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힘 스탯 999 4번타자-137화 (137/175)

137화 김사범, 2022시즌(제가(齊家))(3)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의 전용기 안.

“하나를 해결했나 했더니 또 하나가 나타났군.”

통로를 사이에 두고 앉은 페이스의 말에 케이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붐과 이삭이 아주 잘해 준 거 같은데……. 붐은 또 왜 저러는 거지?”

전용기에 탄 뒤로 창문에 머리를 박고 알 수 없는 말을 계속해서 중얼거리고 있는 김사범.

케이시는 그런 김사범을 보며 페이스에게 물었다.

“잉실, 채구임므. 이거 일본어 아냐?”

“아니다. 나도 들어 본 적 없는 말이군. 아마 한국어인 거 같다.”

“아, 그렇지. 붐은 코리안이었지.”

“아무튼, 붐이 갑자기 상태가 안 좋아진 이유가 있을 텐데…….”

케이시와 페이스가 고민에 빠질 무렵, 김사범은 폴리의 인터뷰를 보다 얻은 깨달음에 아주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수리가 임신을? 분명 힘들다고 했는데……. 그게 아니라면 무슨 선물이지? 아니, 아니야. 수리의 성격상 그냥 그런 선물을 가지고 큰 선물이라고 말할 리가 없지. 분명 임신이 맞는 것 같은데……. 무슨 선물을 사가야 하는 거지? 꽃? 아니면…… 케이크? 음…….”

수리와 단둘이 있을 때는 제외하고는 잘 쓰지 않는 그의 모국어가 마치 방언처럼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두 남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큰 한숨을 내뱉었다.

“후우.”

“후.”

“그런데…… 그럼 라테는…… 우리 계획은 라테를 붐에게 붙여서 자신감을 찾게 하는 거였잖아…….”

케이시-페이스-시미즈로 이어진 ‘라테조’는 심도깊은 토의와 철저한 데이터 분석을 통해 문제점과 해결책까지 다 도출해 놓은 상태.

하지만 바로 그 해결책의 상태가 급속도로 이상해진 건 그들이 예상했던 변수에서 크게 벗어나 있었다.

“음…… 그래도 일단 진행해 봐야지.”

케이시의 자신 없는 대답.

“자칫 잘못하면 역효과가 날 수 있다. 이렇게 멘탈이 관련된 슬럼프의 경우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데, 붐의 상태는 도저히 그럴 상태가 아니군.”

부정적인 의견을 밝힌 페이스가 그들이 짠 계획을 전면적으로 다시 재검토하자는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 무언갈 곰곰이 생각하던 시미즈가 재빨리 말했다.

“그럼…… 라테에게 말해 줄까……?”

“뭘 말이지?”

“붐이…… 고민이 있다는 걸…….”

“뭐?”

시미즈가 낸 의견에 자기도 모르게 상체를 숙이며 눈을 빛내기 시작한 케이시.

“라테는…… 말을 하는 걸 좋아하니까…… 붐이 고민이 있다는 걸 알면…… 분명 가서 말을 걸 거야……. 아니더라도 우리가 도와주면 되고…….”

“그리고?”

“라테는…… 붐에게 상담을 해 주면서 자신감을 찾고…… 붐은…… 적어도 왜 그러는지 알 수 있을 거니까…….”

“흠. 괜찮은 의견이군.”

“나도 동의.”

주장-비판-더 나은 대안으로 이어진 선순환 구조를 확립한 세 명의 대화에서 이렇게 모든 구성원이 한 번에 찬성하는 경우는 많이 없었다.

“내가…… 내일…… 라테에게 말해 볼게…….”

“좋군. 아주 어려운 일이야. 해낼 수 있어?”

“물론…….”

시미즈의 눈이 마치 청춘 만화의 그것처럼 불타오르고 있었다.

* * *

‘설마, 받고 싶다는 선물이 아기 용품인가? 그럼 일단 아들인지, 딸인지부터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두 번째 원정지인 LA에서도 내 고민은 계속됐다.

‘예전에 다른 선배들이나 후배들이 했던 걸 보면 보통 꽃다발을 준비하고…… 또…… 돈? 돈은 아닐 거야. 음…… 아기 신발을 보러 가야 하나?’

조금 다른 게 있다면…… 고민이 되면서도 입가가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거?

‘나를 닮은 아들? 아니면 수리를 닮은 딸? 수리를 닮은 아들도 좋지. 똑똑하고 똘망똘망하게 생겼을 테니까. 음…… 날 닮은 딸만 아니면 되는데…….’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해서 얻게 된, 나와 그녀를 닮은 2세라니.

상상만 했을 뿐인데 월드시리즈 마지막 타석에서도 고요했던 내 심장이 마구 뛰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혼자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라커룸에 앉아 있을 때, 내 옆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붐, 붐. 무슨 좋은 일 있어요? 어제까지만 해도 완전 얼굴이 안 좋던데? 좋은 일이 있으면 나눠요!”

요즘 조용히 덕아웃 한구석을 지키고 있던 라테가 오랜만에 활발하게 입을 놀리며 내 옆자리에 앉았다.

