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김사범, 2022시즌(캠프, 파이어!)(2)
플로리다.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타격 훈련을 하는 선수들 사이에서 디트로이트의 론 가든하이어 감독이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었다.
“시범경기에서부터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의 열기가 뜨겁습니다. 론, 어떤 비결이 있나요?”
“비결? 이 정도의 라인업이면 비결이라 할 게 딱히 없습니다. 그저 선수들이 잘 준비될 수 있게 도와주는 것뿐이죠.”
3개의 케이지에서 쉴 새 없이 울리는 타구음.
론은 인터뷰를 하면서도 끊임없이 고개를 돌려가며 선수들의 배팅을 지켜보고 있다.
“아하, 그렇겠군요. 이미 캠프가 2/3 이상 진행되고 있는 시점에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한 몇몇 선수가 아직 라인업에 남아 있는데요, 그들을 PR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글쎄, 누구를 말하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라테 헤미체, 플랫 휘트니, 클리어 피스.”
“오, 이런. 내 비밀병기들이 다 알려졌군. 꼭 대답해야 하나요?”
“그럼요. 사실 저도 궁금하거든요.”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는 남자가 익살스러운 표정을 한 채 되묻자, 론은 어쩔 수 없단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라테와 플랫은…… 아, 이 표현이 아주 잘 어울리겠군요. 팀 내 누군가가 자주 하는 말인데…… ‘최고의 야구선수를 절반씩 먹어치운 녀석들’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음……. 적절한 설명이 아니었어요, 론.”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그게 정답인걸, 하하하. 나머지는 시즌이 시작되면 알게 될 겁니다.”
그 뒤로도 몇 번의 실랑이가 있었지만, 입을 열지 않는 론에게 포기한 듯한 어투로 묻는 기자.
“좋아요, 절대 더 이상은 말하지 않는군요. 그럼…… 클리어 피스?”
“많은 걸 말해 주진 않을 거예요. 하지만…… 그가 중압감을 이겨낼 수만 있다면, 8년 전 그를 방출했던 팀은 눈물을 흘릴 겁니다. 아마도.”
“이것도 충분하지 않군요. 마지막 질문은 부디 충분한 대답이 되길 바랍니다. 굉장히, 아주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거든요.”
“뭐죠?”
론에게 구단측과 사전에 협의된 마지막 질문을 건네는 기자.
“붐의 계약, 어떻게 되고 있죠? 설마…….”
기자의 말에 론이 씨익 웃으며 답했다.
“지금 시간이?”
“오후 두 시 삼십 분이네요.”
“그래요? 그럼 지금쯤 도장을 찍었을 겁니다.”
“네?”
* * *
“좋은 계약이었습니다.”
내 옆에서 단장을 향해 손을 내미는 짐.
“만족스럽군요. 붐, 우린 이제 계약 ‘인증샷’을 찍어야죠?”
따라 일어난 내게 새 유니폼과 모자를 건네는 알.
‘아니, FA로 팀을 옮긴 것도 아니고 그냥 재계약한 건데 굳이 인증샷까지야…….’
“오, 표정에서부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알겠군요. 안돼요. 무조건 찍어야 하니 이리 와요.”
“하하하, 사범, 빨리 가서 찍어요. 알에겐 방금 전 사인보다 이게 더 중요할 수도 있으니까.”
얄밉게 웃는 짐을 한번 노려봐 주고 알에게 다가가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사무실을 나서는 순간.
“사범, 벌써 기사 뜬 거 알아요?”
“네?”
짐이 보여 준 스마트폰 화면의 메인 페이지.
[타이거즈, 붐(사범 킴)과 재계약 완료. 12년 총액 4억 5천만 달러.]
“와, 이렇게 보니 정말…… 많아 보이네요. 그나저나 이렇게 빨리 기사가 올라가요? 1분 전에 사진을 찍고 나왔는데?”
내 질문에 짐이 핸드폰을 두드리며 대답했다.
“구단에 우호적인 언론 매체에 먼저 뿌려 둔 거겠죠, 그리고…… 지금 나도 뿌렸고.”
“네?”
“우리가 같이 설계한 계약은 아주 흥미로운 주제가 될 거예요. 물론 내가 다른 선수의 에이전트라면 이런 계약은 절대 하지 말라고 하겠지만.”
뭐, 계약이 좀 특이하긴 하다.
12년이라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4년 계약을 3번 붙여 놓은 형태니까.
“정말 자신 있는 거죠?”
짐의 장난스러운 물음에 나도 핸드폰을 하며 대답해줬다.
“물론.”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붐과 12년 계약 발표.
- 타이거즈의 오프시즌 숙제와 같았던 붐의 재계약이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었다.
