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힘 스탯 999 4번타자-122화 (122/175)
  • 122화 김사범, 실감하다(2)

    “10년 4억 달러.”

    “네? 뭐라구요?”

    퍼레이드가 끝나고, 이상하게 나와 잘 말을 안 하려 하는 수리에게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물어보려고 하던 찰나, 짐이 우리 집에 방문했다.

    그리고 수리는 짐을 핑계로 가족들을 이끌고 나가 버렸고.

    “7년 2억 3천만 달러도 있고, 15년 4억 7천만 달러도 있어요.”

    타이밍을 못 맞춘 짐에게 뭐라고 한마디 하려는 순간, 짐이 이상한 말을 하면서 내 말을 막았다.

    “15년 계약은…… 8년 차에 옵트아웃이 있군요. 대신 계약 초반부터 8년 차까지 연봉은 1억 4천만 달러 정도……. 흠, 이건 개인적으로 추천하지 않아요.”

    “잠깐, 잠깐. 이게 뭐…… 뭐예요?”

    “뭐긴, 사범에게 디트로이트가 제시한 금액이지. 사실 사범이 이 정도 폼만 유지한다고 치면 꽤 헐값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뭐, 홈 디스카운트라는 게 있으니까.”

    내가 메이저리그에서 슬슬 자리를 잡고 있을 때, 어떤 칼럼을 본 적 있다.

    ‘절대 깨지지 않을 400M의 벽’

    뭐 이런 제목이었던 거 같은데, 경제학적으로 한 스타플레이어를 얻기 위해 지불하는 돈이 400M을 넘게 되면 구단이 무조건 손해라는 내용이었던 거 같은데…….

    “4억 달러…….”

    “디트로이트 입장에서는 뭐, 충분히 노력하고 있는 거죠. 아마 사범이 계약해 주고 올해 연봉협상을 하게 되면 단숨에 사치세 기준을 넘게 될 테니까.”

    4억 달러라. 4억 달러.

    이걸로 뭘 할 수 있지?

    음…… 슈퍼카나 이런 걸 막 긁어모을 수 있는 건가?

    아니, 음…… 요트? 요트도 살 수 있겠지?

    “뭐, 사실 구단 걱정을 할 필요는 없어요. 기본적으로 전 구단 상대 트레이드 거부권은 기본이고……. 대신 옵션 금액은 좀 적네요. 있어 봤자 시즌 MVP와 골드글러브, 실버슬러거 정도? 대신 보장금액이 크니 별 상관은 없겠지만…….”

    혹시 내가 한국의 구단도 살 수 있을까?

    4억 달러면…… 환율이 천 원이라고 쳐도 4천억…….

    짝!

    “사범!”

    '"네?”

    깜짝이야.

    “집중해요. 지금 우린 사범의 10년을 결정하는 거잖아요? 바꿔 말하면…… 타이거즈의 10년이 불행해진다면 사범도 그럴 거라는 이야기에요.”

    “음…….”

    짐이 포스트잇이 덕지덕지 붙은 서류뭉치를 테이블에 올려놨다.

    “구단 측 제의를 정리한 자료니까, 읽고 결정해요. 명심할 게 하나 있는데…… 음,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이제 사범이 갑이고 구단이 을이에요. 요구할 게 있으면 뭐든지 요구해도 된다는 뜻. 알죠?”

    “알겠어요.”

    짐이 표정을 풀고 의자에 기대며 말했다.

    “자, 그럼 이제 심리상담을 좀 해볼까요? 사범, 내가 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았어요?”

    음…….

    둘만의 이야기를 말하기엔 조금…….

    잠시 후.

    “아하하하하! 크크크크큭!”

    “뭐가 그렇게 웃긴데요?”

    “하하하, 하. 하. 아, 정말 사범은 최고예요. 최고의 고객을, 친구를 보내 주신 신께 감사를.”

    이 양반은 도대체…….

    “그러니까, 수리가 이상하게 삐져 있다는 말이잖아요?”

    “그렇죠.”

    “그 원인을 모르겠고?”

    “그게 뭔지 알면 내가 이렇게…….”

    “좋아요. 조금 있다 수리가 돌아오면 어떻게든 같이 산책을 나가요. 그리고 내가 지금 말하는 대로 그대로 따라하면 돼요.”

    그리고 잠시 후, 짐이 떠나고 나서 도착한 가족들의 지원을 받아 수리와 함께한 산책. 나는 짐이 알려 준 멘트를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했다.

    “수리, 내가 너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갑작스럽게 내 마음을 표현했지? 미안해.”

    이게 문제였다고? 정말?

    “……적어도 둘만 있을 때 한 번이라도 말해 줬으면 이러지 않았을 텐데.”

    맙소사.

    드디어 수리가 대답했다.

    27시간 30분 만에!

    ‘위대한 짐’ 님이 내려주신 가르침이 맞았다.

    “남자들이 좋아하고 여자들은 싫어하는 표현방식 중 하나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선언하기. 물론 뭐, 좋아하는 여자들도 있겠지만 그건 드물어요. 심지어 사랑한다고 했다면서요?”

