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김사범, 2022시즌(평천하(平天下))(4)
차마 로라를 뿌리칠 수 없었던 나는 폴리와 똑같은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Jason Foley, the finishing pitcher who throws the FIRE BALL on the planet.’
내 오른팔에 빼곡하게 새겨진 폴리를 찬양하는 글자들.
로라의 주도하에 염료를 팔에 올려놓고 기다리는 그 오욕의 시간 동안, 나는 웃음거리가 되어야 했다.
“푸하하하핫! 내가 이럴 줄 알았지. 그러게 왜 그런 장난을 친 거야?”
“닥쳐, 이삭. 네가 적어 준 것도 번역해 봤으니까.”
“어…….”
것 봐.
나만 그런 게 아니라니까.
난 그저 운이 없었을 뿐이라고.
“다들 똑같잖아? 왜 나한테만…….”
“넌 더 닥쳐. 한마디도 하지 마. 말하느라 흔들려서 제대로 글자가 나오지 않으면 이번엔 이마에 새겨 줄 테니까.”
그건 안 되지.
절대 안 돼.
30분쯤 지났을까? 내 오른팔에 제대로 문신이 된 걸 확인하고 나서야 폴리와 로라는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갔다.
‘뜨거운 수건으로 불리고 긁어내면 된다고 했지? 하룻밤 정도면 뭐…….’
“붐, 분명히 말하는데. 난 이 문신 안 지울 거야. 그러니까…… 알지?”
아…… 망했네.
* * *
시간이 조금 더 지나고, 케이시가 도착했고, 페이스가 도착했으며, 시미즈도 도착했다.
물론, 내 팔의 헤나 문신을 본 녀석들은 배를 잡고 웃어 댔고 -믿었던 페이스와 시미즈까지-, 폴리의 팔에 새겨진 글자가 황금의 시대가 아닌 다른 의미란 걸 안 뒤에는 더 크게 웃어 댔다.
“웃지 마. 지금 내 상황이라면 너희 모두를 접어 버릴 수도 있으니까.”
내가 아무리 표정을 굳히고 경고해도.
“폴리로 접을 거야? 아니면 언-폴리로? 이왕이면 폴리로 접어 줘. 그래야 론에게 2:1로 다투다가 졌다고 말할 수 있잖아?”
녀석들은 그저 웃으면서 받아칠 뿐이었다.
“걱정 마. 내 오른손엔 이 메이저리그의 최강자, 붐이 잠들어 있으니까. 내가 붐을 잠에서 깨우기만 하면 저 녀석쯤은 한 손으로도 제압할 수 있지.”
그리고 나를 흑염룡 취급하는 폴리도 마찬가지.
아까 전의 그 우울함은 어디로 갔는지, ‘최 사범 강’을 자랑스럽게 보여 주며 날 놀리는 데 합세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너무 웃어서 그런지, 복근이 아프군. 정말 오랜만이야.”
“나도…….”
“나도 마찬가지. 안 그래도 기분이 별로였는데. 하아, 싹 나은 거 같아.”
원래라면 오늘의 타깃이 될 운명이었던 케이시도 은근슬쩍 빠져나가 버렸다.
한참을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돌아온 야구 이야기.
“내일 저쪽 선발이…… 로드리게스?”
“맞을 거다. 포스트시즌에서 3인 로테이션을 쓴다고 했으니.”
“그럼 홈에서 치루는 첫 경기는 마커스 윌든이 나오겠군.”
“그렇지. 아, 오늘 리뷰 프로그램이 할 시간이군. 같이 보겠나?”
“뭐야? 페이스, 그런 것도 봐?”
“시야는 넓을수록 좋은 법이지.”
페이스의 말대로, TV를 켜자마자 지역 방송사에서 오늘 우리가 한 경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바로 이 부분, 이 수비가 아주 결정적이었죠. 1회 초, 쉴 새 없이 비틀대던 케이시 마이즈가 정신을 다잡은 계기가 된 수비였습니다.]
“봤지?”
“그래. 알겠다.”
[1회 말. ‘붐’이 프라이스의 밋밋하게 들어오는 슬라이더를 있는 힘껏 잡아당겨 아주 큰 아치를 그려 냅니다. 바로 역전에 성공하는 타이거즈.]
“크흠.”
“다시 봐도 밋밋하긴 했네.”
“어쩐지. 아주 끝도 없이 날아가더라니.”
솔직하지 못한 녀석들. 부러우면 부럽다고 하지.
[레드삭스도 가만히 있던 건 아니었습니다. 3회 초, 시즌 32홈런을 기록한 젠더 보가츠가 추격의 솔로 홈런을 터트리면서…….]
“케이시의 볼이 후졌지.”
“그렇지. 오늘 케이시는 쓰레기였어.”
