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힘 스탯 999 4번타자-143화 (143/175)
  • 143화 김사범, 2022시즌(치국(治國))(5)

    경기 후, 홈 팀 인터뷰 룸.

    “사무국은 고의사구를 남발하는 팀을 제재하는 규정을 신설해야 합니다. 아니면 자동 고의사구를 없애던가!”

    론 가든하이어 감독은 격양된 목소리로 기자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스피드 업? 이 멍청한 규정을 처음 발의한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게임당 5분을 벌자고 야구란 게임이 가지는 즐거움을 다 버리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반대편 원정 팀 인터뷰 룸.

    “이것 또한 게임입니다. 그리고 저는 저에게 쏟아질 비난을 감수할 용기가 있죠. ‘Better bend than break.’ 강한 타자를 상대하는 방법엔 바로 오늘 같은 방법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타석에서 고의사구를 지시하는 건 조금 비겁한 것 아닌가요?”

    타이거즈의 홈에서 팀의 상징과도 같은 선수를 계속해서 고의사구로 거를 거라는 소리를 너무 당당하게 해서일까, 휴스턴의 감독인 A.J 힌치에게 계속해서 날카로운 질문이 날아들었다.

    “비겁? 비겁한 건 사인을 훔치거나, 덕아웃에서 전자기기를 사용하거나, 선수를 속여 계약…… 아니, 아무튼 그런 겁니다. 이건 게임의 일부예요.”

    “붐을 매 타석 거르는 게 게임을 이길 방법이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는 오늘 5타석에서 5번의 출루를 했고, 8개의 도루와 5득점을 했는데요.”

    “그건 제가 감수해야 할 리스크입니다. 하지만 전 제 방식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날선 인터뷰는 아주 빠르게 기사화되어 미국 전역으로 퍼졌다.

    “fuck! 그 비열한 놈이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봐봐, 잭.”

    “……정신이 나간 건가? 이 멍청한 녀석은 이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리스크? 하.”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디트로이트와.

    “당연한 거 아냐? 물론 방식이 조금 좋지 않았지만, 그것도 야구지. 우린 타격 연습을 보는 게 아니라 야구 경기를 보는 거라고!”

    “제길, 그 녀석을 걸어 내보낸 다음에 홈으로 들여보내지만 않았어도 완벽했을 텐데.”

    “어차피 포수도 애송이었어. 물론 투수도. 디비전 시리즈에서는 그렇게 쉽게 2루를 주지 않겠지.”

    ‘가해자’인 휴스턴의 팬들로부터 시작된 논쟁은 온라인/오프라인, 라디오/TV를 가리지 않고 한참 동안 아주 핫한 이슈로 떠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타이거즈의 골수 팬이자 백악관 출입 권한을 가진 기자가 ‘아이스 브레이킹’을 핑계로 이 주제를 미합중국 대통령에게까지 묻기에 이른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그런 멍청한 의견을 제시한 사람과, 그 의견을 실행되도록 한 실무진들을 다 해고해야 한다.’

    물론, 대통령의 이런 발언은 엠바고가 걸려 기사화되진 않았지만, 인터넷을 통해 아주 빠르게 전파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휴스턴은 자신들의 전략을 꿋꿋이 유지하였다.

    결국 디트로이트가 휴스턴과의 경기를 스윕하고, 자신들이 세운 최다승 기록과 타이를 이룰 때까지 김사범은 3경기에서 13번의 출루와 9번의 도루를 기록하는데 그쳤다.

    이런 도가 지나친 휴스턴 에스트로스의 고의사구 행진 때문에 메이저리그 사무국도 이 주제에 대한 회의를 열 수밖에 없었다.

    “한 명의 선수 때문에 룰을 바꾼다는 건 말도 안 됩니다. 그건 특혜예요.”

    “하지만 자동 고의사구가 생각보다 게임 시간을 줄여 주지 않는다는 건 검증된 사실이죠.”

    “경기당 제한을 두는 것도 괜찮은 방법 같습니다. 자동 고의사구를 경기당 한 번으로 제한하고, ‘사범 룰’이라고 홍보하면…….”

    “안 됩니다.”

    “네?”

    “그건 위험해요.”

    “무슨……?”

    “아무튼, 이건 여기서 쉽게 결정할 사안이 아닙니다. 시즌이 끝나고 난 뒤, 전문가들과 각 구단의 의견을 종합해 보죠.”

    * * *

    둥. 둥. 둥.

    원래라면 덕아웃 한 구석에서 음료수를 담아두는 용도로 쓰였을 통이 아주 웅장한 소리를 내고 있다.

    “붐의 의자!”

    두둥! 둥! 둥!

    “붐은 항상 여기 앉아 충전하지, 마치 로보캅처럼!”

    둥둥!

    “디트로이트를 지켜줘요 로보-붐!”

    미친놈들.

