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김사범, 2022시즌(평천하(平天下))(5)
클루버는 던지고, 나는 잡았다.
땅볼, 땅볼, 땅볼.
어쩌면 안타-안타-안타로 이어져 손쉽게 1점을 얻을 수도 있었던 보스턴의 공격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났다.
“좋은 수비.”
단지 1회 초가 끝났을 뿐인데도 잔뜩 더러워진 내 유니폼을 가만히 바라보던 클루버가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잠깐, 미소?
“코리? 맙소사. 지금 웃은 거예요?”
“음.”
바로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가긴 했지만.
“맙소사……. 코리가 웃었어.”
나와 같이 덕아웃으로 들어오던 이삭이 그 모습을 보며 조금 충격을 받긴 했지만, 심지가 굳센 놈이니 충격에서 잘 벗어날 수 있을 거다.
[1회 초는 그야말로 김사범 선수의 독무대였습니다.]
[무키 베츠 - 젠더 보가츠 - 트리스톤 카사스로 이어지는 라인업을 모두 땅볼로 유도해 낸 코리 클루버 선수도 대단하지만, 그 공들을 실수 없이 모두 아웃카운트로 바꿔 낸 김사범 선수의 수비가 돋보이는 이닝이었습니다.]
[세이버 매트릭스의 수비 지표의 효용에 대해서 말이 많습니다만, UZR, UZR/150, DRS, TZ등의 수비 지표를 모두 뒤져 봐도 김사범 선수만큼 압도적인 수비를 자랑하는 유격수는 없었습니다. 조금 올드하게 말하자면, 수비 범위, 순발력, 동체시력, 송구, 더블플레이 상황까지 모두 완벽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죠.]
“이게 다 ‘파이어 볼러’ 제이슨 폴리가 도와준 덕분이지. 붐이 수비를 잘하긴 하지만, 내 문신이 아니었다면 저런 송구는 못 했을걸? 이건 약간 주술적인 의미로…….”
어제만 해도 날 죽이려고 들었던 폴리는 내 세레모니 이후 기가 살았다.
내 송구가 정확하고 빠르게 날아가는 게 자기 문신 때문이라나.
그게 없었으면 지금 같은 송구는 불가능했을 거란다.
“그럼 론에게 말해야겠네.”
“그렇지? 아무래도 내가 만든 문장에 동양의 신비가 깃든 거야. 분명해.”
“아니, 그거 말고. 널 타석에 집어넣으라고 말할 건데?”
그런 폴리가 보기 싫었는지, 케이시가 공격을 시도했다.
그런 케이시의 말에 오른쪽 팔뚝을 소중히 쓰다듬으며 대꾸하는 폴리.
“그래? 그것도 좋지. 음…… 이 문자에 힘이 깃들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씨알도 안 먹혔지만.
똑똑한 폴리가 아주, 아주 그립다.
* * *
[1루에 호세 라미레즈 선수가 나간 뒤, 김사범 선수에게도 연거푸 볼을 던지는 에두아르도 로드리게스 선수입니다.]
[컨트롤이 괜찮은 패스트볼과 체인지업이 주 무기인 선수인데요, 오늘 모습만 놓고 보면 그런 평가를 찾아볼 수 없네요.]
노골적이다.
아주 노골적으로 날 피하고 있다.
“오늘따라 제구가 별로네? 저 녀석이 여기서 굴러먹을 수 있는 수단이 제구 아니었어?”
“그러게. 왜 그러지? 흠. 나중에 같이 분석해 봐야겠군. 너도 같이 할래?”
내 가벼운 도발을 정신 나간 화법으로 넘어가는 포수까지.
사실, 레드삭스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거지.
치면 거의 홈런이고, 내보내면 도루로 3루까지 가는 타자 앞에 주자가 떡하니 길을 막고 있는 상황인데 누가 승부를 하겠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 타격자세를 잡고, 습관처럼 코메리카 파크의 담장을 배트로 한번 훑었다.