“저기, 나 여기 있거든?”
[마침내 찾아온 9회.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의 마무리 투수인 제이슨 폴리가 마운드에 오릅니다. 시즌 52세이브. 오, 오른팔에 아주 멋들어진 문신을 하고 왔군요. 확인 결과, 포스트시즌을 위한 깜짝 이벤트라고 합니다. 헤나 문신이라고 하던가요?]
“크크큭…… 내 오른팔엔 아주 거대한 폭탄이 잠들어 있지.”
정신 나갔네. 나갔어.
[아주 강력한 하이 패스트볼을 던져 무키 베츠를 삼진으로 잡아낸 제이슨 폴리. 이 공으로 타이거즈는 시리즈를 앞서나가기 시작합니다.]
“아마 이런 분위기는 시리즈 내내 이어질 거야. 아니, 포스트시즌 전체가 이런 분위기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지.”
이삭의 말에 모두들 동의를 표했다.
“최대한 붐의 앞에 주자를 만들지 않고, 만약 주자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피해 갈 거란 거지?”
“그렇지.”
“투수전보단 타격전, 개싸움을 유도할 거고.”
“그건 당연하다. 애초에 투수전으로 유도하려고 해도 붐이 제 컨디션을 유지하는 이상 매우 힘들 테니까.”
“그러니까 그 말은, 타격전은 해볼 만하다는 건가? 하하. 뭐…… 내가 오늘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는 것 같지만, 아주 잘못된 접근을 하고 있네.”
케이시가 불타올랐다.
케이시처럼 적극적으로 표현하진 않지만, 페이스와 시미즈도.
바로 그때.
TV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포스트시즌을 위해서 특별 게스트를 모셨습니다. 배리 본즈입니다.]
“푸웁!”
생리적으로 가장 솔직한 이삭이 우리를 대표해서 마시고 있던 물을 뿜었다.
‘아니, 저 아저씨는 왜 여기에서 나와?’
디트로이트, 그리고 보스턴과 아무런 접점이 없는 사람이 왜 갑자기? 라는 의문이 채 가시기도 전에, 배리 본즈는 자신이 왜 이 프로에 나왔는지 자신의 입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타이거즈는 아주 훌륭한 4번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내 명성에는 미치지 못하지만요.]
[50-50. 시즌 최다홈런, 그리고 80-80까지 기록한 붐을 이야기하시는 건가요?]
[내가 활약하던 시기는 아주 터프한 투수들이 구단마다 한 명씩은 있던 시절입니다. 지금과는 다르죠.]
[아…….]
[오늘 경기만 봐도 그렇습니다. 그 ‘붐’은 1회 초, 한 번의 스윙 이후 아무것도 하지 못했죠. 정말 아무것도.]
“음…… 저 사람이 지금 뭐라고 하는 거지?”
“이해하려 하지 마라. 원래 저런 캐릭터니까. 거만하고, 밉살맞지.”
[나는 다릅니다. 커리어 내내 날 피해 가는 투수들과 상대해 왔고, 증명해 냈죠. 아, 그렇다고 디트로이트가 말하는 ‘붐’이 훌륭하지 않다는 게 아닙니다. 단지, 나와 비교하기에는 조금 격이 떨어진다는 거지.]
우와. 진짜 말 이쁘게 하네.
아무 생각 없이 듣기만 하는데도 뭔가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하,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 경기 분석을 시작해 보죠.]
[그럴까요?]
그 뒤로도 사회자가 한마디 할 때마다 자신의 무용담을 내세우며 나를 교묘하게 깎아내리는 그…… 아니 놈.
“붐, 설마 신경 쓰는 거 아니지? 저런 퇴물의 말에?”
“설마. 그 정도로 예민했으면 저런 성적을 올리지도 못했을걸.”
“그만 봐도 될 것 같군. 정말 하나도 영양가가 없는 말들이야.”
TV가 꺼지고, 모두들 은근히 내 눈치를 보는 게 느껴졌다.
“다들 왜 그래? 내가 저런 말 듣는 게 하루 이틀이야? 난 전혀 신경 안 써. 이 똥 같은 문신 말고는.”
정말이다. 하나도 신경 안 쓴다.
사람마다 선수를 평가하는 기준이 다른 법이니까. 그리고 난 그런 사람들을 제법 존중하는 편이다.
좋은 말은 좋은 사람이니까, 나쁜 말은 날 질투해서.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게 속이 편하다는 걸 깨닫기도 했고.
“이제 슬슬 일어나지? 슬슬 맘이 잠자리에 들 시간이니까. 이삭, 잘 먹었어.”
“어? 어…… 그래.”
주섬주섬 뭔가를-헤나 용품들- 챙기는 폴리와 그런 폴리를 도와주는 다른 녀석들을 뒤로하고 집으로 향했다.