    이 정도쯤 되면 나보다 이 녀석들이 내 의자를 더 좋아하는 게 분명하다.

    “이게 그 유명한 붐의 의자야?”

    “맞을걸? 버스 좌석, 맞네.”

    “음.”

    올 시즌 합류한 베테랑급 선수들도(코리, 라미레즈, 프레디) 신기하다는 듯 의자 주변에서 떠들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앉아있는 의자 주변에서.

    “제발 조용히 좀…….”

    “폴리, 붐이 뭐라고 하는데?”

    “몰라, 안 들려. 붐! 붐!”

    “일종의 루틴이군. 하긴, 나도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땐…….”

    시끄러운 폴삭(폴리+이삭)의 목소리와 웅장한 음료수 통의 울림, 팀 내 고참들의 웅성거림까지.

    도저히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다.

    “아! 좀!”

    화를 내 봐도 마찬가지.

    여기 앉아 있는 동안에는 내가 복수를 하지 못한다는 걸 아는 녀석들도 그렇고(애초에 파크 구석에서 마인드 컨트롤을 하고 있던 나를 의자째 덕아웃으로 옮긴 게 이 녀석들이다), 베테랑들은…… 말할 것도 없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저 지켜보고 있을 뿐이니까.

    ‘마인드 컨트롤, 마인트 컨트롤.’

    경기 끝나고 보자.

    “붐…… 붐…….”

    ……시미즈도.

    [자, 선수 소개가 끝나고 이제 경기가 시작됩니다.]

    [디트로이트 타이거즈는 오늘 경기를 꼭 이기고 싶을 겁니다. 마침 상대도 텍사스 레인저스, 비교적 약한 상대니까요.]

    [오늘 경기에서 승리하게 되면 122승으로 메이저리그 최다승 기록을 또다시 경신하게 되죠?]

    [맞습니다. 일단 122승 고지에 오르게 되면 조금 더 부담 없는 플레이가 가능해지고, 오늘 경기 이후 남은 4경기에서도 주전급 선수들에게 휴식을 줄 수 있겠죠.]

    [또 하나, 김사범 선수의 기록도 있지 않습니까?]

    [현재 홈런 기록이 76개로 역시 저번 시즌에 기록했던 본인의 메이저리그 최다 홈런 기록과 동률인 상태죠, 그리고 또 하나가 있는데…….]

    [아, 또 하나가 있나요?]

    [2004년 배리 본즈의 기록인 한 시즌 최다 볼넷 기록입니다. 김사범 선수의 올 시즌 볼넷 기록은 227개, 배리 본즈의 기록은 232개니까 앞으로 다섯 개만 더 볼넷을 얻어 내면 되네요.]

    [저번 휴스턴 전에서 한 시즌 최다 고의사구 기록도 경신했었죠?]

    [네, 맞습니다. 마지막 경기, 마지막 타석에서 121개의 고의사구를 기록했었죠.]

    [많은 기록이 걸린 경기가 될 것 같습니다. 자, 코리 클루버 선수의 투구로 경기가 시작됩니다.]

    “스트라이크!”

    시즌 후반, 클루버는 여전히 위력적인 구위를 보여 주고 있다.

    마운드 위에서 별다른 모션 없이,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살짝씩 고개를 움직이면서 페이스와 사인을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다 보면 정말 로보캅이나 터미네이터가 생각날 정도.

    “스트라이크! 투!”

    나는 클루버야말로 진짜 기교파 투수라고 생각한다.

    물론, 기교파 투수라는 단어는 보통 구속이 낮고, 변화구가 다양하며, 제구가 좋은 투수들에게 붙는 단어긴 하지만…… 클루버가 자신의 ‘브레이킹 볼’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가까이서 지켜보면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틱!

    퍼엉!

    “스트라이크! 아웃!”

    [줄리오 파블로 마르티네즈 선수, 코리 클루버 선수의 커브에 스윙을 해봤지만 파울팁으로 삼진을 당하고 맙니다.]

    [여전히 위력적인 구종입니다.]

    바로 저거다.

    누구는 커브라고 말하고, 누구는 슬라이더라고 말하는 저 공.

    클루버는 단지 ‘브레이킹 볼’이라고 말할 뿐이지만, 슬라이더보단 종변화가 심하고, 커브보다 횡변화가 심하다. 파워 커브? 아니, 슬러브라고 부르는 게 더 맞을 거 같다.

    아무튼, 예전엔 투 스트라이크 이후 결정구로 주로 써먹던 저 공을 이제는 낙폭과 변화를 조금씩 조절하면서 카운트를 잡는 용도로도 사용하고, 어떨 때는 한 이닝에 50퍼센트 가까이 집중적으로 던지면서 상대 타자들을 혼란에 빠지게 하는 모습까지 보여 주는 클루버.

    전성기보다 2~3마일씩 떨어진 구속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최정상급 활약을 유지하고 있는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다.

    “헤이! 붐! 집중해!”

