷하지만, 조금 더 완성된 투수를 상대하는 느낌이다.
라테가 타석에 들어서고, 투구가 시작됐다.
“볼.”
긴 팔다리를 쭉쭉 뻗으며 공을 던지는 녀석.
워낙 공을 길게 끌고 나오다 보니 체감상으로는 바로 앞에서 공이 튀어나오는 것 같다.
“[email protected]#$!$~”
내 보호장구를 챙기면서 슬쩍 타석을 보니, 라테는 정말로 포수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뭐라고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뭐 알아서 하겠지.
“스트라이크!”
투심인가? 투심이겠지. 아니면 라테가 저렇게 몸을 뒤로 쭉 빼지 않았을 테니까.
“볼!”
“볼!”
오. 지쳤나?
[카운트는 3-1, 1회 이후 처음으로 3볼에 몰린 제이콥 디그롬 선수입니다.]
[투구 수가…… 92개, 평소보다 조금 많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아주 많지는 않은데…….]
“베이스 온 볼스!”
[볼넷, 볼넷입니다. 오늘 경기 두 번째 볼넷!]
[메츠의 덕아웃에서 바로 올라오네요. 중요한 경기이기 때문에 한 템포 빠르게 방문하는 거 같습니다. 물론 제이콥 디그롬 선수를 내리진 않겠지만요.]
“지쳤네. 아니, 피로가 쌓였다고 해야 하나?”
“그렇겠지. 디비전 시리즈에서 얼마나 던져 댔는데.”
“겨우 그 정도로 저러다니. 우리나라 프로 선수 중에는 1,3,5,7차전에 나와서 우승반지를 가져간 선수도 있었어.”
한국 프로야구의 역사가 아주 오래되진 않았지만, 그 오래되지 않은 역사 속에서도 엄청나게 대단한 전설을 써 내려간 분이시지.
“진짜로?”
“진짜로.”
대기타석으로 나가는 내 얼굴을 뚫어져서 바라보는 이삭.
“거짓말이네. 넌 거짓말하면 티가 나.”
“아니, 진짜라니까?”
“됐고, 나가기나 해. 저 녀석이 쉴 수 있게 마지막 숨통을 끊어 주는 거 잊지 말고.”
아오. 억울해.
진실을 말해도 믿질 않네.
‘그나저나, 숨통을 끊어 주라고? 우리가 지고 있는데 쓸 말은 아니지 않나?’
하여튼, 이 어리숙하고 의심 많은 멕시칸.
그러니까 미국생활을 그렇게 오래하는데도 영어가 그 모양이지.
* * *
따악!
꺼림칙한 볼넷 이후, 디그롬의 공이 배트에 맞아 나가기 시작했다.
“오, 안 돼, 안 돼, 안 돼! 제발!!”
-우와아아아아아!!
좌타석에 들어선 호세 라미레즈를 대비해 살짝 오른쪽으로 치우친 곳에 자리를 잡고 있던 메츠의 중견수, 브랜든 님모가 몸을 던져 타구를 잡아냈고.
“빠르게! 내야로! 내야로!”
그런 님모의 모습을 본 메츠의 덕아웃은 입을 모아 ‘인필드’를 외쳐 댔다.
그 소리를 들은 건지, 아니면 1차전에서의 사소한 실수를 잊지 않은 건지. 엄청난 허슬 플레이를 보여 준 브랜든 님모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마치 홈으로 송구하듯 공을 내야로 전달했다.
“후. 일단 아웃카운트 하나는 벌었군.”
딱딱하게 곧추세운 허리를 풀며 미키 캘러웨이 감독이 말했다.
“다음은 그 녀석입니다. 거르라고 할까요?”
“음…….”
부담스러울 정도로 다가온 투수 코치는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통해서 거르라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었다.
“제이콥이 얼마나 던졌지?”
“방금 공으로 97개입니다.”
“어렵게 승부를 가져가도 이닝을 끝내지 못할 수 있겠군.”
“그렇겠군요.”
“내가 어제 했던 말 기억하나?”
“악역은 우리가.”
“그래. 사인을 내게. 자동 고의사구야.”
쉽다면 쉬운 결정을 내린 미키 캘러웨이의 눈에 기세등등하게 타석으로 향하고 있는 김사범의 모습이 보였다.
‘우리도 저런 선수 하나만 가지고 있었으면…… 후우. 어렵군, 어려워.’
왜 메츠는 저런 선수를 알아보지 못했는지, 만약 김사범이 메츠에 있었다면 지금쯤 팀이 어떤 성적을 올렸는지를 생각하느라 캘러웨이 감독은 마운드의 디그롬을 살펴보지 못했다.
‘고의사구? 내가? 볼넷 하나를 내주긴 했지만 아직 힘은 충분한데?’
몸이 지쳤을지언정, 정신적으로 고양되어 있는 팀의 에이스에게 자동 고의사구가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도 모르는 채, 타석엔 프레디 프리먼이 들어섰다.
* * *
“고의…….”
“알겠습니다.”
평소에는 이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
지금처럼 심판의 말을 끊거나 하는 행동.
이런 게 쌓이면 나만 피곤해질 뿐이니까.
‘그렇지만…… 이렇게라도 안 하면…….’
내 기분을 풀 길이 없다.
이건 뭐, 내가 1루에 걸어 나가려고 이런 연봉을 받는 거도 아니고.
조금 낙심한 채, 1루에 나가자 마운드 위의 녀석이 투구자세를 취하지도 않은 채 나를 노려보고 있다.
‘뭐야? 안 그래도 기분 더러운데. 싸우자고?’
그렇게 시작된 눈싸움은 디그롬이 투구자세를 잡으면서 끝났지만, 진짜 도발은 그 이후에 일어났다.
“세, 세잎!”
[아, 이건 뭐죠?]
[2루에 주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1루로 견제구를 던진 제이콥 디그롬 선수입니다. 김사범 선수도 깜짝 놀란 것 같습니다.]
[메츠의 1루수인 피터 알론소 선수도 놀란 건 마찬가지 같은데요?]
[정상 수비위치를 향해 가던 중에 갑자기 날아온 공 때문에 거의 몸을 던지듯 공을 잡은 피터 알론소 선수입니다.]
[상황을 봐선 제이콥 디그롬 선수의 돌발행동 같은데……. 왜 이런 행동을 한 건지…….]
이 새끼가?
안 그래도 짜증 나는데, 지금 한번 해보자는 건가?
“붐, 참아. 참아야 해. 이성적으로, 이성적으로 생각해.”
슬라이딩 후, 날 보며 비웃는 녀석을 당장이라도 때려눕히고 싶었지만. 일단 참았다.
한순간의 감정으로 게임을 날리기엔 우린 너무 중요한 경기를 치루고 있었으니까.
“후우, 후우, 심호흡하고. 좋아. 잘했어. 아주 잘했어.”
옆에서는 1루 코치가 필사적으로 날 말리고 있었고, 그런 내 모습을 보며 날 비웃던 저 씹어 먹을 놈은 곧 투구동작에 들어갔다.
그리고.…….
빠아아아악!
‘X발!!! 이게 팀웍이다 이 새끼야!!!’
“X발!! 이게 팀웍이다 이 새끼야!!!”
아. 나도 모르게 그만.
미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