    “사랑하니까요.”

    “오, 갓. 그게 어떤 의미인지…… 음, 어쩐지. 한국에선 그 표현이 일상적이죠?”

    “그렇죠. 그게 뭐 잘못된 건가요? 오히려 여기가 더 적극적으로…….”

    “적어도. 연인 사이에서는 일상적이지 않은 표현이죠. 여기서는. 그런 말을 단 둘이 있을 때도 아니고. 그것도 처음으로…… 후. 일단 이렇게 합시다.”

    아주 정확하게.

    “그냥 그때 마음이 그랬어. 말하지 않으면 못 참을 정도로 간절하게.”

    이건 진짜다. 거짓이 아니다.

    “……그래?”

    고개를 들어 날 쳐다보는 수리.

    27시간 32분 만에.

    “그리고…… 진심이야. 널 사랑하는 건.”

    하나, 둘, 셋.

    수리가 내게 안겨 왔다.

    “나도…… 그냥 조금 당황스러워서…… 나도 그래.”

    짐. 날 가져요.

    * * *

    [타이거즈와 붐, 10년 350m 규모 연장계약 체결 직전]

    [타이거즈는 붐을 잡을 수 있을 것인가?]

    [타이거즈의 단장 알 아빌라 ‘추측성 보도, 자제해 달라.’]

    “그래서, 계약할 거야?”

    케이시의 물음에 잠시 텀을 두고 대답했다.

    “글쎄, 그렇게 쉽게 생각할 건 아니라.”

    “그래? 흠…….”

    갑자기 불길한 미소를 짓는 케이시.

    “이봐! 폴리! 붐이 여길 떠난대!”

    “케이시!”

    이 미친놈, 폴리하고 붙어 다니더니 쓸데없는 거만 배워서!

    “뭐? 진짜? 어디로 갈 건데?”

    맙소사, 그걸 또 진지하게…….

    “……폴리, 나 아직 서비스 타임도 안 끝났어. FA 되려면 3년이나 남았고.”

    “그래도 갈 수 있잖아. 안 그래?”

    “팀에서 날 보낸다고? 내가 붐인데?”

    좀 재수 없는 말이긴 한데, 디트로이트가 날 다른 구단에 보낸다면…… 아마 코메리카 파크가 불탈 거다. 아니면 프레스에 넣어져 납작해지든가.

    “우웩.”

    “토할 거면 저기 가서 해라.”

    폴리와 내 대화를 듣던 이삭과 케이시가 동시에 내게 물었다.

    “그래서, 정말 떠날 생각이야?”

    “그럼 언제 계약할 거야?”

    흠.

    “일단 조건은 좋은데…… 조금 걸리는 게 있어서.”

    “어떤 제안이든 그 정도 돈을 받으면 걸리는 게 있어도 그냥 계약해야지. 300m이라니…….”

    아닌데. 더 많은데.

    “그것도 그런데…… 난 약팀의 상징 같은 선수가 되고 싶진 않거든.”

    “약팀의 상징?”

    “예전 피츠버그의 맥커친이라든가, 뭐 있잖아. 그런 선수들.”

    “아…….”

    우리나라 말로는 소년가장.

    난 팀과 내가 같이 성장하고, 여기 빅리그에서 오랫동안 군림하길 원한다.

    ‘내가 장기계약을 덥석 받아들이고 나서, 페이롤이 부족해 다른 포지션에 빈자리가 생긴다면…….’

    물론 뭐, 그때 가서 트레이드를 요청한다든가, 태업을 한다든가 하는 방식으로 구단을 압박할 순 있겠지만…… 그건 내 방식이 아니다.

    내 커리어를 망치는 일이기도 하고.

    “흠, 그럼 나도 다시 생각해 봐야 하나?”

    “뭐야, 케이시 너도?”

    “음?”

    “엥? 다들 뭔가 제안이 있는 거지? 난 또, 나만 받은 줄 알았네.”

    내가 잠시 입을 다물고 있는 동안, 페이스와 시미즈를 제외한 나머지 녀석들은 서로를 보며 머리에 물음표를 띄워 올렸다.

    “뭐야? 다들 팀에서 제안을 받은 거야?”

    “어…… 응.”

    “난 저번 시즌부터 슬슬 이야기했지.”

    “나도 내 에이전트가 말해 주던데.”

    뭐지?

    여기 있는 네 사람 모두에게 계약을 제의했다고?

    “아무튼, 난 여기가 좋아. 내 꿈을 이뤘기도 하고. 난 아마…… 남을걸?”

    케이시의 말에 이삭과 폴리가 대답했다.

    “나도. 일단 가족을 데려와야 하거든.”

    “나는 뭐, 붐이 계약하면 그때 해야지. 내가 더 늦게.”

    음, 뭐, 좋은 거겠지.

    구단 재정이야 뭐, 내가 신경 쓸 필요도 없고.

    * * *

    디트로이트의 단장실, 보고서를 읽던 알이 앞에 서 있는 직원에게 물었다.

    “다들 분위기는 어때?”

