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김사범, 2022시즌(평천하(平天下))(6)
“3차전에서 모든걸 쏟아낸 뉴욕 양키스는, 거짓말처럼 내리 2패를 내주며 탈락하고 말았다.”
[그므흐라…….]
“팀의 차세대 에이스로 키워지던 투수가 5차전에서 선발로 나섰지만, 휴스턴 벤치의 각종 작전에 속절없이 휘둘리며…….”
[아! 그만 하라고!! #$#%놈아!!]
크크큭, 그만해야지. 그만해야 하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후, 알겠다. 유감이야.”
[……그래. 너도 당연히 라이벌인 나와 상대를 하고 싶었겠지만…….]
“아니, 너 말고 다른 선수들. 하필 네가 5차전 선발이었던 게 유감이라고.”
[너…….]
“진짜 농담이고, 스트레스 풀고 싶으면 지금 접속해. 내가 얼마든지…… 야? 김병헌? 야?”
끊었다.
내가 봐도 아주 못된 짓이긴 한데…… 놀려 먹고 싶을 걸 참을 수 없었다.
“자기, 자기는 왜 그 친구한테만 그래? 다른 사람들한테는 그렇게 안 하면서.”
오해야, 수리. 난 우리 구단에서도 충분히 이러고 있어.
“음…… 그냥 놀리고 싶잖아. 반응도 괜찮고.”
수리에게 말할 순 없지만, 사실 지금 이 상황이 너무너무 재미있다.
돌아오기 전에는 거만한 왕처럼 군림하던 녀석이 내 말 한마디에 삐져서 전화를 끊다니.
“그러지 말고, 다시 전화해서 미안하다고 해. 자기는 장난으로 하는 거지만 당하는 당사자는 얼마나 힘들겠어?”
음…… 그러려나? 내가 너무 심했나?
심장이 콕콕거리는 걸로 봐서는 조금 심했던 거 같다.
“알겠어. 지금 바로 다시 전화할게.”
[고객의 사정으로 착신이…….]
와우.
나 이거 미국에서는 처음 들어 봐.
처음으로 들었을 때가…… 부산에서 처음 방출되고 그 당시 2군 감독에게 울면서 밤새 전화했을 때였던가?
……진짜 많이 삐졌나본데.
그 정도로 심하게 놀렸나?
* * *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전략은 간단하지. 붐을 거르고, 나머지 타자에게 집중하는 것.”
불 꺼진 회의실에 오직 론의 목소리만 울리고 있었다.
“음…… 내가 생각하기에 아주 멍청한 짓인 것 같지만, 그렇다고 내가 가서 바보 같은 짓이라고 알려 줄 필요는 없지 않나?”
- 와하하하하!
“좋아. 반응이 좋군. 그런 의미에서 호세, 자네에겐 이번 시리즈에 한해서 그린라이트를 주겠네. 붐의 다리를 견제하기 위해서 걸어 내보내면 저기 저 우주까지 도루해도 눈감아 주지.”
어…… 그래도 미국에서 조금 산 나지만, 가끔 이렇게 이해가 안 되는 개그가 툭툭 나온다.
그러니까…… 휴스턴에 우주 뭐라 하는 센터가 있고, 그게 도시를 상징하는 것 중 하나니까 우주를 이용해서 농담을 한 건가?
“푸하핫! 알겠습니다, boss.”
어…… 웃긴 거였구나. 음…….
“시즌 중 겪어 봤으니 알 테지만, 애스트로스의 A.J 힌치는 시즌이 끝날 때쯤부터 이런저런 작전에 재미를 붙인 모양이야. 수비할 때 항상 염두에 두고, 상황별 자료는 저기 출구 쪽에 비치해 놨으니 한 번씩 읽어 보면 되겠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자다가도 페이지 넘버를 대면 내용이 나올 정도로 달달 외웠으면 좋겠군.”
내 옆에 앉은 폴리가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 글자도 안 읽을 놈이 고개는 왜…….’
아무튼, 뭔가 이제 본격적인 포스트시즌의 시작인 느낌이다.
* * *
[승리! 또 승리! 챔피언십 시리즈 1, 2차전을 내리 승리한 디트로이트.]
[포스트시즌의 딜레마.
- 메이저리그의 포스트 시즌 일정은 조금 특이하다.
5전 3선승제인 디비전 시리즈의 경우 2-2-1 순으로 승률이 높은 팀 홈 - 낮은 팀 홈 - 높은 팀 홈 순으로 결정되는데, 이는 7전 4선승제인 챔피언십 시리즈와 월드시리즈도 2-3-2로 경기 숫자만 다를 뿐 기본적으로 룰은 같다.
그러다 보니 약간의 문제가 생겼는데, 압도적인 강팀이 나타나는 경우에 시리즈 승리를 모두 원정 팀의 구장에서 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사실, 큰 문제는 아니다. 정규시즌에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 줬던 팀들이 포스트시즌에서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한 경우도 꽤 많고, 그 기세를 그대로 이어 가더라도 시리즈당 1~2번의 패배를 하는 건 다반사니까.