평소였으면 귀찮아서 대충 대답하고 말았겠지만…….

“좋은 일? 있지, 아주 좋은 일이야. 그런데 좀 고민되는 일도 있고.”

왠지 모르게 오늘은 라테와 함께 수다를 떨고 싶은 날이다.

“뭔데요? 아주 좋은 일? 고민되는 일? 두 개가 같이 온 거예요? 이야, 저도 예전에 그런 적이 있었는데. 졸업 파티 때였나? 그 당시 제가 좋아하던 제니퍼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용기내서 졸업 파티 파트너로 같이…….”

평소엔 얘가 뭔 소리를 하나 싶은 이야기도 오늘은 제법 재미있다.

“……그래서 당일에 딱 집 앞으로 갔는데! 다른 남자, 아, 그 남자는 미식축구팀 주장이던 데이브라는 녀석인데, 요즘에 뭐하는지 모르겠어요. 아무튼 그놈이랑 집 앞에서 키스를 하고 있더라고요!”

키스?

키스??

내가 만약 계속해서 여기, 미국에서 산다면…… 어떤 놈팽이가 내 딸에게 키스하는 장면을 목격할 수도 있다는 건가?

“아무튼 그래서 결국 파트너 없이 쓸쓸하게 파티장 한구석에 있었는데, 누가 내 등을 톡톡 치는 거예요. 그래서 돌아봤는데…… 옆집에 살던 제이미였던 거죠! 전 그때 제이미가 했던 말을 아직도 잊을 수 없어요.”

여긴 아무래도 너무 성에 관해 개방적이다.

만약 첫째가 딸이라면……. 일단 열 살 정도까지는 여기서 살다가 은퇴하고 아랍권 나라, 아니. 거긴 여성 인권이 별로지? 흠, 어디로 가야하지?

“내가 돌아보자 환하게 웃으면서 ‘짜잔, 졸업 선물이야. 어때?’ 이러면서 한 바퀴를 도는데……. 우와. 제이미가 그렇게 예쁜지 처음 알았어요. 그래서 바로 제가…….”

잠깐. 선물?

“잠깐만, 선물?”

“네. 선물.”

“그럼 그때부터 그…… 제이미와 만난 거야?”

오호. 내가 왜 이 생각을 못했지?

주변에 물어보면 아주 쉽게 풀릴 문제인데.

“그렇죠. 내년에는 결혼하려고요. 제가 메이저에서 첫 풀타임으로 뛴 바로 다음 시즌에 결혼하기로 했거……든요…….”

갑자기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급격하게 텐션이 떨어진 라테.

이래서는 내가 원하는 답변을 얻을 수 없는데.

“뭐…… 보나마나 곧 마이너로 강등당할 것 같지만……. 후우.”

도대체 라테를 맡기로 한 녀석들은 뭘 한 거야? 아직도 얘 맨탈 하나를 케어 못 한 거야?

* * *

“난 자세한 코칭은 못 해 줘. 사정이 있어서. 대신 경기 전 세션, 나하고 돌자.”

내 생각엔 지금 라테의 슬럼프는 첫 풀시즌 소화로 인한 -그게 비록 플래툰이라 할지라도- 피로와 상대 팀들의 견제 때문이다.

클리어 저 양반처럼 무던하고 마이페이를 가진 사람이야 곧 자기 중심을 잡을 수 있지만……. 아무래도 라테가 그러기엔 아직 나이도, 경험도 부족하니까.

따악!

“좋아. 아주 좋은데? 그렇죠?”

“좋군. 최근 연습 중에는 제일 나아.”

스킬 때문에 직접적인 코칭이 거의 불가능한 내가 녀석을 위해 할 수 있는 방법은 지금처럼 기를 살려주면서 간접적인 코칭을 해 주는 정도?

따악!

“오. 그런데…… 라테의 타격 폼이 원래 저렇게 작았나요? 레그킥도 그렇고, 타격 준비 자세도 그렇고. 뭔가 작아진 느낌인데…….”

“타율 2할 5푼의 중장거리 히터가 되는 것보다 3할을 치고 싶다더군.”

“음…….”

이게 메이저리그의 무서운 점 중 하나다.

선수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것.

그 생각이 아주 잘못된 게 아닌 이상 코치들이 크게 관여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잘못된 길로 가기도 하지. 그렇다고 이걸 뭐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유망주 딱지를 떼고 빅리그에 올라온 이상 자신의 선택은 자신이 지는 게 맞으니까.

“원래의 스윙이 더 낫지 않을까요? 저렇게 오그라든 스윙으로는 설사 잘 맞는다고 하더라도 충분한 힘이 안 실려서 좋은 타구가 나오지 않을 텐데.”

“본인이 빠르게 느끼길 바라야지. 억지로 시킬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역시.

“흠…… 코치님이 말씀해 주시면 아주 잘 받아들일 거 같은데요. 지금 라테는 굉장히 절박해요. 근데 제가 말하기엔 좀…….”

여기가 메이저리그라도 코치와 선수 간 존중해야 할 선이 있는 거다.

그리고 난 그 선을 이용할 거고.