    “일단 붐의 에이전트는 아직 이야기 중이랍니다.”

    “……붐 말고.”

    “이삭이야 예전부터 에이전트와 이야기 중이었으니 금방 도장을 찍을 겁니다. 계약 기간도 5년으로 긴 편이 아니니까요. 서비스 타임을 커버하는 것만으로도 긍정적인 분위기죠.”

    “좋아. 다음?”

    큼큼, 직원이 목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제이슨 폴리도 일단은 긍정적입니다. 어차피 클로저가 받을 수 있는 돈은 한정적이고, 계약 기간도 꽤 길게 잡았잖습니까?”

    “정 안된다면 폴리의 계약은 미뤄도 돼. 그럴 필요는 없겠지만.”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케이시 마이즈?”

    “가장 어렵습니다. 에이전트가 요구하는 건 10년 단위의 장기계약 아니면 서비스 타임 3년 플러스 1년을 커버하는 4년짜리 계약이더군요.”

    “빌어먹을, 10년 전의 메이저리그였으면 상상조차 못할 일인데.”

    자리에 앉아 있던 알 아빌라가 몸을 일으켜 사무실 구석에 있는 찬장에 다가가며 말했다.

    “서비스 타임, 이제는 정말 의미 없는 말이야. 다른 멍청이들 때문에 구단이 누려야 할 기본적인 권리조차 챙기지 못하다니, 제길.”

    “에이전트들도 그 점을 은근히 강조하고 있죠. 우리도 휴스턴처럼…….”

    “그만, 그건 너무 나갔어. 만약 이대로 계약을 맺지 않고 연봉조정으로 간다면 어떨 거 같나?”

    “한 명당 800~1000만 달러는 나갈 겁니다. 아주 긍정적으로 보면.”

    “그리고 우린 조정위원회에 가서 깨지고 그 두 배를 지불하겠지. 그들은 절대반지를 가졌잖아?”

    “그렇겠죠…….”

    탁!

    어느새 찬장에서 꺼낸 독한 위스키를 테이블에 놓으며 알이 말했다.

    “적당히 달라는 대로 줘, 중요한 건 붐이니까. 슈가대디가 붙었는데 무슨 걱정이야?”

    “음…….”

    “그리고 우리의 새 ‘대디’가 보고서를 요청하더군. 팀의 부족한 부분이 뭔지. 그걸 메꾸려면 어떤 대가가 필요한지.”

    “적극적이네요.”

    “월가에서는 악마라고 불렸던 사람이니까. 구단주들이 그가 지분을 인수하는데 동의한 순간부터 이럴 줄 알고 있었지. 아무튼 움직이자고. 창고에 돈이 가득한데 놀고 있을 수만은 없잖아?”

    * * *

    [여러 매물을 시장에 내놓은 디트로이트, 늘어날 페이롤 관리?]

    [메이저리그 사무국, 2022시즌 개혁안 발표.

    - 주요 발표사항

    내셔널리그-지명타자 전격 허용

    시즌 액티브 로스터 27명, 9월 확장 로스터 시행 시 30명.

    관행처럼 이어진 보복구, 강력한 징계 예정.

    [사무국의 발표로 함박웃음을 짓는 노장들, 가치 급상승.]

    “난리도 아니네요.”

    짐을 배웅해 준다는 핑계로 가족들을 먼저 게이트로 들여보낸 뒤, 짐에게 간단하게 시장 상황을 듣던 내가 한 말이다.

    “사범은 놀라지 않네요? 나는 미리 알고 있었는데도 놀랐는데.”

    “내셔널리그도 그럴 때가 됐죠. 이미 ‘진짜 야구’를 사랑하는 분들은 다…….”

    “크크큭, 거기까지. 알아들었어요.”

    “아무튼, 덕분에 시장이 아주 혼란스러워요. 물론 사범에겐 좋은 일이지만.”

    “군대 문제 때문에 디트로이트 말고는 별로 안 좋아하지 않아요?”

    “그럴 리가. 내년 아시안게임이 11월로 밀리면서 그건 더 이상 큰 문제가 아니게 됐죠.”

    그렇긴 하지. 그래서 내가 작년에 올림픽 대표에 뽑히지 않았어도 가만있었던 거고.

    “아무튼, 계약서는 읽어 봤어요? 원한다면 더 많은 금액을 뺏어 낼 수도 있어요. 상황이 바뀌었으니까.”

    “뭐…… 그건 짐이 알아서 해도 될 거 같고……. 사실, 별로 실감이 안 나서.”

    짐이 내 눈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그럼 다른 요구조건이 있단 말이죠?”

    흠. 이걸 구단에서 받아들이려나.

    “4년, 4년마다 옵트아웃을 걸어 줘요. 선수 옵션으로. 조건은 짐이 생각해 보고. 대신 무조건 4년마다 FA로 나갈 수 있어야 해요.”

    “그게 무슨……?”

    “서로가 서로에게 경각심을 가지자는 거죠. 둘 중 하나가 미흡하다면 언제든지 결별할 수 있게.”

    짐이 반짝거리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내게 말했다.

    “오, 이런 악마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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