내가 준비를 하고 있지 않으면, 티끌만 한 우연이라도 내 것으로 만들 수 없으니까.
[사인을 나눈 투수, 셋 포지션.]
그때 1루에 있던 호세가 2루를 향해 맹렬하게 돌진했다.
좌완 투수가 뻔히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자동으로 2루에 갈 상황에서 도루를 한 거다.
그리고 그 ‘황당한’ 시도는 경기에 변수를 발생시키는데 성공했다.
포수 미트가 원하는 곳에서 딱 공 한 개.
그 한 개만큼 존에 가까이 붙은 그 공은…….
‘왔다.’
내 배트가 충분히 닿는 곳으로 들어왔다.
따아악!
그리고 힙-턴이니, 중심 이동이니, 이런 복잡한 동작을 과감하게 생각하고 오직 ‘띄운다’라는 의식 하나로 친 공은…… 2루를 향해 빠르게 달려가던 호세의 걸음을 느긋하게 바꾸는데 성공했다.
[호, 홈런! 김사범 선수! 어제와 같이 오늘도! 1회 말에 홈런을 기록했습니다! 오늘 경기, 칼을 갈았군요!]
[좋은 수비 뒤에는 좋은 타격이 있다는 야구계 속설을 김사범 선수가 배트로 증명해 보이는군요. 느린 화면이 나오나요? 네, 나왔네요. 구질은 패스트볼인데……. 포수가 빠져 앉은 위치보다 조금 안으로 들어갔죠?]
[그걸 감안해도 상당히 먼 위치인데요.]
[김사범 선수의 신장이 198cm? 아, 올 시즌 기준으로는 200cm네요. 메이저리그에서도 손에 꼽히는 장신이니만큼 스윙 스팬이 엄청나거든요. 단지 홈플레이트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안심하면 안 됩니다. 그러다가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 나오거든요.]
이제서야 내 안의 울화가 조금 가라앉는 게 느껴진다.
어쩌면 어제 배리 본즈가 방송에서 한 말이 조금 신경 쓰였을 수도 있고, 날 상대해 주지 않는 보스턴의 투수들, 아니, 리그의 투수들에게 쌓인 불만이 터져 나온 것일 수도 있다.
‘이름 옆에 ‘스타’가 붙은 선수들과는 말도 섞지 말라고 했는데.’
뭐, 어쨌거나 저쨌거나, 배리 본즈의 말대로 이제 난 남은 커리어 내내 날 피해 가는 투수들과 엎치락뒤치락하며 스탯-야구경기에서의-을 쌓아 나가야 할 운명이다. 이제 와서 그런 사실에 분노하거나, 답답해하기에는 조금 멀리 와 있기도 하고.
홈런을 치고 나면 이런 게 좋다.
음……. 이것도 현자 그 뭐시기의 일종인가?
흠. 아무튼, 냉철한 이성을 가지고 조금 더 냉정하게. 차분하게.
‘날 피할 순 있어도, 넘어갈 순 없게.’
단 한순간이라도 긴장을 풀면 아주 주옥되는 거야.
작은 사범이를 무시해도 주옥되는 거고.
* * *
- Let's get it Boom!! Boom!! Boom!!
‘저걸 넘긴다고?’
코리 클루버는 자신도 모르게 공을 던지는 오른손을 꽉 쥐었다.
그리고 이내 깨달았다.
같은 팀인데도 불구하고, 저 ‘붐’의 타구를 보는 것만으로도 손바닥이 땀으로 흥건히 젖었다는 걸.
‘그러고 보면, 예전에 나와 상대할 때도 그랬었지.’
단 한 구의 실투, 그걸 잡아당겨 홈런을 만들어 냈던 김사범의 모습을 떠올리는 코리 클루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헤이, 코리. 오늘 붐에게 선물이라도 사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음.”