월드시리즈 우승 뒤, 붐과의 연장계약을 장담하던 알 아빌라 타이거즈 단장은 ‘이번 계약으로 우리 구단은 적어도 12년 동안은 경쟁력을 갖췄다.’며 큰 만족감을 표했다.
한편, 이번 계약은 크게 3개의 페이즈로 진행되며, 4년마다 구단과 선수가 모두 동의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옵트아웃이 발효된다.
붐의 에이전트는 이러한 계약 방식에 대해 ‘내 고객은 자신이 성공한다는 것을 단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계약 방식은 그의 자신감 표출의 한 형태.’라고 말했다.
구단과의 협의에 따라 공개된 계약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2년 총액 4억 5천만 달러.
- 매해 3천 7백 50만 달러 균등 지급.
- 추가적인 할부 지급 없음.
- MVP, 골드글러브, 실버슬러거, 홈런, 출전경기 수에 각 50만 달러씩, 연간 250만 달러의 보너스.
- 옵트아웃 조건 : 매 4년마다 구단과 선수 모두의 동의.
한편, 데뷔 2년 만에 커리어 134홈런, 120도루를 기록 중인 붐은 빠르면 올해 200홈런-150도루를 기록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며, 이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빠른…….]
* * *
따아악!
“와우! 좋아!”
오늘도 론의 리액션이 불을 뿜고 있다.
뭐랄까…… 한 선수를 향한 일방적인 사랑?
[클리어 피스가 시범경기 다섯 번째 홈런을 뿜어냈습니다! 아. 덕아웃의 론 가든하이어 감독이 아주 해맑게 웃고 있네요.]
[론 가든하이어 감독이 알 아빌라 단장에게 강력하게 요청했던 선수라고 합니다. 참 특이한 이력의 선수에요.]
[영화로도 나와 있어 더 이상 아주 놀랍지만은 않은 이야기입니다. 지금 시범경기 홈런 1위, 타율 1위, 타점 1위를 달리고 있는 저 선수가 1년 전까지만 해도 자동차 수리를 하고 있었다고 하네요.]
[꿈을 다시 찾아 돌아온 클리어 선수도 대단하고, 그 선수를 눈여겨보다 재빨리 데려온 론 감독도 대단합니다.]
174의 비교적 작은 키, 검은 피부를 가진 남자가 묵묵히 다이아몬드를 돌고 있다.
“대단하네, 론은 어떻게 저런 선수를 알아본 거야?”
똑같이 작은 키인데 시즌 홈런이 10개도 안 되는 나약한 똑딱이 이삭이 한탄하듯 말했다.
“화이트삭스에 있을 때 봤대. 시범경기에서 한 경기 2홈런을 쳤다나?”
“2홈런? 근데 왜 방출된 거야?”
론의 말을 들으며 나도 의문을 가졌던 부분이다. 곧 이어진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 경기에서 3실책. 경기 끝나고 나서 자기를 놀리는 동료 선수들을 폭행.”
“아…….”
“조심해라. 입 잘못 놀리다가는 평생 임플란트하고 다닐 수도 있으니까.”
뭐, 대화해 보니 폭력적이진 않은 것 같지만.
“……붐과 폴리로도 벅찬데, 또 벤치클리어링 불리가 한 명 더 온 거야?”
오.
그쪽으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이삭과 쓸데없는 잡담을 하는 사이, 루상의 주자를 모두 비운 클리어가 덕아웃으로 들어왔다.
“나이스 배팅! 죽여주는데?”
“후-아!”
“이렇게만 해!”
다른 동료들의 축하를 받으며 자리로 돌아오고 있는 클리어-물론 그런 클리어를 경쟁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마이너리거들은 슬쩍 빠져 있었지만-가 마침내 내 앞까지 왔다.
“어땠나-”
“죽여주던데요? 나도 그렇겐 못 쳐요.”
“정말?”
“정말로.”
“이거 기분 째-지는군! 예-에!”
어…….
클리어에 대한 내 평가를 조금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눈이 좀 이상한데?’
“으하하하하하! 이 팀에 오길 정말 잘했어! 크아하하하!”
덕아웃 분위기 적응을 완벽하게 끝마친 호세의 웃음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 * *
그날 저녁.
“이게 그 유명한 붐-의 저녁식사군!”
“클리어, 이건 붐의 저녁식사가 아니라…….”
“여기서 월드-시리즈 트로피가 탄생한 건가? 역사적인 순-간!”
틀렸다. 폴리의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아.
‘저 아저씨 약하는 거 아냐? 경기력 향상 약물 그런 거 말고, 진짜 약.’
안 그러면 저런 지옥텐션을 유지할 수가 없을 텐데.
“붐, 저 아저씨 혹시…….”
“아닐 거야. 아니겠지.”
나만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닌 것 같다.