“흐음……. 그럴까? 본인이 직접 깨달아야 더 얻는 게 많을 텐데.”

“그러다가 마이너로 떨어지면…… 라테는 아마 다시 못 올라올 수도 있겠죠. 다른 선수들이 대기하고 있긴 한데……. 그래도 쓸 만하잖아요? 성격도 그렇고, 그라운드에서도.”

“흐음…….”

“생각 있으시면 제 훈련 때 슬쩍 말해 주세요. 선수 한 명 살린다 셈 치고.”

라테의 타격 연습이 끝나고, 이제 내 차례가 됐다.

따악!!

따아악!!

딱!

따아아악!!

중간중간 폼을 크게 휘두르기도 하고, 작게 휘두르기도 했다.

뒤에서 라테와 타격코치가 이야기하고 있던 걸로 봐선 코치의 액션이 있던 것 같기는 한데.

두고 봐야겠지.

그리고 그날 저녁. 에인절스와의 원정경기.

“트라웃을 봐. 거의 대부분의 투수들은 그가 스윙을 내지 않는 포인트를 알고 있어. 그렇지?”

“그렇죠. 고등학교 때 항상 그의 경기를…….”

“그만. 그런데 봐봐, 매년 조금씩, 혹은 컨디션이나 체력에 따라 약간은 변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인 타격 메커니즘은 전혀 변하지 않고 있잖아.”

트라웃 정도 되는 타자가 약점 하나를 잡겠다고 타격 폼을 통째로 뜯어고친다면, 그건 그것대로 경악할 일이다. 그걸 도와준 타격코치가 있다면 바로 쫒겨날 정도로.

“음…… 하지만 붐은 매 시즌 메커니즘을 바꿔 왔잖아요?”

“그건 내가 특별해서고.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못하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한번 몸에 입력시켜놓은 타격 매커니즘을 쉽게 버리지 말라는 거야.”

내 말에 뭔가를 곰곰이 고민하는 녀석.

그런 라테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나가. 일단 나가서 예전처럼 겁 없이 한번 쳐 봐.”

“하지만…….”

“하지만이란 소린 하지 말고. 그건 약한 놈들이나 내뱉는 말이야.”

“그치만…….”

얜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이렇게 소심해서 메이저리거가 될 수…….

“전 오늘 라인업에도 못 들었는데요……. 치려고 해도…….”

아.

이런.

* * *

[경기는 8회 초. 7:11의 스코어에서 디트로이트 타이거즈가 대타를 냈습니다.]

[아직 홈 팀인 에인절스에게 두 번의 공격 기회가 남아 있기도 하고, 8회 말에는 마이크 트라웃 선수의 타석도 남아 있거든요? 오늘 김사범 선수와 함께 두 개의 홈런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4점 차이로 만족할 수 없다는 뜻이겠죠.]

[라테 헤미체, 시즌 초반만 해도 굉장히 날카로운 스윙을 가졌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플랫 휘트니 선수와 함께 플래툰으로 기용이 됐었는데, 언제부턴가 장점인 우완 투수에 대한 타격능력이 뚝 떨어졌어요. 플래툰 타자의 경우 보통 이런 슬럼프에서 헤어 나오기 쉽지 않습니다.]

[왜 그렇죠?]

[일단 기회가 줄어드니까요. 팀 입장에서도 굳이 경쟁력이 떨어진 플래툰 타자를 선발로 낼 필요가 없거든요.]

[아, 그렇군요. 그리핀 케닝, 초구를 던집니다.]

“스트라이크!”

시작이 좋다.

물론 초구부터 뚝 떨어지는 커브를 선택한 에인절스 배터리 때문에 헛스윙을 하긴 했지만, 예전 한참 좋았을 때의 그 스윙이 언뜻 보였다.

배트를 눈앞에 세우고 크게 심호흡을 하는 라테.

“라테! 보여 줘!”

내 파이팅에 라테가 날 보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

따아악!

[2구! 아! 타구가 큽니다! 커요!]

[가운데 담장, 넘기나요? 충분할 것 같은데……. 우와아!]

[마이크 트라웃, 펜스를 밟고 올라가 홈런 타구를 건져 냈습니다! 1루를 향해 달리던 라테 헤미체 선수가 크게 아쉬워하는군요!]

[아쉬울 만하네요. 오랜만에 기회가 온 타석에서 이런 슈퍼플레이가 나오다니…….]

[8회 초. 원아웃 상황입니다.]

“크-하! 아쉽군! 아쉬워!”

“그래도 좋은 타구였어. 나이스 배팅.”

“아깝네, 거의 한 달 만에 큰 타구 아냐?”

나를 포함한 팀 동료들은 덕아웃으로 들어온 라테를 마치 홈런을 치고 온 사람처럼 환영해 줬다.

자연재해와 같은 수비에게 홈런을 뺏기긴 했지만, 타격에서의 접근부터 시작해서 타구까지 완벽한 타석이었으니까.

내 앞에 다가온 라테가 날 보며 물었다.

“붐, 어때요?”

“죽여줬지. 그리고, 내일은 정말 다 죽여 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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