코리스 아처가 그런 코리 클루버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그건 긍정의 뜻이죠? 하하.”
“어떻게 저런 타구를 날릴 수 있는 거지?”
말수가 적고, 감정의 기복조차 적은 코리가 자기도 모르게 내뱉은 말.
크리스는 그런 클루버의 질문에 아주 정성껏 대답했다.
“몰라요, 하도 자주 보니까 그냥 그러려니 하는 거죠.”
“음?”
“존 밖으로 빼도 홈런, 존 안으로 넣어도 홈런, 실투? 당연히 홈런.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의 붐은 더 무시무시하죠. 맙소사, 150경기 가까이 출전했으면서 삼진이 15개예요. 이게 가능한 이야긴가요?”
“80-80부터 난 이게 게임이 아닌지 고민했어.”
“네? 아하하하, 코리도 농담이란 걸 하네요? 하긴, 인터뷰도 하니까. 아무튼. 그냥 고민하지 말고 즐겨요. 경험상 그게 나아요. 우린 최고의 윙맨을 가지고 이 게임을 하는 거잖아요?”
코리 클루버의 입장에서는 매 경기마다 하이라이트급 수비를 선보이는 선수가 타석에선 배리 본즈-그보다 더 치명적이긴 하지만-, 루상에선 리키 핸더슨처럼 움직이는 걸 보는 게 몹시 놀랍고 신기했다.
그런 플레이를 한 시즌 내내 봤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코리 클루버가 김사범을 두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고민하고 있을 때쯤, 마침내 그 주인공이 덕아웃으로 들어왔다.
“좋은 타…….”
“붐!!!!!! 정말 멋진 타구였어요! 어떻게 그걸 친 거예요? 그런 공이 올 걸 알았나요? 아니면 그냥 예상으로? 호세의 도루는 사범이 사인을 낸 거예요? 벤치에선 아무 지시도 없었는데! 아니, 잠깐, 호세! 혹시 그거 혼자 한 거예요? 맞죠? 맞다고요? 우왁! 이 괴물들! 이런 선수들과 내가 한 팀이라니!”
“나이스 배…….”
코리 클루버는 김사범에게 붙어 한참을 떠드는 라테를 지긋이 바라봐 제자리로 돌려보내고는 김사범 앞에 섰다.
“나이스 배팅.”
“어…… 어, 네. 고마워요 코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 * *
[불이 붙은 폭탄, 그린 몬스터는 그를 막을 수 없었다. 보스턴에서 벌어진 홈런 쇼.]
[작년부터 시작된 타이거즈의 포스트시즌 연승 행진, 양키스의 12경기를 넘어 14경기에 도달하다.]
[론 가든하이어 감독이 말한 ‘황금의 시대’가 오기까지 앞으로 3시즌.]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보스턴 레드삭스를 상대로 디비전 시리즈 스윕.]
[알렉스 코라 ‘우린 그를 막지 못했다. 아니, 그 팀을 막지 못했다. 분명 상대하기 전까진 괜찮은 계획이라고 생각했지만, 잘못된 생각이었다.’]
12-3. 우린 전의를 상실한 레드삭스를 상대로 폭격을 퍼부었다.
“설마 지금 만족하고 있는 건가? 저 녀석들은 내년에도, 또 그 후에도 우릴 가로막을 녀석들인데? 만족하지 말고 몰아쳐. 더! 더!”
물론 우리도 사람인지라, 이 정도까지 했으면 조금 느슨하게 플레이할 법도 했지만, 론은 상대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 주는 걸 매우 싫어했다.
“트라우마가 남도록! 우리를 보면 저절로 다리가 떨려올 때까지 몰아붙여!”
그런 론 덕분에 우리는 사정없이 레드삭스의 마운드를 폭격했고, 시즌을 치르면서 가뜩이나 지쳐 있던 상대편 불펜진은 나중에 가서는 거의 울면서 우리를 상대해야만 했다.