“붐! 붐! 오늘 제가 누구를 상대한 줄 알아요? 양키스의 킴이에요! 붐과 킴은 같은 나라에서 왔죠? 우와, 그럼 잘 알겠네요? 한국은 어때요? 좋은 나라인가요? 사실 더블A에 있을 때 알던 늙은 밥, 아, 늙은 밥이 누구냐면…….”
여기 지옥텐션 한 명 더 있네.
라테 헤미체. 워싱턴 더블A에 있던 녀석을 알이 데려왔다. 그리고 바로 캠프에 합류시켰는데…… 꽤 쓸 만하다. 오른손 상대로만.
“……그래서 그 아저씨가 사기꾼한테 준 돈이 얼만 줄 알아요? 5만 달러예요! 맙소사! 일 년 바짝 벌어 보려다가…….”
음…….
야구를 잘하려면 뭔가를 꼭 포기해야만 하는 건가? 등가교환의 법칙 이런 것처럼?
‘그럼 폴리는 아이큐고, 이삭은 키, 케이시는…… 겸손? 시미즈는 숫기일 거고, 페이스는 재수겠지. 가끔은 내가 들어도 재수 없으니까. 그리고 저기 둘…… 아니 셋은…….’
“에휴.”
“그래서 늙은 밥이 말했어요. ‘한국은 정말 훌륭한 나라야. 물론 내가 보고 온 게 아니라 내 비자가 보고 왔지만. 하하.’ 어때요? 웃기죠?”
입꼬리를 올려 충분한 리액션을 취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 정상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한 페이스와 케이시에게 다가갔다.
“……그래서 그건 멍청한 선택이라는 거야.”
“음, 그건 동의한다.”
뭔가에 대해 심도 깊은 토론을 하고 있는 둘.
역시, 나를 제외하면 이 두 명이 제일 낫다.
“무슨 이야기야? 웬 멍청한 선택?”
내 질문에 아주 정확하게 대답해주는 페이스.
“네 계약이 선수 입장에서는 굉장히 멍청한 선택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어?”
“굳이 그렇게 옵트아웃을 넣는 것도 그렇고, 지금 계약하지 말고 1~2년 뒤에 계약했으면 충분히 더 큰 금액으로 계약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뭐, 그래도 최다연봉은…….”
내 심오한 뜻을 말해 주기 위해 입을 여는 순간, 옆에 있는 케이시가 끼어들었다.
“페이스, 분명 최다연봉을 받아 냈고, 뭐 팀의 전력을 유지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다고 그럴 거야.”
후.
안 되겠다.
“붐! 어디 가!”
“아-하, 이렇게 즐기면서도 완-벽하게 휴식 시간을 지키는군!”
“붐! 붐! 아직 내 이야기가 다 안 끝났는데! 그 늙은 밥이 진짜 한국에서!”
“멍청한 도망자군.”
“동의.”
아, 스트레스.
론과 프런트의 선수 보는 눈은 제법 정확한 거 같지만…… 하아.
* * *
그렇게 괴롭힘 아닌 괴롭힘을 당하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캠프도 얼마 남지 않았다.
따아악!
[김사범 선수! 오늘도 시범경기를 초토화시키고 있습니다!]
[시범경기가 거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 나가면서 이제 점점 출전시간을 늘려 가는 김사범 선수죠? 오늘 경기에서도 3타수 2안타 2홈런. 완벽하네요.]
[저번 시즌보다 페이스가 훨씬 더 좋은 것 같아요. 잘하면 이번 시즌에 자신의 기록을 또 경신할 수도 있겠는데요?]
[하하하, 그건 좀 힘들 수도 있습니다. 정규시즌이 시작되면 김사범 선수와 정면승부를 하는 상황 자체가 굉장히 드물 테니까요.]
워싱턴의 무슨무슨리버라고 하는 마이너 레벨 투수를 상대로 가볍게 담장을 넘기고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캠프 초반에 복잡했던 덕아웃이 아닌, 조금 휑하게 느껴지는 덕아웃.
“좋-아! 이제 내 차례인가?”
“붐! 역시 붐!”
새로운 얼굴들도 제법 익숙해졌고. FA로 합류한 호세 라미레즈나, 프레디 프리먼도 슬슬 입이 풀리는지 제법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제이슨 폴리! 시범경기 다섯 번째 등판에서 첫 세이브를 따냈습니다! 완벽하게 돌아온 타이거스의 마무리입니다!]
[도무지 빈틈이 없는 팀이네요. 작년 시즌에는 어? 하는 느낌이었다면 이번 시즌에는 어! 하는 느낌이에요. 지구 1위는 당연한 것 같고, 이제 남은 건 스스로와의 싸움이 될 거 같습니다.]
폴리의 첫 세이브를 마지막으로, 우리는 시즌에 돌입할 준비를 끝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