하지만 문제는, 지금 메이저리그를 지배하다시피 하는 팀인 디트로이트 타이거즈가 포스트시즌에서 14연승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메이저리그 포스트시즌 역사상 신기록이기도 하다. 참고로 종전 기록은 뉴욕 양키스의 12연승이었다.
2021시즌 디비전 시리즈부터 시작된 연승은 2022시즌 디비전 시리즈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타이거즈의 팬들은 총 4번의 시리즈 중 단 한 번도 홈에서 우승을 확정 지은 적이 없다.
‘모 타운’으로 불리며 노동자들의 도시로 유명한 디트로이트 팬들이 쉽게 원정경기를 따라갈 수 없다는 점을 봤을 때, 이는…….]
미국,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인근 I-75(S) 주간 고속도로.
미시간주의 최북단, 수세인트마리에서 시작되는 I-75 고속도로는 미 동부에서 남북을 종단할 수 있는 고속도로다.
꽤 큰 고속도로이기도 하고, 평소에도 통행량이 많아 미국에서는 드물게도 끝에서 끝까지 왕복 6차선이 완공된 고속도로이기도 한 이 I-75가 때 아닌 정체에 몸살을 겪고 있었다.
“제길! 추수감사절도 아닌데 이게 무슨!”
“대디, 그러길래 제가 하루 일찍 출발해야 한다고 했잖아요.”
“그때는 야구 경기를 보려고 1300마일을 운전해서 가는 미치광이들이 얼마 없을 줄 알았지!”
1300마일.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약 2100킬로미터.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의 팬들은 단지 ‘야구 경기를 보려고’ 서울에서 부산을 4번 왕복할 수 있는 거리를 차를 타고 달려가고 있었다.
“빌어먹을 정체! 빌어먹을 도로! 정부는 우리 돈을 가져가서 뭘 하는 거지? 이렇게 막히는 도로를 왜 아직 확장하지 않은 거야?”
아니, ‘기어가고’ 있었다.
* * *
2차전도 1차전처럼 우리의 승리로 끝이 나고, 휴스턴으로 향하는 전용기 안.
폴리가 나를 찾아봐 무언가를 들이댔다.
“붐, 이거 봤어?”
“안 봐. 아무것도 안 볼 거야.”
“안 보면 후회할 텐데?”
아…… 내일 경기를 위해 눈을 쉬게 해 주고 싶었는데.
휴스턴과의 지난 두 경기 동안 내가 한 거라곤 뚫어지게 상대 투수를 노려보고, 들어오는 공이 존에서 얼마나 빠져나갔는지를 살펴보고, 상대 투수의 투구 폼을 눈이 빠져라 보며 도루 타이밍을 잡는 게 전부였으니까.
“……뭔데?”
“이거 봐봐, 지금 실시간 도로 상황이야.”
폴리가 건네준 태블릿에는 교통정보를 알려 주는 뉴스 프로가 나오고 있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57분 교통정보 같은 건가? 아니, 그건 라디오니까 좀 다르려나?’
[디트로이트로부터 시작된 차량의 행렬은 마치 군집체처럼 움직이고 있습니다. I-75로부터 시작된 차량들은 순서대로 US-24, I-469, I-465, I-70등을 경유하며…….]
“갑자기 이건 왜 보여 주는 거야? 우리나라도 이 정도 차량은 있어, 추석이라고 명절 때만 되면 이렇게 도로가 붐빈다고.”
“이거, 우리 팬들이야.”
“뭐?”
“우리 팬들이 지금 디트로이트에서 몰려오고 있다고, 휴스턴으로. 그것도 차를 타고.”
어…….
잠깐. 그러니까 그…… 예전에 올스타전에 처음 참가했을 때 이런 팬이 있던 거 같은데.
“거기서 여기까지? 비행기로도 4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그렇지, 감동이지 않아? 아, 이럴 줄 알았으면 디트로이트에서 글귀를 하나 더 새기고 오는 건데, Welcome! 이런 거 말이야.”
[지금 도로를 차지하고 있는 대부분의 차량은 휴스턴 애스트로스와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의 챔피언십 시리즈를 보기 위한 디트로이트 팬들일 거라고 예상되며, 현재 이들의 도착 예정시간은 31시간입니다.]
핸드폰을 꺼내 지도앱을 켜 직접 검색해 본 디트로이트에서 휴스턴의 거리는…… 1300마일이었다.
‘보자…… 100마일이 160정도니까……. 곱하기 13 하면…… 2000km? 이 거리를 달려오고 있다고? 팬들이?’
내일모레 경기도 어차피 배트 한번 휘둘러 보지 못할 텐데, 경기 전에 빡세게 사인투어를 돌아야겠다.
내가 다른 걸로 보답할 순 없으니까.
‘음? 보답?’
나, 백억대 연봉자잖아?
다음 날.