“저쪽은 어때? 아직도 양키스가 이기고 있나?”
“아니, 애스트로스가 역전했어.”
“휴스턴이? 흠. 상상이 안 가는데.”
우리가 시리즈를 스윕하며 받을 휴식에 기뻐하고 있을 때, 반대쪽 라인에서는 그야말로 전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8-7, 12-10, 그리고 오늘은…….
“몇 대 몇이야?”
“2-1, 9회 말. 양키스의 마지막 공격이야.”
재미있는 경기를 하다가, 아주 시궁창 같은 경기를 했고, 오늘은 보는 사람도 맥이 탁 빠지는 투수전을 했군.
“좋은데? 가능하면 휴스턴이 이겼으면 좋겠는데.”
“왜? 아, 네 친구가 양키스에 있댔지? 킴이었나?”
“그렇지. 근데 뭐, 그런 이유는 아니고……. 아무래도 내가 보기엔 휴스턴보단 양키스가 더 전력이 괜찮은 것 같거든.”
“음…… 그렇긴 하지. 객관적으로는.”
“그러니까 여기서 휴스턴이 이겨 버리면 시리즈가 5차전까지 갈 가능성이 높은 거 아냐? 그것만큼 좋은 게 어디 있어?”
덤으로 2차전에 나온 김병헌이 자연스럽게 5차전에 나오게 되면서 로테이션 뒷자리로 밀리는 효과도 있고 말이야.
“악마네, 악마야. 네 친구가 들으면 아주 섭섭하겠어.”
나를 향해 혀를 차며 말하는 이삭에게 상큼하게 대답해 줬다.
“입장을 바꿔 놓으면 그 녀석도 나하고 똑같은 생각을 할걸?”
암, 누구 친군데.
* * *
뉴욕, 양키 스타디움 불펜.
“아, 진짜! 왜 이렇게 귀가 가려운 거야?”
“킴, 무슨 일 있어?”
“아니에요, 아무것도. 갑자기 귀가 가려워서.”
“그나저나, 이렇게 불펜에 있어도 돼? 내 생각엔 오늘 경기에 나설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만약을 대비하는 거예요. 불펜투수들을 믿긴 하지만, 혹시라도 내 공이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
김병헌은 계속해서 귀를 파며 불펜 저편으로 보이는 그라운드를 응시했다.
‘아, 디트로이트도 오늘은 좀 졌으면 좋겠는데. 체력이 후달리는 놈이니까 많이 뛰게 하면 할수록 이득이란 말이지.’
그의 중학교 동창이자 친구, 그리고 라이벌인 김사범을 떠올리며 이를 가는 김병헌.
‘이번에는 꼭…… 하, 그러려면 일단 오늘 경기에서 이겨야 하는데…….’
김병헌이 생각하기에, 휴스턴의 마무리로 던지고 있는 저 투수의 공은 양키스의 타자들이 충분히 공략할 수 있는 공이었다.
바로 그때.
-우와아아아아아!!
외야에 설치된 불펜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잠깐, 잠깐. 뭐야?”
김병헌은 머리를 흔들며 잡생각을 접어 버리고 다시 그라운드로 시선을 향했다.
‘뭐지? 뭐야? 일단 애런이 1루를 통과하고 2루로 뛰고 있는 걸 보면 안타 같은데?’
“뭐해? 피해!”
“우왁!”
철컹!
애런 저지의 타구가 우중간을 갈라놓으며 불펜 앞, 철조망을 강하게 때렸다.
불펜 코치가 김병헌을 제때 잡아당기지 않았다면 부상을 당했을 수도 있는 타구.
넘어진 김병헌은 아직까지도 공을 주우러 달려오고 있는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외야수를 보며 넘어진 상태에서 외쳤다.
“애런! 뛰어! 3루까지! 이 자식들 아직 공도 못 잡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