* * *
[이곳 디트로이트의 열기가 아주 뜨겁습니다. 주말 낮경기인 만큼 많은 사람이 몰릴 것으로 예상했었습니다만, 정말 빈자리가 단 한 자리도 안 보일 만큼 꽉 들어찼네요.]
[사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디트로이트시 자체가 야구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물론 성적 때문이기도 했지만, 바로 근처에 있는 하키팀인 디트로이트 레드윙즈가 25년 연속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면서 ‘하키 타운’이라고 불렸기 때문이기도 하죠.]
[그렇군요. 하지만 지금 이 관중으로 봐서는?]
[구단 관계자의 말을 들어 보면 작년부터 유의미한 수치의 평균 관중 증가가 있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팬들이 스포츠에서 바라는 건 승리 아니겠습니까?]
“자, 시간이 됐군. 승리할 시간이야. 모두 준비됐나?”
- Yes, Boss!
“그럼, 나가지. 나가서 내게 승리를 가져다줄 수 있도록.”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팀이 잘나가기 시작한 이후에 말을 아끼던 론이 오늘은 앞장서서 분위기를 조장하고 있다.
[보스턴 레드삭스로서는 오늘 매치업, 상당히 불안할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상대하는 투수가 코리 클루버 선수에 비해서 에두아르도 로드리게스 선수가 조금 네임밸류가 떨어지긴 하니까요. 하지만 에두아르도 로드리게스 선수가 만만한 투수라는 건 아닙니다. 그랬으면 중요한 경기에 선발로 내보낼 리가 없으니까요.]
[경기 전 인터뷰에서 보스턴 레드삭스의 알렉스 코라 감독이 아주 의미심장한 말을 했었죠?]
[네, 맞습니다. ‘자연재해에 맞서선 안 된다. 그저 지나가기를 기도할 뿐이다.’라는 말이었는데……. 아마 이 자연재해가 김사범 선수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시즌 내내 노골적인 견제에 시달린 김사범 선수가 오늘 경기에서는 어떤 활약을 보여 주는가가 오늘 경기의 관전 포인트라고 할 수 있겠네요.]
[아하하, 그러고 보니 어제 제이슨 폴리 선수에 이어 오늘 김사범 선수의 팔뚝 문신이 화제가 됐었죠?]
[지구에서 가장 죽이는 공을 던지는 제이슨 폴리? 그런 뜻이라는데……. 경기 전에 슬쩍 물어봤는데도 말해 주지 않던데요? 아마 뭔가 에피소드가 있는 것 같습니다.]
[두 선수가 워낙 친하다 보니 서로 간에 장난을 치는 모습이 자주 화면에 비치기도 했죠.]
슬쩍슬쩍 땅을 고를 때마다 오른 팔뚝이 시야에 들어왔다.
모양새가 제법 웃기긴 하지만, 뭐……. 아주 틀린 소리도 아니니까.
그래도 이 문신 덕분에 어제 필이 웃는 모습을 처음으로 볼 수 있었다. 그냥 빙그레 웃는 그런 게 아닌 아주 빵 터진 모습을.
따악!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초구를 건드린 무키 베츠.
그가 강하게 잡아당긴 타구가 내 쪽으로 향했다.
제법 애매한 코스에 꽤 빠른 타구. 하지만 나라면 충분히 잡을 수 있다.
몸을 날리고, 곧 글러브에 느껴진 둔탁한 감촉.
나는 바로 몸을 일으키며 1루를 향해 송구했다.
[3-유간을 가를 것 같은 타구를 낚아챈 김사범 선수! 1루를 향해 강하게 송구합니다!]
[이거 몰라요! 무키 베츠 선수도 최선을 다해 뛰고 있습니다!]
프리먼의 미트가 오무려짐과 동시에 무키 베츠의 스파이크가 1루 베이스를 할퀴며 지나갔다.
“아웃!”
동시였지만, 동시가 아닌 타이밍.
1루심은 그 타이밍의 사이에서 아웃을 선언했다.
괜히 가슴속에서 뭔가 끓어오르는 느낌. 난 그 기분을 참지 않고 표출했다.
[보스턴 벤치에서 바로 챌린지를 요청합니다. 아, 김사범 선수가 자신의 오른팔을 가리키는데요? 설마 방금 전 송구에서 부상이라도?]
[마침 카메라가 비춰 주네요……. 아, 부상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기엔 너무 표정이 평온하네요. 아…… FIRE BALL. 김사범 선수 오른팔에 새겨진 글귀 중 FIRE BALL을 가리키는 거 같습니다.]
멋지잖아? 파이어 볼.
뭔가 마법 같은 느낌도 나고.
그리고 방금 깨달은 건데…….
지금 난, 무척 화가 나 있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