나는 구단의 SNS를 하루 종일 확인했다.
‘이 정도면 되겠지? 음. 못 받는 사람도 있을 것 같긴 한데……. 사인이랑 바꿔 가라고 하면 되려나?’
어제 저녁, 같은 호텔에 방을 잡은 가족들에게 넌지시 말해 봤는데, 다들 만족해하며 찬성했다.
팬들이 주는 연봉, 팬들에게 써야 하지 않겠냐던가?
‘수리도, 필도 웃으면서 만족했고.’
필의 조언을 따라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구단에 문의해 봤는데, 곧바로 답장이 날아왔다. 이벤트 진행이나 섭외는 구단이 알아서 해 주겠다고.
심지어 절반 정도의 금액은 구단이 책임지겠다며 하도 난리를 피워 대서 나는 절반의 금액만 내면 됐다.
‘팬들이 좋아하겠지?’
오랜만에 조금 설레는 기분이다. 내일이 기대되는 이 느낌. 아주 좋다.
[미닛 메이드 파크에서 인사드립니다. 오늘 경기는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3차전입니다. 현재 2-0으로 디트로이트가 앞서 나가고 있죠?]
[첫 경기부터 김사범 선수를 단호하게 고의사구로 거르면서 시작했던 휴스턴 애스트로스입니다만, 다른 타자들을 상대하기에 투수들이 너무 지친 느낌입니다. 김사범 선수를 제외한 나머지 타자들도 결코 만만한 타자들이 아니거든요.]
[맞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경기 전, 김사범 선수가 직접 이벤트를 열었죠?]
[네, 미닛 메이드 파크의 명물인 감자와 스테이크 요리를 직접 디트로이트 팬들에게 나눠 줬다고 해요.]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로고가 찍힌 물건을 제시하면 모두 공짜라고 하더군요.]
[하하하, 덕분에 저도 하나 먹었습니다.]
[엇? 절 빼놓고 가시다니요. 너무하신데요?]
[하하하, 제가 가지고 있는 게 모자밖에 없어서. 아,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전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저지도 가지고 있습니다.]
밤새 운전해서 온, 초췌한 팬들이 내가 준 샌드위치를 먹으며 엄지를 치켜드는 장면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감동적이었다.
구단에서 찍은 보도용 사진을 보니 조금, 아주 조금 난민용 무료배급소 같은 느낌이 들긴 했는데……. 뭐, 알아서 하겠지.
[오늘 선발로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즈가 크리스 아처 선수, 휴스턴 애스트로스는 포레스트 휘틀리 선수가 나옵니다.]
[포레스트 휘틀리 선수가 1차전 이후 이틀을 쉬고 다시 나오네요. 그만큼 휴스턴에게 믿을 만한 투수 자원이 없다는 소리인데요, 이게 다 선수들의 계약 관리를 잘하지 못해서입니다.]
[무슨 말씀이시죠?]
[카를로스 코레아, 게릿 콜, 저스틴 벌렌더, 마이클 브랜들리, 조지 스프링어. 이 선수들이 2021시즌부터 2022시즌까지 FA로 풀릴 예정이었던 선수예요. 모두 시장에서 충분히 원하는 선수들이 너무 많이 FA로 풀렸습니다.]
[듣고 보니 그렇군요.]
[그러다 보니 선수들을 모두 지켜내기 힘들었고, 게릿 콜이나 저스틴 벌렌더, 조지 스프링어 선수 같은 경우에는 다른 구단과 계약해 버렸죠. 물론 그들과 계약할 때에는 팜의 유망주 풀이 꽤 인정받았지만…… 그 많은 선수들 중에서 지금 남은 건 포레스트 휘틀리 선수밖에 없어요.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지저분한 야구, 아니, 끈질긴 야구를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플레이 볼!”
구심의 콜이 들리고, 약간 자유분방하게 흩어져 있던 선수단이 모두 집중하기 시작했다.
휴식일이 얼마 주어지진 않았지만, 저기 서 있는 녀석은 2~3년 후면 메이저리그를 지배할 수도 있는 투수니까.
“볼!”
첫 타자, 초구부터 존 상단으로 꽤 날리는 패스트볼.
이것만 봐도 지금 정상적인 컨디션이 아닐 거라는 걸 알겠다.
“존을 좁혀야겠어.”
“오늘 구심, 어때?”
“난 그를 AI라고 불러. 웬만한 상황에서는 아주 정확하게 존을 보지.”
“좋아. 그러면 조금 지켜봐도 되겠군.”
베테랑 선수들이 쉴 새 없이 정보를 교환하고, 그 주위에 둘러앉은 선수들에게도 그 정보가 순식간에 공유된다.
“이삭이 조금 지켜봐 줬으면 좋겠는데.”
“설마. 내가 아는 1번 중 저 녀석만큼 공격적인 녀석은 없을걸. 아, 붐이 1번으로 나가는 경우 말고.”
따악!
프리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삭이 때려낸 타구가 하늘을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