    “하고 있어!”

    내가 잡생각을 할 때마다 귀신같이 알아채는 이삭의 목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다시 게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스트라이크! 아웃!”

    음…… 집중이…….

    “아웃!”

    별로 필요하진 않았지만.

    [마지막 타자를 낫아웃으로 잡아내는 코리 클루버 선수입니다. 역시란 말이 절로 나오는 피칭이었습니다.]

    [작년 시즌에 1선발 자리에서 활약해 주던 크리스 아처 선수도 대단한 투수지만, 이번 시즌에 영입한 코리 클루버 선수는 그보다 한 차원 높은 선수네요. 시즌이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평균 구속이 조금 떨어진 걸 우려하는 전문가들이 많았는데…….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겠어요.]

    [클리블랜드 소속일 때는 체력이 떨어질수록 낮아지는 팔 스윙이 문제였지만, 올 시즌엔 그런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시즌 초반부터 이닝 관리를 엄격하게 해 준 보람이 있겠어요.]

    “오늘도 역시 좋네요, 죽여줬어요. 코리.”

    “음.”

    덕아웃으로 돌아가며 건넨 말에 당연하다는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클루버.

    ‘이 정도 위치면 로테이션에서 한 번 정도는 빠져도 될 거 같은데. 이런 걸 보고 워크에식이라고 하는 건가?’

    솔직히, 우승이 결정되고 나면 팀 분위기가 허술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지구 우승, 조금 더 크게는 월드시리즈 우승을 목표로 두고 달려온 레이스에서 갑자기 목표물이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이곳의 모든 선수들은 그런 기색 없이 단지 오늘의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누구는 최다승 팀의 일원이 되고 싶다는 욕망으로, 누군가는 그저 그게 당연한 거니까, 또 다른 누군가는 프로의식으로.’

    그런 팀원들을 보고 있자면 나도 지금 이 자리에서 안주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난,

    오늘 ‘붐의 의자’에 앉았다.

    * * *

    [1회 말, 주자 만루에서 김사범 선수가 타석에 나섭니다.]

    [어? 아하하하, 팬들이 좋아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네요.]

    지난 휴스턴 전에서 항상 그랬듯, 나는 타석에 들어서자마자 배트를 뻗어 담장 밖을 가리켰다.

    좌측, 중간, 우측.

    세 방향 모두를.

    “……존중이라는 걸 모르는 녀석이군.”

    이시아 어쩌구란 이름을 가진 텍사스의 포수가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저기 언덕 위에 있는 겁쟁이들도 날 존중하지 않는 편이지.”

    “……홈플레이트에 붙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안 붙어. 그러니까 빨리 공이나 던지라고 해.”

    붙을 필요가 없지.

    아니,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발바닥만 붙으면 된다.

    [텍사스 레인저스의 한스 크루즈, 셋 포지션.]

    아주아주아주 고맙게도 무사 만루 상황에서 고의사구는 나오지 않았다.

    상대는 작년부터 텍사스에서 애지중지 키우는 선발 유망주. 패스트볼과 슬라이더 투 피치로 올 시즌 8승을 올린 녀석이다.

    ‘14패는 뭐…… 팀 상황에 비하면 나름 선방한 수치라 치고.’

    퍼엉!

    “볼!”

    물론 그렇다고 해서 1회부터 불붙은 우리 타선을 막을 정도는 아니다.

    “아예 비우고 시작하자고. 지금 저 녀석, 아예 제구가 안 되잖아?”

    안타-안타-볼넷으로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만루를 채웠음에도 텍사스 벤치는 그저 마운드를 한 번 방문했을 뿐, 별다른 액션을 취하지 않았다.

    후웅!

    “스트라이크!”

    꽤 움직임이 좋은, 수직 무브먼트가 심한 슬라이더. 지금처럼 존 근처에서 머무르게 던질 수 있다면 아마 크리스 정도의 커리어를 가질 수 있을지도.

    [2구는 헛스윙을 유도해 내는 한스 크루즈 선수입니다.]

    [패스트볼과 슬라이더 두 구종 모두가 플러스급이라고 평가받는 선수예요. 김사범 선수, 방심하면 안 됩니다.]

    [여전히 주자는 만루, 3구를…… 아, 아예 와인드업을 하는 한스 크루즈 입니다.]

    그렇지만.

    잠재력만 가지고는 이 정글과도 같은 곳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만약 그게 가능했으면 싱글A에 가득한 ‘툴쟁이’라 불리는 유망주들은 모두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고 있겠지.

    따아악!

    [김사범 선수의 타구가 쭉쭉 뻗어 나갑니다! 아직은 이르지만, 디트로이트의 신기록을 기념하는 축포이자 김사범 선수 본인에게도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가질 타구입니다!]

    나중에 보자. 루키.

    넌 지금 이 기억을 잊을 수 있을까?

    만약 잊는다면, 아마 계속해서 날 보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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